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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도 대중화도 좋지만 국악의 본바탕은 지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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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퓨전도 대중화도 좋지만 국악의 본바탕은 지켜야"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7/25] '국악인생 50년' 판소리명창 안숙선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국악계의 프리마돈나로 불리는 영원한 국악인 안숙선씨가 올해로 소리인생 50년을 맞았습니다. 국악을 낯설어하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판소리 명창 안숙선씨는 모르는 이가 드물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가 높아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여전히 공연 요청이 많은데요. 본인 역시, 국악을 위한 자리라면 마다하지 않고 그 어떤 곳이라도 달려간다고 합니다.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국악인 안숙선 명창을 초대해 국악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앞장서온 지난 50년에 대해 얘기를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국악인 안숙선 명창입니다!

안숙선 명창은 1949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9살에 소리를 시작했고 남원여고를 졸업한 이후 서울로 올라와.. 김소희, 박봉술, 정광수 등 명창들의 문하에 판소리 다섯 마당을 배웠습니다. 1979년 국립창극단에 들어가 지금까지 약 30년간 창극을 계속해오고 있고 86년 국립극장 완창 판소리 무대에서 판소리 다섯 마당을 차례로 소화해내 명창 반열에 올랐습니다. 199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 보유자로 지정됐고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역임했으며 2000년부터 한국종합예술학교 전통예술원 성악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남원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 대통령상을 비롯해 프랑스 정부의 예술문화훈장과 한국 정부의 옥관문화훈장을 수상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우선 축하드리고요. 어느새 반백년이 되셨습니다. 판소리 하신 지가

안숙선 : 반백년이라는 말씀을 들으니 많이 부끄럽네요.

박인규 : 50년을 맞는 소회가 어떠십니까?

안숙선 : 50년이라는 단어가 요즘 저한테는 굉장히 부담스러운데요, 요즘 자꾸만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제가 과연 50년 동안 무엇을 했나 생각해 보니까요, 모두가 다 내실이 없이 제가 꼭 하고자 하는 일을 집중적으로 할 시간도 없이, 수박 겉핥기처럼 내실없지 않았나 싶어서 후회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너무 겸사의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50년 해오신 분이 겉핥기만 해왔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안숙선 : 전 그렇거든요.

박인규 : 일단 50주년을 맞으셨으니까 나름대로 기념하는 공연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아는데요.
▲ ⓒ프레시안

안숙선 : 네. 기념공연은 이런 차원에서 좀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기념공연도 사실 맘에 썩 들질 않아요. 만날 봤던 공연인데 뭘 또 보느냐 하실 것 같아서. 그래도 우리 국악인들의 잔치들이 좀 많이 이뤄지면 대중들에게 많이 어필하지 않을까 싶어서 하긴 하는데요, KBS홀에서 28일에 방송으로 잘 짜여진 그런 프로그램을 제가 그동안 쭉 해나왔던 판소리, 가야금병창, 그리고 창을 관현악단과 협연하는 것들, 또 창극으로 만드는 것들, 이런 것들을 한 무대에서 보실 수 있게 돼 있고요. 11월에는 정동극장에서 3일을 잡았습니다. 첫날은 제 병창과 소리를 하루 하고, 그 다음에는 저를 국악의 길로 가게 해준 제 친 이모님이 생존해 계시기 때문에 그 이모님, 그리고 국악 하는 가족들, 그리고 제자들, 또 제 지인들 이런 분들 모시고 이튿날은 하고. 3일째 되는 날은 아무래도 우리 국악이 창극이라는 덩어리로 하나로 뭉쳐졌을 때 대중성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나 너무 크게 벌여 놓으니까 해외공연 가기도 어렵고 너무나 많은 예산이 들기 때문에 아주 착은 창극, 12~ 15명이 아주 작게 우리 소리나 몸짓이 잘 전달되게 하는 운동도 하는 기회를 만들고 싶어서 그렇게 창극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작은 규모의 창극. 그건 춘향가입니까? 아니면 창작인가요?

안숙선 : 춘향가를 하려고 합니다. 해외에도 소개할 겸 해서요.

박인규 : 저희가 창극 하면 판소리로 하면 오페라로 알고 있는데, 말하자면 오페라타 같은 걸 하시는 거군요. 저희 프로그램에 김덕수씨가 한 번 나오셨는데 잘, 아십니까? 그 분도 올해 50년이시라고 하더라구요. 그분은 6살 때 시작하셨다는데, 아버님이 남사당을 하셔서 그때부터 해서 50년 됐다고 하시던데, 안숙선씨는 9살 때 어떻게 국악의 길에 들어서시게 된 겁니까?

안숙선 : 대부분 우리 나이 때는 본인 스스로가 우리 음악을 선택할 만큼 우리 음악에 대한 여건이 안 좋았어요. 편견이 좀 있었거든요. 제 스스로 하기에는 어려웠는데요, 저도 외가쪽 어른들이 다 문화재들이시고 강백천 대금문화재, 강도근 흥보가 문화재, 저희 친 이모님도 경남도문화재 가야금으로... 이모님께 가야금을 배우면서부터 제가 국악에 입문했고요

박인규 : 가야금을 배우신 나이가 9살 때부터

안숙선 : 9살 때부터 제가 풍류를, 48장을 어린 손으로 뜯으면서 피가 톡톡 튀겼는데, 그 피 튀기는것이 제 국악계의 앞날을 예견하는 것 같아서, 아 어려운 것을.... 하지만 어른들이 시키신 일이기 때문에 배우면서 국악원에 나가면서 무용도 배우고 악기도 배우고 소리선생님을 찾아서 소리도 배우고 그렇게 시작이 됐죠.

박인규 : 집안에 강도근 명창이라든가 이모님 강순영씨라든가 강백천 선생이라든가 굉장히 외가쪽으로 많으신데, 혹시 그 당시 국악을 하는 것에 대해서 집안에서 좀 반대랄지 그런 건 없었습니까?

안숙선 : 저도 그렇게, 제 친구들은 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는데 저만 하는 것이 어쩐지 좀 생뚱맞았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러나 어른들이 시키는 일이니까 당연히 제가 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요, 저희 친가 쪽에서는 여자는 나돌아다니는 일을 해선 안 된다. 그냥 조용히 집안일 잘 하고 걸음을 걸을 때도 한 1미터 앞을 조용히 보고 걷는 것이지... 그러나 우리 국악인들이 춤을 추고 이러는 것이 1미터만 내다봐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어릴 때 이래야 되나 저래야 되나 상당히 제 나름대로 갈등도 있었는데요, 그렇게 조금 회의와 갈등 속에서 어린 나이에 조금 마음고생은 한 것 같고요. 그때 어릴 때 제가 봤을 때는 우리의 문화공간이 전무했기 때문에, 서울을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남원 같은 데는 영화 상영하는 남원극장, 중앙극장, 거기 가면 영화나 봤지요. 또 어쩌다가 국극이 들어와서 했지, 이렇게 지금처럼 다양한 문화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제게 그렇게 큰, 왜 해야 되는지, 그렇게 조금 갈등할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박인규 : 고등학교 졸업하시고 바로 서울로 올라오신 거 아니에요. 그때는 완전히 국악의 길을 가게다고 결심하시고 올라오신 거죠?

안숙선 : 네. 그렇게 쭉 해나오다가 아무래도 서울에 계신 선생님들이 지방에 내려오셔서 지방에 있는 국악을 앞으로 하려는 저희들도 보고 어른들하고도 교류하시다가, 쟤는 싹수가 있다. 이렇게 하시다가 선생님들이 서울로 좀 올라오너라 오너라 했지만 어린 나이라 올라갈 수가 없었고. 김소희 선생님께서 68년도에 좀 올라와서 한 번 너네 기량을 보자. 해외공연 기회가 있는데 잘 하면 데려가겠다는 말씀이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와서 만정 김소희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이 제가 서울로 올라오게 된 기회가 됐고, 또 선생님을 의지하고 올라왔었죠.

박인규 : 요즘 말로 하면 김소희 선생님이 안숙선 명창을 픽업하신 건데, 스스로도 말씀하셨지만 김소희 선생뿐 아니라 많은 명창 분들한테 배우셨어요. 박귀희 선생도 계시고 박봉술 선생, 정광수 선생... 어떻게 그렇게 많은 선생님들을 모시게 되셨나요?

안숙선 : 스승님들을 떠나서 다른 스승에게 간다는 것은 그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박인규 : 제가 알기로는 한 분한테만 사사받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안숙선 : 예. 다른 데 가려면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는데, 제가 다행스럽게도 79년도에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면서, 그때 입단해서 지금 고인이 되셨지만 허규 연출선생님께서 우리 국립창극단 단원들의 기량을 더 연마해야 되겠다, 해서 밖에 계신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을 5바탕을 차례로 모셔서 저희에게 학습할 기회를 주셨어요. 그래서 여럿이 배우니까 제대로 제가 소화해내기가 힘들어서 따로 좀 부탁을 드렸죠. 개인으로 가서 좀 배워주실 수 있나요, 했더니 배우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 핑계를 대고 다른 선생님들에게 배웠죠.

박인규 : 5바탕 완창하신 게 본인이 연세가 한 40대이신가요?

안숙선 : 제가 원래 만정 김소희 선생님께 흥보가나 춘향가는 미리 다 70년대에 배워 뒀으니까요. 창극단에 들어와서 박봉술 선생님, 정광수 선생님,, 성우향 선생님, 오종숙 선생님 이런 분들께 다시 바탕소리를 배웠는데, 86년도부터 제가 완창을 시작했어요. 국립창극단은 완창프로그램이 있거든요. 그래서 처음엔 제가 수궁가를 하려고 수궁가를 막 연습했는데 그때 박봉술 선생님께서 적벽가를 완창하시게 됐어요. 그런데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시게 돼서 적벽가를 저보고 하라고.

박인규 : 적벽가가 굉장히 힘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안숙선 : 그래서, 아 이거 어떻게 하나.. 열심히 하면 될 거라고 허규 선생님도 말씀하셔서 아주 날이면 날마다 틀어박혀서 열심히 연습을 했는데요 다행스럽게도 어릴 때 강도근 선생님께 활 쏘고 불 지르는 중요한 대목을 다 배워 놨기 때문에 동편제 적벽가에 대한 음악을 이해를 많이 한 셈이죠. 그래서 여러 어른들이 어릴 때 강도근 선생님께 뻣뻣한 동편제를 기초를 잘 닦았기 때문에 적벽가를 그나마 그만큼 소화해냈다. 처음 86년도에 적벽가, 그 이후로 87, 8, 9년 90년까지 제가 5바탕을 완창을 다 한 거죠

박인규 : 1년에 하나씩 하셨군요. 제가 알기로 5바탕을 처음 완창하신 게 박동진 명창으로 알고 있는데, 그걸 다 하고 나니까 판소리에 대한 자신이 달라지시지 않습니까? 판소리를 대하시는 자세랄까?

안숙선 : 아무래도 제가 5바탕을 하고 나서 느낌은, 명창이 됐다는 것 보다는, 아.. 이렇게 하면 이제 어느 정도 과정을 이수한 것이다. 즉 교과서를 뗐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나 제 생각에는 그렇게 뗀 것만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았어요. 계속 그 뒤로 90년대를 정말 소리를 열심히 했죠.

박인규 : 해외공연 나가시면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으십니까?

안숙선 : 기억에 남는 공연이, 제가 88년도에 올림픽을 끝내고 나서 유럽 7개국을 돌았습니다. 그건 돌아가신 김동준 선생님이 북을 잡으시고, 강준혁씨라고 기획하시는 분이 기획하시고, 조통달씨가 남창, 저는 여창으로 판소리 춘향가를 앞부분은 조통달씨, 뒷부분은 제가, 이렇게 완창 개념으로 나간 거죠. 나갔는데 제가 처음으로 그렇게 제 무대를 판소리를 갖고 나갔기 때문에 정말 상당히 걱정이 많았어요. 관객이 말도 안 통하고 전혀 문화도 모르는데 소리 듣다가 벌떡들 일어나서 나가 버리면, 나가는 게 얼마나 잘 보이겠어요? 내가 소리를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나간 분이 한 분도 안 계시고요.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끝까지 다 들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소리 끝나고 나와서 저녁 뒤풀이를 하는데 교민들도 오시고 많이 오셔서 너무너무 우리 음악이 이렇게 훌륭한 줄 몰랐다는 얘길 다 하시더라구요. 그러니 앞으로 남은 일정을 아주 자신만만하게 자랑스럽게 우리 것을 제대로 다 들려주고 돌아가라. 이렇게 격려해 주셔서 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아주 크게 느꼈죠.

박인규 : 그러면 여기서 잠깐 안숙선 명창의 소리를 조금만 들어보겠습니다. 춘향가 가운데 '동문밖 나가보니'를 들어보시겠습니다.

지금 막 들어본 소리가 춘향가 가운데 '동문 밖 나가보니' 얼핏 들으니까 남원의 경치를 소개하는 것 같은데 어떤 노랩니까?

안숙선 : 이 노래는 이도령이 공부만 하다가 무료하니까 단오날 우리도 좋은 경치를 일러라. 나도 어느 곳에 가서 좀 놀다 와야겠다 하니까, 방자가 공부하는도련님이 공부나 하지 그런 좋은 데 찾아다니다가 바람나서 안 된다고 하니까, 그게 아니라 옛날 그런 문장들이 좋은 곳에서 실제로 그런 것들을 보면서 글을 다 만들었기 때문에 훨씬 더 풍부하다. 이렇게 해서 방자가 남은 경치를 일러주는 대목인데요, 맨 끝에 남문 밖 나가면 광한루 오작교가 있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 여러 곳을 다 이4야기하고 광한루를 맨 마지막으로 강조하였네요.

박인규 : 안숙선 명창은 고향이 남원이시니까 이 노래에 나온 경치라든가, 지금 남원하고 맞겠죠 물론?
▲ ⓒ프레시안

안숙선 : 예. 다 맞고요. 맞는데, 이제 남원도 가보니까 남원이 문화적으로 발굴해내야 될 곳들이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남원이 옛날에는 대방국이어서 상당히 번화했답니다. 그런데 이제 지금은 광한루가 제일 많이 남원을 대표해서 알려지고 있는데요, 그 외에 가볼 데도 참 많은데, 그 광한루는 실제 춘향가 안에 들어있는 거잖아요. 남원이 국악의 발상지고, 또 조금 더 가면 흥보가에서 나오는, 흥보가 발원.. 해서 부자 됐다는 동네도 있고, 변강쇠가 옹녀와 같이 놀았다는 곳도 있고요.

박인규 : 굉장히 남원이라는 동네가 판소리와 인연이 많은 지역이군요

안숙선 : 네. 판소리가 만들어진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박인규 : 판소리가 대중화되는 데는 안숙선 명창 등 여러 분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한 10년 넘었죠. 서편제라는 영화가 나오면서 굉장히 많이 알려진 것 같아요. 그 당시 영화 안의 소리를 안 명창께서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안숙선 : 거의 영화를 쭉 해나온 건 오정해가 다 했고 나중에 맨... 중요한 대목, 아주 중요한 대목에서 제 노래가. 송화와 오빠가 서로 만나서 거기서 영화가 요즘 말로 하이라이트 대목에서 제 노래가 나왔고. 또 범피중류라는 배 띄우는 대목, 또 맨 끝에는 만정 김소희 선생님의 구음이 나갔구요.

박인규 : 안 명창께서는 소리를 5,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하셨고 50년 가까이 해오셨는데, 판소리의 위상이랄까 사회적 대우랄까... 많이 알려진 것 같습니까? 어떻게 보십니까...

안숙선 : 요즘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판소리, 우리 음악. 저 어릴 때 보면 그 음악들이 무대에서 공연되기보다는 무대가 없었으니까요. 돌아다니면서 가설모델을 지어서 많이 공연했고, 또 어떤 때는 어른들 따라서 잔치를 한다거나 이런 행사에 따라갈 때도 있었고. 그래서 음악이라고 한다면 음악을 할 수 있는 공간에서 하는 것이 제격 아닌가, 어릴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거꾸로 어떤 생각을 하냐면, 우리 음악이라는 것이 대중들의 삶 속에서 같이 호흡을 느낀다면, 슬프고 즐겁고 이런 때 같이 나눠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반대적인 생각을 하기도 하죠. 너무 무대에서 예술적으로만 특별한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과만 말날 게 아니라 대중 속에 파고들어서 함께 울고 웃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죠.

박인규 : 요즘 보면 국악계에서 퓨전이라고 해서 국악기를 가지고 서양음악을 연주하거나 그런 유행 같은 게 생기고 있는데 국악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바람직하다고 보세요?

안숙선 : 반반이라는 생각이 좀 들어요. 제가 한 10여 년 훨씬 전에 만남, 교향악단과의 협연, 이런 것들을 제가 시도했을 때 많은 분들이 걱정하셨어요. 안숙선은 전통을 잘 보존해서 발전시켜야 되는 사람 아니냐. 그런데 제가 그때 공연을 하면서 가장 어렵다고 생각한 부분이, 우리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은 한정돼 계신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 음악을 어떤 방법을 다른 분야에... 교향악단, 양악, 아니면 재즈, 대중음악과 어떻게 같이 어울려서 알려줄 것인가. 우리 음악을 좋다고 하는 기회를 만들어 볼 것인가가 제가 굉장히 고민이었고. 그렇게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음악을 우리 전통음악 중에서 자꾸 뽑아내서 연결시켜 주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박인규 :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방법으로서는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일부에서는 자칫하면 국악의 원형이랄까, 본래 정신까지 흩트리는 거 아니냐는 걱정도 있으신 것 같아요.

안숙선 : 제가 70년대에 올라와서 활동할 때, 어느 명절날 프로그램 하나를 방송국에서 만들었어요. 거기에는 대단히 유명하신 김소희 선생님, 박초월 선생님, 이런 선생님들이 다 나오셔서 들국화라는 민요를 함께 부르셨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딱 중요한 대목에서 솔로를 하는 분은누구였나 하면 김하정씨라는... 살짜기 옵서예.. 주역이었어요. 제가 그때 그걸 보면서 아, 그렇다면 우리는 뒤에서 백그라운드 합창을 한 셈인데요, 그래서 저 분들이 우리 스타가 했어야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요, 아마 방송국에서는 그런 스타를 통해서 우리의 국악을 알리려고 했던 의도가 있었지 않나 싶어서 그런 것도 조금 제 생각에서는 대중들에게 가까이 가려는 시도로 이해를 했죠. 그러나 중요한 건 그렇게 그런 것들을 함부로. 음악이라는 것은 엄연히 우리나라의 음악정서가 따로 있고 외국의 정서가 따로 있는데 그걸 갖다가 우리화 시켜서 우리 것처럼 만들어서 내는 건 모르겠지만, 그쪽에 동화돼 버리면 어떠나 하는 걱정을 제가 하죠.

박인규 : 중심은 지켜야겠다. 올해 50년 맞으면서 말하자면 소리인생의 한 단락을 지으시는 건데 앞으로 계획이라든가 못다 하신 말씀 있으면 마무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안숙선 : 일단은 제가 오지랖 넓게 여러 분야, 국악계 중추적인 일을 다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 제 능력상으론 참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선 제가 하고 있는 음악, 소리만이라도 제가 좀 잘 하지는 못하지만 선생님들이 가르쳐 주신 그런 정신을 잘 이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조금 더 바람이 있다면 이제 우리 후진들을 생각해서 후진들이 우리 음악을 전달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 공간 조성, 또 그런 교육, 이런 것들에 좀 제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싶습니다.

박인규 : 다시 한 번 판소리 인생 50년을 축하드리고요, 앞으로 공연도 많이 하시겠지만 특히 후진들 양성에 많이 애를 쓰셔서 국악발전에 많은 기여를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안숙선 : 노력하겠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국악인 안숙선 명창을 초대해 국악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앞장서온 지난 50년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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