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1817년 10월 27일 당시 아시아의 석학으로 알려진 옹방강이 32세의 젊은 제자 추사(秋史) 김정희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도대체 고려인삼이 무엇이기에 85세의 노스승이 청나라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조선의 젊은 제자에게 이토록 간절한 편지를 쓰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로부터 세월이 200년 가까이 흐른 2006년 가을, 우리는 왜 중국의 지방정부가 자기들 인삼을 표준화해서 브랜드를 통일하고 차별적으로 유통한다는데 이를 대서특필하며, 국민들은 고려인삼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는가?
'백제삼'과 '신라삼'으로 역사에 등장하다
비록 고려인삼과 중국삼이 똑같이 'Panax Ginseng' 종에 속한다 하더라도 달리 취급되어 온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무상기일(無霜期日)이나 일조시간(日照時間) 등 생육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생김새와 향이 같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중세 동북아 각 나라에서 두루 효능의 차이를 체감하면서 고려인삼의 가치가 훨씬 높게 평가되어 온 것이다. 옹방강의 편지는 그런 인식을 보여주는 한 가지 실증적인 단서에 불과하다.
우리 인삼의 가치를 보여주는 중국측 문건은 의외로 많다. 양나라의 도홍경이 480년에 쓴 <신농본초경>과 명나라 이시진이 1578년에 탈고한 <본초강목>은 우선 인삼을 만주에서 생산된 '고려(요동)삼'과 한반도에서 생산된 '백제삼' 및 '신라삼'으로 구분했다. 이때의 '고려'는 '고구려'를 뜻하는 것으로 그 이후 한반도 전체의 명칭으로 '고려' 또는 'Korea'가 사용된 것과는 다른 용례로 보인다.
아무튼 이들 문건은 '고려삼은 모양이 크나 백제삼에 미치지 못한다'거나 '백제삼은 희고 단단하며 둥굴다', '신라에서 가져온 삼은 손과 다리가 있어 마치 인형(人形) 같다'는 등의 표현을 통해 만주 지역과 한반도의 인삼을 차별적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후일 한반도 지역의 고려인삼을 유체인삼(有體人蔘)이라 하여 만주지방에서 생산한 호삼(胡參)과 차별했다는 사실과도 부합한다.
일본정부의 1893∼1896년 조사자료에 따르면, 당시 조선산 1등품 가격을 100이라고 했을 때 만주산은 40, 일본산은 25, 북미산은 20, 중국산은 10이었다고 한다(옥순종, "밭에서 나는 금, 인삼을 지킵시다", 2005). 최근까지도 고려홍삼은 만주 지역인 길림에서 생산된 비슷한 크기의 '장백산 홍삼'과 비교해 10여 배의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인삼의 명칭과 분류 식물학에서 정의하는 삼(蔘)은 '쌍떡잎식물 산형화목 오가과의 여러해살이풀에 속한다. 이 가운데 약효능을 갖는 식물인 파낙스(Panax)속 중에서도 동양삼(Panax Ginseng. C.A. Meyer)이 우리가 통상 얘기하는 '진생' 종으로서 미국삼(Panax Quinquefolius L.)이나 일본 죽절삼(Panax japonicus C.A. Meyer), 중국 삼칠삼(Panax notoginseng), 베트남삼(Panax vientnamensis) 등 다른 종과 구분된다. 이밖에 속과 종이 전혀 다른데도 어쩌다 삼이라고 불리게 된 시베리안진생(Eleutherococcus Senticosus), 인디안진생(Withiania Somnifera), 브라질진생(Pfaffia Paniculata)도 있다. 이 중에서 경제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인정돼 세계시장에 유통되고 있는 것은 동양삼과 미국삼의 두 종류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인삼의 인기에 편승해서 생긴 유사식물들일 뿐이다. 여기서 동양삼을 뜻하는 학명 'Panax Ginseng'은 고려인삼과 중국삼을 통칭하는 것으로 한국(북위 33.7∼43.1도), 만주(43∼47도), 연해주(40∼48도)에서 자생하거나 재배된다. 이 학명은 1843년 러시아의 C.A. Meyer가 붙인 것인데 '파낙스'란 그리스어로 '만병통치약'이란 뜻이며, '진생'이란 사람 모양을 닮은 뿌리(人蔘)라는 단어의 중국식 발음이다. |
우리 민족과 영욕을 함께 한 고려인삼
어쩌면 고려인삼의 역사적 연원과 차별성을 언급하는 것은 더 이상 불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가 아닌 타인의 말과 글을 통해 세계적으로 정립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고려인삼이 그렇게 차별성을 가진 것으로 보편적으로 인식되었기에 중요한 교역품의 역할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즉 고구려와 백제의 등살에 고심하던 신라 문무왕(662)은 인삼 200근을 싸 들고 당나라와 교섭하여 나당연합군을 편성하였는가 하면, 치욕적인 호란(胡亂)을 겪은 뒤 고려 원종(1277∼1299) 때는 수차례 원나라에 인삼을 보낸 뒤에야 국교를 정상화할 수 있었다. 역성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조선은 정권 초기(1392∼1453)에 명나라의 입을 막기 위해 설날과 명절 등 매년 몇 차례에 걸쳐 500∼600근씩의 인삼을 예물로 보냈고, 선조 34년(1603)에는 유정 스님 등이 인삼 50근을 들고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의 뒷정리를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경위야 어떻게 되었든, 이렇게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이를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고려인삼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과 영욕을 함께 했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조선시대 이후 국가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다
고려인삼은 국제적인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교역품은 물론 화폐대용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시대에는 대중국 사절단이 파견될 때 우리 특산물을 가져가 노자나 기밀비를 충당하는 일이 왕왕 있었는데 이것이 점차 역관에 의한 무역 형태로 발전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종 때는 북경에 가는 역관 한 사람당 인삼 10근을 가지고 갈 수 있었는데 인조 원년(1623)에는 이것이 80근으로 늘어나 소위 '8포무역'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인삼 80근의 가치는 숙종 때인 1678년 기준으로 은(銀) 2000냥, 쌀 1300석이었는데, 사신행차에 따라가는 역관은 대개 당상관 2명, 당하관 22명임을 감안하면 팔포무역의 총액은 한 차례에만도 무려 쌀 3만3000석을 넘는 엄청난 규모였다.
숙종 14년(1687)에는 일본과 인삼 3000근을 교역했고, 26년(1699)에는 대마도 태수가 금 3만 냥과 은 1100관을 가지고 와 고려인삼을 수입해 갔다. 그런가 하면 후대로 올수록 홍삼 무역량이 계속 늘어 순조 32년(1832) 8000근, 헌종 13년(1847) 2만 근, 철종 3년(1852) 4만 근이 되었고, 고종 36년(1899)에는 무려 6만7000근이 수출되기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부과되는 세금은 왕실의 주된 수입원으로 충당됐고, 나아가 1907년 <홍삼전매제도>가 정착되어 1996년 폐지될 때까지 홍삼의 제조 및 판매는 국가에 독점됨으로써 나라 살림살이의 큰 몫을 담당했던 것이다.
'재배'와 '가공'의 신기원을 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이렇게 교역량이 늘면서 이를 '산삼의 채취'로 충당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자연스럽게 '인삼의 재배' 시대가 열린 것이다. 또 장기간 수송에 따른 저장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마침내 '홍삼 제조'라는 새로운 기술도 개발되기에 이른 것이다.
고려 정종 2년(1036), 문종 24년(1070), 문종 34년(1080년), 문종 35년(1081)에는 각기 1000근이나 되는 인삼을 송나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재배하지 않고 이만한 양의 산삼을 확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무렵 한반도에서 인삼의 인공재배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고려 인종 원년(1122) 산양삼(山養蔘 · 산삼 씨를 발아시킨 뒤 산지에 뿌려 재배한 삼)의 재배가 시도됐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이 1736년에, 미국이 1886년에 각각 인공재배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우리나라의 앞선 기술수준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 인종 3년(1124)에는 생삼을 찌고 익혀서 말린 숙삼(熟蔘)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중국이나 발해에도 유사한 기술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은 되지만 이 무렵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 기록은 주목할 만하다.
"인삼은 오래 간직하기 어려우므로 건조해야 하는데 말려도 여름에 좀이 나서 쉬 상하므로 생삼을 탕부에 쪄서 숙삼으로 만들어야 오래 보관할 수 있다. 고려숙삼의 모양이 납작한 것은 고려 사람이 인삼을 무거운 물체로 눌러 진액을 짜먹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 고려에 와 보니 이는 포삼(包蔘 : 홍삼 10근을 한 꾸러미로 묶은 포장)으로 눌렸기 때문임을 알았다."
아마 당시 중국에서는 고려의 숙삼 제조방법을 잘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인삼 재배와 숙삼 제조는 당시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최첨단 바이오테크였던 것은 아닐까.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
고려인삼은 오늘날에도 농가의 소득원이자 수출상품으로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05년 현재 인삼경작 농가는 전국적으로 1만5793호이며 1만4153ha를 재배하고 있다. 인삼은 심은 후 4∼6년이 되면 수확하는데 2005년에는 2776ha에서 1만4561톤(약 5803억 원)의 수삼을 수확했다.
그동안 경작농가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경작면적과 생산량은 늘어나는 추세로서 이는 90년대 중반부터 수출 감소에도 불구하고 국내소비가 급격하게 증가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전체 농업에서 인삼이 차지하는 비중은 농가수나 생산액에 있어서는 1.1∼1.6%에 불과하지만 수출에서는 아직도 5%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05년 말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최고품질의 홍삼(천삼 10지) 600그램의 가격은 308만1000원이다. 그램당 가격으로 비교하면 은이 227원인데 비해 홍삼은 5135원이니 무려 23배나 되는 고부가가치 농산물인 셈이다. 제대로만 만들면 WTO나 FTA 등 개방화시대에 세계무대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우리의 대표적인 상품이 바로 인삼이라는 사실을 재확인 할 수 있다.
한민족 자긍심의 축인 동시에 미래 성장동력의 원천
고려인삼이 갖는 효능을 우리 전통문화 속의 일화들을 들어 설명한다든가 최근의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예시해가며 부연하는 것은 췌언이 될 것 같다.
다만 고려인삼이 우리 역사 속에서 불로장생의 영약으로, 효(孝)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온 것처럼 오늘날에는 고부가가치의 의약품과 기능성 식품, 그리고 자연과 생태, 문화의 근원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만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최근 고려인삼이 처한 위기 상황을 제대로 극복한다는 전제 위에서 하는 말이다.
달리 얘기하자면, 고려인삼은 2000년 역사 속에서 국민의 건강과 생활, 나아가서는 왕실과 국가의 살림을 지켜 온 한민족 자긍심의 한 축인 동시에 미래 성장동력의 한 가지 원천이 될 수도 있는 존재다. 오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서 우리 당대에 2000년의 명맥이 끊기는 치욕을 면할 수 있을까?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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