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적인 공립학교의 필요성
대학 진학률이 80퍼센트를 넘지만, 중고 시절 대다수 아이들은 들러리 역할에 머문다. 사실상 지금 대부분의 공립 중고등학교는 공립 여관이다. 침대 대신 좁은 책걸상 하나씩만 내주는 싸구려 숙박업소. 사립이라고 해서 사정이 별반 다르지는 않다. 우리나라의 사립학교는 사실상 운영비 전액을 국고가 보조하는 형태이므로 준 공립학교다. 국가가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 부어 십대의 에너지를 잠재우는 거대한 숙박 체인점을 운영하는 셈이다. 여관비는 싼 편이지만 국가가 보조하는 비용까지 계산하면 실제로는 웬만한 모텔 숙박비와 맞먹을 것이다. 아이들 건강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그 예산으로 교실을 침실로 개조하는 게 더 나을 듯하다.
책상에 엎드려 자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아이들을 방치하면서 교사들이 느끼는 자괴감은 또 얼마나 큰가. 수십만 명의 고급 인력과 수백만 명의 청소년들이 서로의 시간을 죽이는 구조, 삶을 낭비하게 만드는 이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이 없지는 않지만, 정부 차원의 교육개혁은 실패를 거듭할 따름이다. 다행히 대안교육, 작은 학교 살리기 같이 부모와 교사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학교 모델 만들기가 성공을 거두면서 공교육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실상 민(民)이 주체가 된 대안교육이 감당할 수 있는 아이들의 수는 많지 않다. 부모들이 재정을 책임지는 구조에서는 중산층의 의식 있는 부모를 둔 아이들이 대다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일부 뜻있는 이들의 헌신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저소득층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현장들이 있지만 몇 군데 되지 않는다. 인가, 비인가 대안학교 전체 학생 수는 우리나라 총 학생 수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수백만 명의 아이들이 몸담고 있는 공교육이 바뀔 수 있도록 대안교육은 자극하고 영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해야 한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이미 그런 역할을 상당 부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혁신학교들이 대안학교 교육과정을 받아들이고 있고, 대안학교를 모델로 삼는 공립 대안학교들이 여기저기에서 생겨나고 있다.
간디학교, 이우학교 같은 특성화학교들이 중등학교의 개혁 모델이 되고 있다면 초등의 경우에는 남한산초등학교, 거산초등학교 같은 작은학교연대 소속의 선구적인 공립학교들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서울·경기권에서 생겨나고 있는 혁신학교 또한 학생과 부모 입장에서는 하나의 대안이 되고 있으므로 공립 대안학교의 한 범주로 볼 수 있다. 너무 서두르는 탓에 부실한 혁신학교의 양산을 우려하기도 하지만, 아직은 긍정적인 면이 더 크다고 본다.
혁신학교와 대안학교는 서로 자극을 주고받는 관계이지만, 한 지역 안에서는 경쟁 관계에 있기도 하다. 가까이 혁신학교가 들어서는 수도권(초등) 대안학교에서는 신입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부모 입장에서는 돈도 많이 들고 품도 드는 대안학교보다 괜찮은 공립학교가 더 나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대안학교의 궁극적인 존재 의미는 더 이상 대안학교를 찾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니 길고 넓게 보면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당장 학교 운영을 계속해야 하는 현장 입장에서는 난감한 노릇이다. 신입생이 줄어든다고 재학생을 소홀히 할 수 없고, 재정이나 교육과정에 차질이 계속되면 학교의 존속 문제까지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립 대안학교의 역할과 전망
2010년에 문을 연 경남의 태봉고등학교를 시작으로 공립 대안학교 설립 움직임이 활발하다. 전남, 전북, 인천에서는 시도교육청 차원에서 움직이면서 가속도가 붙고 있다. 교육부나 교육청의 시각은 학교 부적응이나 학교폭력 가해자 또는 피해자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보는 한계가 있지만, 현장 교사들의 시각은 좀더 열려 있다. 학교에서 잠자는 일반 학생들을 위한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공교육의 변화는 기대하기 힘들다.
미국의 경우 1970년대 들어서 공립 대안학교들이 곳곳에 생겨났다. 부적응 청소년들을 위한 대책이 아니라, 학교의 패러다임을 바꾼 획기적인 실험을 시도했다. 필라델피아 시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교육 현장으로 삼는 '파크웨이 프로그램', 뉴욕 시의 '시티애즈스쿨City As School' 같은 파격적인 모델들이 생겨났다. 시 교육위원, 교장, 교사가 바뀌고, 부모들이 바뀌면서 십 년도 못 가서 다들 일반 학교에 가깝게 변질되어 버렸지만, 그 실험은 다른 공립학교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쳐 지역사회와 학교의 벽이 낮아지고, 90년대 후반에는 메트스쿨 같은 개혁 모델도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사립 대안학교보다 공립 대안학교의 경우 정체성 유지가 더 힘들다. 교장과 교사의 전출이 잦고 감독관청의 영향을 많이 받기에 그럴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경우 대안학교에 대한 교육 당국의 시각이 중도탈락생을 위한 대안으로만 각인이 되어 있어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가 애초부터 어려운 상황이다. 1998년에 문을 연 경기 대명고등학교는 공립 대안학교의 효시인 셈인데, 뜻있는 교사들이 모였지만 교장 인선에서 대안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이른바 문제 청소년들이 가는 학교로 인식되면서 십 년이 지나도록 대안학교로서 정체성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립의 경우 교사들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최근 새로이 문을 여는 공립 대안학교들은 교장과 교사들이 뜻을 함께하고 교육청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바람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당국의 방침처럼 문제 청소년들만 모아 놓는 학교라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학교 같지 않은 학교, 소규모의 공동체 학교이거나 여행학교 같은 파격적인 모델에다 헌신적이고 유능한 교사들이 함께하지 않으면 학교에 질린 아이들을 감당하기 어렵다. 정부 차원에서 굳이 중도탈락생들만을 위한 대안학교를 만들고 싶다면 파격적인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구태의연한 학교 모델로는 십중팔구 실패할 것이다.
무작위로 받아들인 지역 아이들을 대상으로 성공적인 모델을 만들어낸 메트스쿨은 차트스쿨과 또 다른 방식의 공교육 개혁의 좋은 사례다. 미국의 상황이 한국 상황과 많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는 우리 실정에 맞는 모델을 만들어내야 한다. 선별적으로 받아들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안학교는 사실 공교육의 모델이 되기 어렵다. 어찌 보면 땅 짚고 헤엄치는 것과 비슷하다.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아이들이 어울려 함께 배우면서 성장하는 모델을 만들어내야 한다.
사립 대안학교가 여유 있는 이들이 사 먹는 생수 같은 것이라면 공립 대안학교는 생수 수준으로 정수한 수돗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염소 냄새도 좀 나고 물맛이 생수만 못할 수도 있지만, 생수도 대장균에 오염될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울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수돗물을 생수 수준으로 바꾸는 것이 정책의 기본 방향이 되어야 하지만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닌 만큼 대안적인 학교들을 통해 시범적으로 정수 작업을 해볼 필요가 있다. 좀 더 전향적인 당국의 자세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공교육의 대안 넓히기
최근 교과부에서 특성화학교들을 자율형 고등학교로 바꾸면서 학생 정원의 일정 수를 중도탈락 학생들로 하라는 방침을 시달했다가 심한 반대에 부딪히자 취소했다.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도 더 많이 필요하지만 공교육 안의 대안적인 학교가 그런 역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본다. 공교육 개혁의 전위 역할을 할 수 있게 당국은 배려해야 한다. 그 길이 공교육을 실질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길이다. 혁신학교보다 더 혁신적인 학교, 실험적인 학교들이 공교육 안에서도 시도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마지못해 다니고 있는 전문계 학교 중에 시범적으로 메트스쿨 같은 모델로 전환하는 작업도 시도해볼 만하다. 메트스쿨도 문 닫기 직전의 기술학교를 교육운동가 데니스와 엘리엇 두 사람이 나서서 획기적으로 바꾸어 낸 것이다.
지난해 민들레에서 제안한 단기 대안학교(틈새학교)도 공교육 개혁을 위해 시도해볼 만하다. 교육법상의 새로운 학교를 만들어내기가 어렵다면 민간 위탁 형식으로, 현재의 위탁형 대안학교 제도를 활용해도 된다. 지금은 중도탈락생을 위한 현장으로 간주되고 있어 한계가 있는데, 그 틀을 벗어나 보통 아이들을 위한 획기적인 위탁형 모델을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위탁형 대안학교 제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볼 것을 제안한다. 상상력을 발휘하면 공교육의 보완책이자 진정한 혁신의 숨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골의 공립학교의 경우 산촌유학과 연계하는 것도 해볼 만한 작업이다. 임실 대리초등학교에서 시도했듯이 뜻있는 교사와 교장이 마을 사람들과 힘을 모으면 훌륭한 교육 현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산촌유학은 농촌 살리기와 맞물려 전북, 경북 같은 지자체에서도 관심을 많이 보이고 있고, 농림부도 예산을 지원한다. 민간이 주도하고 교과부와 농림부, 산림청, 지자체 등이 협력하여 좋은 교육환경을 만들어내면 지역도 살리고 교육도 살리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관련 기사 : <민들레> 80호 "'딴 맘' 먹은 교사들, 시골에서 일 냈다", "너흰 미국 유학 가니, 우린 농촌으로 유학간다")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결국 공교육을 살리는 주체는 교사들이 될 수밖에 없다. 작은학교연대 소속의 공립학교들과 몇몇 혁신학교들이 보여주는 교사들의 역량은 공교육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증명한다. 전교조 소속이든 교총 소속이든 아이들을 위하는 교사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갖고 그들과 함께 공교육 개혁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 아이들을 염려하기 전에 좌절감에 빠져 있는 교사들을 먼저 염려할 일이다. 교사들의 내면에서 사그라지고 있는 열정을 살려야 한다. 교사들을 춤추게 하라! 그러면 아이들도 춤추게 될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춤추면서 배움과 성장의 길을 걸어가는 교사들이 늘어나는 만큼 공교육 현장이 살아날 것이다.
* 위의 글은 <민들레>83호 특집 "空교육의 대안은 公교육"에 실린 글입니다.(☞ <민들레>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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