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사람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다. 이성을 가진 동물인 사람은 이성을 갖지 않은 여느 동물이 하지 않는 짓을 한다.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인다. 곧 사형제다. 사형제는 전쟁의 역사만큼 오랜 역사를 가졌다. 사람은 죄 지은 개인을 합법적으로 죽이듯이, 적대적인 집단을 죽일 것을 예상하고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다. 곧 전쟁이다. 죄의 대가를 치르라고 개인을 죽이든 전쟁의 이름으로 집단을 죽이든, 합법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인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지 못하는 인간 이성은, 합법적으로 사람을 집단적으로 죽이는 전쟁에 깜짝 놀라지 못하는 인간 이성이다. 다시 말해, 사람을 집단적으로 죽이는 전쟁에 익숙해진 사람이기에 개인을 합법적으로 죽이는 일에 익숙한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니, 문화 창달이니, 문명과 역사의 발전이니 말하지만, 인간의 성찰이성의 성숙은 도구적 이성의 놀라운 발전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다.
각 나라에서 전쟁을 준비하는(전쟁에 대비하는) 부처의 이름이 '전쟁부(ministry of war)'에서 '국방부(ministry of defense)'로 바뀐 게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그 정도의 성숙이 있기까지에도 사람은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 흐름 속에서 사형제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있었고 많은 나라들이 사형제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는 뒤늦은 편에 속하는데 1981년 사회당이 집권하자마자 제일 먼저 행한 조치가 사형제 폐지였다.
나는 사람이 사람을 집단적으로 죽이는 전쟁을 용납할 수 없듯이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이는 사형제를 용납할 수 없다. 그 뿐이고 그뿐이어야 한다. 내가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이상주의자라면 그것은 전쟁과 죽임에 익숙해진 세상의 반사로서일 뿐이다. 따라서 내가 사형제 반대를 위해 덧붙이는 아래 말들은 사족에 불과하다.
사형제 존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가해자의 인권만 생각하지 말고 피해자의 인권도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가해자를 죽임으로써 피해자의 인권을 되살릴 수 있을까? 어느 모로 보나 그렇지 못하다는 게 진실에 가깝다. 사형제 폐지운동에 나선 미국의 피해자가족단체의 예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사형제 유지가 사형에 처할 끔찍한 범죄를 줄여주는 효과가 있을까? 통계도 범죄심리학자들도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재범의 위험에 대해서는 종신형을 현실화하는 방법으로 막을 수 있다. 이 마지막 방안조차 거부하는 것은 행형편의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나아가 "죄 없는 한 사람을 벌주는 쪽보다 죄 지은 열 사람을 그냥 놔두는 쪽을 택하라"는 볼테르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여덟 분은 사형제가 없었다면 오늘 살아남아 있을 수 있다. 오심에 의해서든 국가폭력에 의해서든, 이 땅에서 다시는 억울한 희생자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범죄 행위를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는가, 아니면 사회의 책임도 고려해야 하는가? 각 나라에서 극우파에 가까울수록 사형제 존치에 집착하는 공통점을 보이는 것도 개인의 탓만을 강조하는 데서 비롯된다. 사형제가 개인의 책임만 물어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사회에서 없앰으로써 그 범죄를 낳게 한 사회의 책임까지 없애려 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봐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10년 가까이 사형 집행을 하지 않음으로써 최근에 사형을 집행한 일본에 비해 앞선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한 걸음 더, 합법적인 죽임을 불법화하는 데까지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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