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도 고졸 대통령이 두 사람이나 나왔으니 큰 차이가 없다 할 것인가? 아니다.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학벌사회의 장벽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하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은 그의 정제되지 않은 말들이 학력과 맞물려 빈번하게 입에 오르내리면서 지지도 하락의 쓴맛을 보았다. 노 대통령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지만, 주류 언론과는 취임 후 이른바 '밀월기간'조차 별로 없었다.
'중졸 총리'와 학사 학위밖에 없는 석학
영국의 정치판도 옥스브리지(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와 런던대, 에딘버러대 등 명문대 출신들이 좌우한다. 그러나 '유권자를 심사위원으로 하는 구두시험'인 선거를 통과하면 더 이상 학력이 문제되지 않는다. 노동당의 경우 근래에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등 명문대 출신들이 많이 등장했지만, 원래 노조지도자들이 이끄는 정당이었으니 학력이 문제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정치판만 그런 게 아니다. 필자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인 제임스 커런(James Curran)은 세계 언론학계가 인정하는 석학이다. 십여 권의 주목 받는 저서가 있고, 한국에서 번역된 책도 네 권이나 된다. 문하에서 수많은 박사가 배출됐고, 세계 유수 대학에 제자들이 포진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최종학력은 학사다. 한국 같으면 조교도 되지 못했을 학력이다. 정년에 가까운 나이지만, 여전히 언론현실을 조회해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솔선수범하며 학생을 지도한다. 예를 들어 필자가 피상적으로 이해했던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을 논문초안에 인용했을 때 혼내는 방법은 이랬다. "그의 견해가 최근에 일부 수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 저서는 나도 읽지 않았으니 함께 그의 비판이론을 비판적으로 읽고 독후감을 교환하자."
영국에도 학벌을 비롯한 연고주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지만, 그래도 입학이나 학위취득, 교수채용에 이르기까지 최우선 관건은 성실성에 바탕을 둔 실력인 듯하다. 영국의 신문이나 방송을 유심히 보면 우리와 다른 점이 또 하나 있다. 전문가 코멘트를 따거나 인터뷰할 때 '무슨 대학 교수' 또는 '무슨 박사'보다는 '무슨 책의 저자'라고 소개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직함이나 학위보다 학문적 성과나 분야별 전문성을 더 중요시하는 관행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서는 각 분야의 전문성을, 전문성이 떨어지는 교수가 대변하는 일이 흔하다.
언론이 키운 '학벌 제일주의'
사실 우리나라만큼 교수가 언론에 많이 등장하는 나라도 드문 것 같다. '권위지'임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인지, 실력이 있건 없건 화려한 타이틀이 원고청탁의 제1조건인 경우가 많다. <동아> <조선> <서울>이 학벌 화려했던 '신정아 교수'를 칼럼니스트로 기용함으로써 그의 급성장에 일조를 했지만, 이는 사실 그들만의 '실수'가 아닌 우리 언론계 전체의 관행이다. <국민>은 나중에 가짜로 드러난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됐다며 인터뷰 기사까지 내보냈고, <중앙>은 중앙미술대전의 심사위원으로 '신 교수'를 모셨다.
신문사에서 일할 때 데스크들끼리 공감한 얘기지만, 외부기고 가운데 교수들 원고 다루기가 가장 힘들다. 글쓰기의 기본이 안돼 있으면서 조금만 원고에 손을 대도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리 사회현실과 동떨어진 글을 신문에 실어달라고 꾸역꾸역 보내오는 사람도 있다. 마지못해 독자기고 난 등에 한두 번 내보내면 '무슨 신문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을 스스로 경력난에 추가한다.
한편으로 "잡문은 안 쓴다"며 언론기고를 피하는 인문사회계열 교수들도 많다. 그 중에는 정말 학문에 정진하기 위해 기고를 거절하는 '순수파'도 있겠지만, 일부는 사회를 조회하는 끈을 놓친 본인의 게으름을 변명하는 구실로 '잡문은 안 쓴다'고 강변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사회과학도가 사회를 텍스트로 삼지 않고, 경제학 교수가 우리 경제현실을 외면하고,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신문과 방송을 열심히 보지 않는 게 우리 학계의 현실이라면 과격한 발언인가?
외환위기가 우리나라를 덮치고 언론이 한참 빗나간 보도행태를 보인 게 공연히 벌어진 일들이 아니다. 호루라기를 불어야 할 지식인들이 자기만의 성 안에 안주하며 사회를 내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직후 경제학자들의 반성이 잇따를 때만 해도 우리도 좀 달라지려니 했다. 당시 서울대 이지순 교수는 "한국경제학이 사실에 바탕을 둔 분석적 연구에 소홀하다는 비판은 학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며 "자기는 학교에 은둔하면서 언론 등에 보도된 다른 학자들의 견해를 낮춰보는 관행이 '외국학자 선호현상'을 낳았다"고 지적했다. 고려대 김윤환 명예교수는 "한국 경제학은 독자성이 없어 미국에서 들여온 주류경제학이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다양한 시각에서 한국경제를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언론학계는 언론이 경제위기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알고자 하지도 않았고, 반성도 없었다. 위기로부터 10년, 한국 경제학과 언론학이 달라졌는가? 오히려 주류 경제학과 언론학의 위세는 더 강해진 듯하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해오지 않으면 대학에 발붙이기도 어렵다. 대학마다 석·박사과정을 설치해놓고도 거기서 학위 받은 사람은 시간강사 정도로 활용하다가 내친다. 자기네가 배출한 박사를 스스로도 책임질 수 없다면 그들은 교수들 먹여 살리기 위한 '돈줄'이었나?
왜곡된 교수채용 시장이 '학력 위조' 부추겨
학문의 균형적 발전과 토착화를 위해서도 교수진 구성은 미국 박사, 기타 외국 박사, 국내 박사가 1/3정도씩 분점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사실 유학생들은 대개 언어장벽 탓에 논문 쓰기에 급급해 유학기간 동안 폭넓은 독서를 하기가 힘들다. 반면에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박사 후 과정'으로 나온 사람들 중에는 폭넓은 배경지식을 갖춘 이가 많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국의 교수채용시장에서 '계륵'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한국의 교수채용 절차는 경쟁자를 뽑는 게 아니라 무슨 동아리 멤버를 뽑는 것과 흡사하다. 서울대 김광웅 교수가 열거한 채용 변수에 몇 가지를 보탠다면, △ 자신이 가르친 제자나 동문을 뽑으려는 '동종교배' △ 자신보다 나이 많은 교수의 채용을 꺼리는 관행 △ 외부기고 활동이 활발한 사람의 기피 △ 같은 연구분야이면서 연구방법이 다른 교수를 뽑지 않으려는 경향 △ 자신과 이념적 지향이 다른 사람의 배제 △ 미국 박사 선호 등 여섯 가지가 중요한 변수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필자도 지난해 춘천의 모 대학에서 쓰라린 실패를 맛봤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여섯 가지 모두 결격에 해당됐다.
개인적으로 군대와 재벌, 언론에서 일하다가 이제 갓 대학 물을 먹고 있지만, 불공정 경쟁이 최고로 일상화한 곳이 대학사회인 듯하다. 전임교수와 강사 사이의 '불공정 행위'는 한 사례에 불과하다. 권위주의와 '자폐증'은 꽤 중증으로 보인다. 학벌사회의 못된 관행들이 가장 깊게 뿌리내린 곳이 학벌의 진원지인 대학이다.
이번 학력 위조 파문은 대학사회에 만연한 병폐가 겉으로 약간의 증상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3건의 학력 위조 사건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것도 대학에서 벌어진 '신 교수 건'이었다. 각 대학 교수들과 얘기하다 보면 명자깨나 날리는 교수들 중에 '누구 누구가 가짜'라는 얘기가 끝없이 나온다. 스스로 고백하게 하는 '커밍 아웃' 기간을 둔 뒤 교육부가 일제점검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교수직, 학위 없는 전문가에도 대거 개방해야
더 큰 문제는 정식으로 학위를 딴 교수들 중에 가짜보다도 더 실력이 없거나 사회현실과 동떨어진 수업을 진행하는 이가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이지영 씨 같은 경우 성실하게 수업을 준비하고 열정적으로 강의를 해왔기에 유명 영어강사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난공불락의 학벌사회에 실력으로 도전한 것이다. 학벌사회 타파에 앞장서야 할 KBS가 분위기에 휩싸여 이 씨를 전격 해고한 것이 온당한 처사였는지 의문이다.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시청자들은 '가짜 같은 진짜'보다 '진짜 같은 가짜'의 강의를 듣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차제에 각 분야의 업적이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학위가 없어도 교수직을 대거 개방하는 방향으로 교수채용 풍토가 바뀌었으면 한다. 그게 학문의 현실적합성과 학생들의 수업만족도를 높이는 처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번 사건의 여파는 예술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더 엄격하게 학위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학력 위조 사건이 인질 사태에 묻혀 '학력 카르텔'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면, 학위 위조는 더욱 성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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