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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이라는 수수께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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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이라는 수수께끼 3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45> '딴따라 임금' 헌강왕

'한두레'라는 놀이패가 있다. 벌써 몇 십년 째 있는 듯, 없는 듯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이 놀이패를 좀 더 자세히 소개하자면, 춤패이기도 하고, 굿패이기도 하고, 한때는 뜨르르했던 운동권 단체이기도 해서 지금도 '한두레' 출신으로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놀이패 '한두레'의, 말하자면 '꼭두'가 부산대 예술대학의 채희완 교수이다.

내가 경주 남산을 사진 찍는답시고 3년 남짓 경주에 방을 얻어 지낼 적에 채희완 교수와는 경주에서 가끔씩 만나곤 했다. 7, 8년 전쯤으로 기억하는데, 경주에서 있었던 무슨 모임 끝에 우리 두 사람만 달랑 남게 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같이 어울렸던 사람들이 다 집으로 돌아갔는데, 우리 둘만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어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냥 헤어지기도 뭣하고, 해가 중천에 떠 있었던 시각이라 술집을 찾아들기도 그렇고……. 그런 애매한 상황에서 내가 먼저, 어디 구경이나 하자고 말을 꺼냈을 것이다. 말을 꺼내긴 했지만, 마땅하게 떠오르는 데가 없었다. 승용차라도 있었다면 찾아갈 데가 적지 않았을 텐데, 그마저 없던 터여서 그야말로 막연했다. 그래도 경주 사정은 내가 좀 더 아는 편이라, 잠시 궁리한 끝에 시내버스가 자주 다니는 통일전 쪽으로 한번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근처에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정강왕, 헌강왕 두 형제 왕의 능이 있었던 것이다. 채 교수의 의향을 물었더니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바로, 통일전 행 버스를 탔다.

정강왕릉을 먼저 들렀던가, 아니면 헌강왕릉으로 바로 갔든가 기억이 자세치 않다. 아무튼 통일전에서 버스를 내려 헌강왕릉으로 솔숲 길을 올라가는데 어째, 앞장선 내 뒤를 따르는 채 교수의 발걸음이 유난히도 가볍다 싶게 느껴졌다. 원래 동작이 좀 여유롭게 느리다고 할 그런 사람이었기에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더 의외였던 것은 헌강왕릉을 참배하는 태도였다. 나는 사진 찍으러 두어 번 와본 곳이라, 능 앞에 이르러서 여기라고 몸짓해 보이고는 늘 하던 버릇으로 능을 한 바퀴 휘돌았다. 채 교수는 그러나 나를 따라 능을 돌더니 능 앞에 서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정중하고 공손하게 절을 하여 깎듯이 예를 갖추는 것이었다. 채 교수의 태도는 매우 진지했는데, 그렇게 나름대로 예를 갖추고 나서는 나를 돌아보며 미처 술을 준비해 오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것이었다. 채 교수와 경주 인근의 유적지를 돌아본 적이 한 두 번 아닌 터여서 나는, 뭐 새삼스럽게 격식을 찾느냐고 무심하게 대꾸했는데 그때 채 교수가 이렇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그래도 딴따라 임금인데……"

그랬다, '딴따라 임금'. 나에게는 헌강왕이 신라의 여러 왕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지만 채 교수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헌강왕이 채 교수에게 각별할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딴따라'였던 것이다. 채 교수는 놀이패 한두레의 꼭두이면서, 동시에 춤꾼이기도 했다. 우리 춤, 특히 탈춤에 관해서는 이론과 실천의 양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였다. 그랬기에,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직접 춤을 추었던 기록을 남기고 있는 헌강왕을 딴따라 임금이라 불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한두레'라는 놀이패의 꼭두로서 딴따라 임금 알현이 사뭇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채 교수가 술 한잔 제대로 올리지 못했음을 유감스러워 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딴따라 임금'. 가만 생각해 보니 헌강왕은 그야말로 딴따라의 원조라고까지 할 수 있었으니, 그 호칭은 헌강왕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는 『삼국유사』도 뒷받침을 해주고 있다. 『삼국유사』 기이편 '처용랑 망해사'조의 기사는 앞 뒤 두 부분의 내용이 확연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전반부가 처용이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헌강왕과 춤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후반부 기사를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 경주 남산의 헌강왕릉ⓒ 김대식

"또 포석정에 거동했을 때에 남산 신(神)이 현형하여 어전에서 춤추니 좌우들은 보지 못하고 왕만 홀로 뵈었다. 사람이 있어 현형하여 앞에 와서 춤추매 왕이 스스로 신의 춤을 짓고 그 형상을 뵈니 신의 이름은 혹이 말하기를 상심(祥審)이라 하므로 지금까지 국인(國人)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御舞)상심이라 하고, 혹은 어무산신이라 하였다. 혹이 이르되 신(神)이 나와서 춤추매 그 모양을 살펴 형상을 만들어서 공인(工人)에게 모각(募刻)함을 명하여 뒷세상에 뵈게 하였으므로 상심이라 하였다 하고 혹은 이르되 상염무(霜髥舞)라 하니 이것은 그 형상을 일컬음이었다. 또 금강령에 거동하였을 때에 북악신이 춤추었으므로 옥도금이라 하였고 또 동례전에서 잔치할 때에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추었으므로 지백 급간이라 하였다. 어법집(語法集)에 이르되 그때 산신(山神)이 춤추고 노래를 부르되 지리다도파도파등(智理多都波都波等)이라 한 것은, 대개 지(智)로 이국(理國)하는 사람이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깨진다는 것을 말함이니, 지신과 산신이 나라가 장차 망함을 알았으므로 춤을 지어서 경계하였으나 국인이 깨닫지 못하고 상서가 나타났다 하여 탐락(耽樂)함을 심하게 하다가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다."


이렇게, 헌강왕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여러 신들, 남산 신, 북악 신, 지신들의 춤추는 것을 보았을 뿐 아니라 포석정에서는 남산 신이 추는 춤을 보고는 왕 스스로 신의 춤을 짓고 그 형상을 좌우에 보여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신(神)이 추던 모양새를 살펴 "형상을 만들어서 공인(工人)에게 모각(募刻)함을 명했다"는 것은, 단지 남들이 못 보는 춤을 보고, 춤을 따라서 추었던 정도를 넘어서, 말하자면 춤사위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니, 이쯤 되면 딴따라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그러나, 헌강왕이 '딴따라'로서 우리나라 춤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이야기하기보다는, 헌강왕 앞에 나타난 여러 신들의 춤이 나라의 운명과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어법집'이라는 문헌에서 "지신과 산신이 나라가 장차 망함을 알았으므로 춤을 지어서 경계하였으나 국인(國人)이 깨닫지 못하고 상서가 나타났다 하여 탐락(耽樂)함을 심하게 하다가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조의 기사는 허두에서, 헌강왕 대에 "서울로부터 해내(海內)에 이르기까지 가옥이 즐비하고 담이 연(連)해서 초옥(草屋)은 하나도 없으며 도로에 생가(笙歌)가 끊이지 아니하고 풍우가 사시(四時)에 골랐었다."고 하여 호시절이라고 부를 만했음을 알 수 있다 . 또 『삼국사기』를 보면 헌강왕 6년 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9월 9일에 왕이 좌우 근신으로 더불어 월상루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니, 서울의 민가는 즐비하게 늘어섰고, 가락(歌樂)의 소리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왕이 시중(侍中) 민공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 들으니 지금 민간에서는 집을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아니하며, 밥을 짓되 숯으로 하고 나무로 하지 않는다 하니 사실이냐?'고 묻자 민공이 '신(臣)도 그렇게 들었습니다'라고 답하고는 '상(上)이 즉위하신 이래로 음양이 고르고 풍우가 순조로워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먹을 것이 넉넉하고 또 변경(邊境)이 안온하고 시정이 환락하니 이는 성덕(聖德)의 소치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표현으로 보아 헌강왕 시대는 세월이 태평스러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사에 뒤이어서 헌강왕 7년 조에 "3월에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와 잔치할 때 주연(酒宴)이 무르녹자 왕은 금(琴)을 타고 좌우 제신(諸臣)은 각각 가사(歌詞)를 지어바치며 한껏 즐겁게 놀다가 파하였다."라고 하여, '처용랑 망해사'조 끝부분에서 지적되고 있는 탐락(耽樂) 관련 기록이 바로 나타나고 있다.

헌강왕은 재위 기간 동안, 주군(州郡)을 순행하던 중에 처용을 급간으로 발탁하기도 하고, 전렵(田獵)을 행한다든가, 주연(酒宴)을 베푼다든가 하여 탐락(耽樂)에 젖어들다가 재위 12년에 돌도 안된 서자(庶子)를 남기고 돌아간다. 이에 헌강왕의 동생 정강왕이 왕위를 잇고, 정강왕마저 즉위 2년에 후사(後嗣) 없이 죽게 되면서는 그 누이동생이 왕위에 올라 진성여왕이 되었다. 진성여왕은 즉위 후, 숙부 되는 각간 위홍과 가까이 지내다가, 위홍이 죽자 비밀히 미소년들을 불러들여 음란한 생활을 하며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맡기기까지 하여 나라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진성여왕 3년에 전국에 도적이 들끓고, 반란이 일어나 이후 나라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에 빠지는데 이러한 현상 역시, 역대 왕들의 탐락에서 그 원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헌강왕 대의 정치사회와 '처용랑 망해사'조 설화"라는 논문을 쓴 부산대 전기웅 교수는 '처용랑 망해사'조의 분석을 통해, "헌강왕은 잦은 출유(出遊), 가무(歌舞), 호국신과의 교류를 통해 감복과 봉사를 이끌어내고 왕정을 보좌케 하였다"라고 말하면서 설화 속의 헌강왕의 시대는 "국왕과 신들이 교류하는 종교적 신이함의 세계였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전 교수는 또, '처용랑 망해사'조를 "헌강왕대의 화려하고 순조로운 왕경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처용가, 어무상심, 옥도금, 지백급간 등 가무와 관련된 네 개의 설화를 소개한 다음, '어법집'의 기사를 인용하여 이러한 가무가 장차 나라가 망한다는 경고였다는 것으로 마무리짓고 있는 것이다."라고 요약함으로써, 신라 몰락의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는 탐락(耽樂)이 헌강왕대의 기사 곳곳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가무(歌舞)와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경위를 더듬다 보면, 헌강왕이나, 건강 상의 이유로 왕위를 유지하지 못했던 정강왕보다는, 오라비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서 음란한 행실로 탐락의 극에 이르고, 실정(失政)으로 내란을 초래한 진성여왕의 책임이 크겠지만, 잦은 가무(歌舞)행사로 망국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딴따라 임금' 헌강왕 또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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