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를 둘러싼 논란은 '존재'라는 보다 심오하고 본원적인 문제에 맞닿아 있다. 이는 곧 인간이 어디에서 오는 존재인가라는 근본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을 비롯한 대다수 종교인들은 인간이 하느님(신)이라는 절대자에 이어져 있음을 수긍할 뿐 아니라 고백까지 한다. 이런 종교인들의 인간에 대한 고백을 단순화하면 '모든 인간 생명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하느님께 매인 것이며 따라서 사람이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명제로 귀결된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못하기에 인간사에 많은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해할 뿐 아니라 제도로까지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절대적 진리마냥 받아들이는 이들은 이런 일들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이들의 가슴에는 어떤 '사랑'이, 어떤 '진리'가 자리잡고 있는지 스스로 되돌아보길 권한다. 진리가 아닌 어떤 허상을 '절대 진리'인 양 붙들고 있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보길 제안한다.
20년 넘게 서른 명이 넘는 최고수(사형수)들을 만나왔고 지금도 열 명이 넘는 최고수 형제들을 만나고 있는 나는 언제부턴가 '하느님' 외엔 '절대'란 말을 붙여선 안 되리란 조그만 깨달음을 갖게 됐다. '절대' 변할 것 같지 않던, 말 그대로 흉악범이 천사로 부활할 때의 감동은 겪어보지 않은 이는 아마 모를 것이다. 지어낸 얘기, 거짓말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부정이 강할수록 자신 안에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절대'로 포장된 허구를 돌아볼 수 있길 바란다.
한편으로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생의 마지막 단계에까지 이른 최고수가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까닭을 묵상해보았으면 한다. 나는 이런 기적의 실마리를 '용서'라는 사랑의 행동에서 찾고 싶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하느님께 용서받은 존재다. 일상에서 무수한 잘못을 범하면서도 용서를 청하고 또 용서를 받는다. 우리는 지난 4월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을 기억한다. 당시 모든 이들이 한마음으로 끔찍한 짓을 저지른 이를 대신해 함께 울며 용서를 빌었고, 또 기꺼이 용서해주는 마음을 확인하며 감사해 하기도 했다. 그때 적지 않은 이들이 '용서'가 가져다주는 카타르시스를 체험했을 것이다. 이렇듯 숭고하다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용서'라는 말은 용서받는 이는 물론 용서하는 이도 정화하며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최고수들을 만나다 보면 용서 받길 원하고 용서해주는 마음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심어주신 본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될 때가 적지 않다. 용서받은 최고수가 하느님 보시기에도 참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모해 가는 삶을 보며 '용서'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주님 당신이 몸소 보여주셨듯이, 하느님 앞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도, 용서하지 못할 죄도 없는 것이다.
이 '용서'라는 행위는 일면 나누지 못하고 살아가는, 용서를 향해 닫힌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군상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한다.
사형제도는 이러한 용서와 사랑, 거듭남, 화해 등 모든 선한 것들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무서운 결과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정의와 선에도 어긋나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시 한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돌아보고 참다운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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