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한나라당의 반응이 하루 새에 진화된 모습을 보였다.
8일 청와대 발표 직후 나경원 대변인은 정상회담을 "정권교체를 막아보겠다는 술책"으로 폄하했다. "대선을 앞둔 마당에 무슨 흥정과 거래를 하려고 남북정상회담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회담에 대한 의혹을 앞세웠다.
그러나 9일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는 기류가 바뀌었다. 강재섭 대표부터 "한나라당은 임기 말 정상회담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이미 합의를 한 이상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고 생각된다"며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반대만 자꾸 얘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전날 대전에서 열린 합동 유세에선 "만일 정상회담이 연말 대선을 위해 짜고 하는 이벤트 정상회담이 된다면 노무현 정권과 북한 당국이 공동 대선 선거대책기구를 만드는 것밖에 안 된다"며 회담 '흠집 내기'에 주력했던 그였다.
이처럼 정상회담이란 대형 이슈에 한나라당의 반응이 변화하는 과정에는 '수권정당'이 되기 위해 전에 없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껴안아야 하는 한나라당의 고민이 반영돼 있다. 보수정당에 안주할 때엔 명예였던 '반북'이 집권가도에선 멍에가 돼 버린 것이다.
전여옥 "아프간 무기력 무마하려는 미봉책"
정상회담에 대해 가장 '한나라당다운' 반응을 보인 쪽은 당 내에서도 '보수원단'으로 분류되는 정형근 의원이었다.
정 의원은 "6·15 공동선언이 돈 뒷거래로 이뤄졌다면 이번 선언은 정치적 뒷거래로 합의된 의혹이 짙다"며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고 했다.
이처럼 정상회담을 한나라당의 집권을 원치 않는 북한 정권과 여권의 '반(反) 한나라당 연대'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정 의원만이 아닌 한나라당 전체의 '원초적인' 반응이었다. 강 대표의 "노무현 정권과 북한 당국의 공동 대선정책기구"라는 발언이나 나 대변인의 "정권교체를 막기 위한 술책"이란 반응도 모두 이 같은 기류를 반영한 것이었다.
시각은 달랐지만 정상회담을 '정략적인 카드'로 몰고 가는 데에는 전여옥 의원도 합류했다.
전 의원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재한 글을 통해 "아프간사태의 무기력을 남북정상회담으로 눈길을 돌리려는 미봉책"이라고 주장했다.
전 의원은 "북한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남한의 노무현 대통령이 '위대한 아무개'를 알현하려 왔노라고 불쌍한 북한주민들에게 선전 선동할 것"이라며 정상회담의 장소가 또 다시 평양으로 정해진 데 대해서도 날을 세웠다.
이명박 "반대보단 의제를 앞세워야", 당에 당부
그러나 '한나라당다운' 반응은 두어 시간 만에 공개석상에서 사라진다. 한나라당의 '무조건 반응'에 이성과 전략이 개입되면서 반대의 수위가 조절된 것이다.
청와대 발표가 나온 지 서너 시간이 지나서야 자문단의 회의를 거쳐 반응을 내 놓은 대선주자들의 반응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당에도 '톤 조절'을 당부했다. 이날 오후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당 지도부-대선주자 연석회의에서 이명박 후보는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이미 확정됐으므로 반대한다는 것보다는 의제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것들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은 대선을 앞두고 정략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의도"라는 이 후보의 시각 자체는 당 지도부의 초반 반응과 다를 바 없었으나 반대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는 데 차이가 있었다.
박근혜 후보 역시 "6자회담이 있는 마당에 남북정상회담을 한다고 하니 핵문제를 매듭지으라고 이야기해야 한다"며 성과에 강조점을 찍었다.
무조건 불가론으로 나가자니 '수구 냉전세력'이란 꼬리표가 부담스럽고, 환영부터 하자니 보수층의 '북한 알레르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두 주자들이 '줄타기'의 극치를 보여준 셈이다.
이들의 당부는 곧장 당 지도부의 스탠스에 반영됐다. 이후부터 지도부는 "반대"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다. 대신 '실질적 성과'의 조건을 달기 시작했다. 강 대표는 "납북된 어부 몇 명이라도 데리고 와야지 '사진 찍기용 회담'이란 비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국군 포로와 납북자 송환, 인권문제 진전 등을 회담의 과제로 제시했다.
회담장으로 입구를 막을 길은 없으니 출구 쪽 검문검색 강화 쪽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정형근 의원 역시 "정상회담을 이렇게 해서는 안 되지만 정부가 정상회담을 하면서 잘 하는 것은 한나라당이 도와줘야 한다"며 태도를 전환했다.
고진화 "말이 아닌 행동으로 평화를 실천해야"
물론, 대선주자들이나 지도부의 반응이 진화됐다고는 하지만 '반대하는 듯한' 뉘앙스가 여전한 것도 사실이다. 이에 당의 '스펙트럼 확장'을 강조해 온 소장파 진영에서는 좀 더 전향적인 태도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남경필 의원은 이날 개인 성명을 통해 "급변하는 한반도 안보 정세에 비추어 두 정상이 만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대승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당이 유연한 자세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남 의원은 "임기 말 대통령이 특별한 의제도 없이 대선을 4개월 앞둔 민감한 시기에, 답방도 아니고 또 다시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하는 등, 여러 가지 정황상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게끔 하는 요인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남북정상회담을 정권적 차원의 이벤트로 보지 말고 좀 더 큰 틀에서 남북 평화공존의 기반사업으로 이해한다면 국내 정치 일정에 비추어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고진화 의원 역시 "제 2차 남북정상회담은 정당, 정파, 지역, 계층을 뛰어넘는 겨레의 대합창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고 의원은 "한나라당은 유감스럽게도 정상회담 개최시기와 장소를 문제 삼으며 대선을 앞둔 정치적 카드로 폄하하며 이에 반대하고 나섰고 한나라당의 대선주자들도 갈팡질팡하고 있다"며 "정파적 시각과 대선이라고 하는 당리당략을 떠나서 지난번에 내놓았던 한반도 평화비전을 조속히 당론으로 확정짓고 말로써 평화가 아닌 행동으로써 평화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이 이번 정상회담에 대해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한나라당에도 득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전문가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이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면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무슨 합의가 나오건 그것은 최소 50%가 한나라당의 업적이 된다"며 "결코 한나라당에게 불리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정 전 장관은 "정권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라면 불평만 하면 그만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 회담을 역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며 오히려 "유불리가 없는 걸 불리하다고만 본다면 중장기적인 차원에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한나라당 협력하면 성과 50% 가져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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