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반공 정신병동 사회를 무너뜨린 6월항쟁
1987년 6월항쟁의 결과 쟁취된 직선제 개헌으로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해방 이후 최초로 인민들의 직접선거로 민주정부가 들어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양 김씨의 분열, 여기에 부화뇌동한 민주화운동 세력의 분열로 군사독재정권을 이어받은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민주주의 혁명 이후의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비틀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 양 김씨는 차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참여민주주의를 내건 노무현 정권이 들어섰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권력에 참여해서 실제로 국가의 운전대를 잡아 권력을 행사한 민주정부만 15년이 되어간다. 그렇다면 과연 민주화 20년, 민주정부 15년 동안 한국사회는 어떻게 변했을까. 민주화 20년, 민주정부 15년의 성적표에는 도대체 뭐라고 적혀 있을까.
물론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민주화의 성과는 속된 말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으며, 이것이 민주화 20년의 성적표 가운데 유일하게 '수'나 '우'로 적힐 수 있는 과목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이를 지적하는 사람조차 없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1987년 이전 한국 사회는 우선 무엇보다도 인민, 동무, 혁명 등등의 말만 사용해도 곧바로 중정(안기부, 국정원)으로 끌려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 감옥으로 직행해야 하는, 그야말로 극단의 반공 정신병동 사회였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 자유롭게 모임을 만들고 모일 수 있는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없는 극단의 군사독재 사회였다. 순수시를 쓴다는 작자들이 광주 시민을 학살하고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을 두고 용비어천가를 쓰는 게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친일과 친미와 매판과 굴종과 아부와 부패와 부정이 오히려 정상이었던 식민지 사회였다.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쥐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서정주가 1987년 1월에 발표한 전두환 생일 축하시
민주화 20년, 사막화 20년
그런데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말해지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과연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사람답게 살아가는 바람직한 사회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오히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고 심지어는 민주화를 원망하고 있는, 불안과 불만의 사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지칭되는 빈곤자살자가 날마다 3명 이상이나 된다. 순전히 가난 때문에 자식을 아파트 밖으로 내던지고 자신도 몸을 던지거나 극단의 경우에는 분신이라는 끔찍한 일까지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IMF가 터진 1997년 자살자 수는 6000명이었다. 그런데 2006년 자살자 수는 두 배나 많은 1만 3000여 명의 자살자를 양산하는 세계 1위의 자살공화국이 되어버렸다.
지난 10년 사이에 빈곤층은 11%대에서 20%대로 2배로 늘어났다. 비정규직은 전체의 절반을 넘어섰고, 청년실업자는 100만이 넘으며, 취업을 했다 하더라도 취업자의 70%가 월소득이 200만 원 이하이다. 300만 명이 넘는 신용불량자 수, 100만에 이르는 단전단수 가구 수, 최대 600만~700만 명으로 추산하는 빈곤계층 등등 우리 사회가 얼마만큼 극단으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지표는 너무나 많다. 20대 80의 사회가 아니라 IMF 이후 한국사회는 극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온국민이 빈곤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불안정한 계급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민주화운동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개발독재, 불평등한 저임금과 저곡가 체제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노동자 농민 등 생산대중의 땀의 결과를 공평하게 나누는 평등을 주요한 목표로 내걸었다. 그런데 이른바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오히려 노동자들은 저임금의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고,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더 빚더미에 가위눌리는 역설의 현실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과 살벌한 투쟁이 당연시되는 괴이한 사회로 변질되고 말았다.
민주화운동은 억압 착취의 사회구조를 혁파하고 인간의 소외현상,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수단으로서 이용하고 적대 경쟁하는 살벌한 인간관계를 근본에서부터 변혁하고자 한 운동이었다. 또한 농업의 자립 기반 위에 자립경제, 민족경제의 새로운 모델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런데 민주화 20년의 결과는 농업공동체의 완벽에 가까운 해체, 인간관계의 완벽에 가까운 사막화, 억압 착취 구조의 완벽에 가까운 보장, 거기다 이른바 참여정부와 노무현의 한미 FTA 체결에 이르면 완벽에 가까운 미국식 신자유주의 체제 확립까지 그야말로 한국 사회를 극단의 사막 사회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학교는 영어로 공부하고 영어제국주의 정신이 골수에 박힌 누런 피부 흰 가면의 노예들을 양산하는, 오로지 돈과 물질만이 만능인 자본주의 노예학교로 변질되어 버린 지 오래이다. 거기다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젊은이들을 열등한 비정규직의 천민으로 탈락시키는 경쟁 제일주의의 제도로 굳어져 버렸다. 노무현이란 최초의 미국산 광우병 환자로 추정되는 대통령 말처럼 이런 무한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이 사회의 구성원 대접도 못받는다.
이른바 민주정부는 개발독재의 토건국가 모델을 답습했을 뿐만 아니라 참여정부 들어서는 균형발전이란 이름 아래 더욱더 온 국토를 투기장화, 개발과 투기의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의 땅과 자연은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정부의 개발 투기정책과 산업화 정책을 단 한 번의 성찰과 반성없이 되풀이 확대재생산한 이른바 민주정부의 괴물같은 개발과 성장지속 정책 아래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그런 땅덩어리를 놓고 또 국민의 상위 1%가 국토의 40%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10%의 국민들이 74%의 땅을 가지고 투기놀음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양극화와 불평등, 건설족만을 살찌우는 부동산 거품과 투기를 바로잡아야 할 국가의 투명도(부정부패) 지수는 50위 정도에 불과하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우리나라의 환경지속가능성 지수(sustainablity index)는 세계 122위에서 136위로 최하위권이다. 서울의 대기오염도는 세계 1위권이며, 농약과 화학비료로 인한 농업오염도도 1위권이다. 게다가 식량자급률은 20%대로 최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미국의 부시조차 농업을 자립하지 못하고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는 국가는 상상할 수 없으며 국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농업을 지원해야 한다고 소리높이 외치는 판에 이른바 민주정부 권력자들과 독재정권에 대를 이어 여전히 민주정부 아래서도 정책을 좌지우지 하는 관료들은 식량이 없으면 휴대폰 팔아 식량을 사먹으면 된다고 강변한다. 프랑스혁명 당시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과 어쩌면 그렇게 비슷한 사고 구조인지 모르겠다.
한국 민주화운동은 미국의 식민지와도 같은 남한의 정치경제 현실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는 반미세력이었다. 그런데 그런 반미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외의 대안이 무엇이냐며 미국식 제도와 사상이라면 똥이라도 집어먹을 듯한 현실론으로 무장하고 한국 경제와 정치를 팔아먹고 있다. IMF 사태를 일으킨 김영삼 문민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IMF 사태를 계기로 한국의 경제를 헐값에 바겐세일로 미국에 팔아먹은 김대중 국민의 정부에 이어 노무현의 참여정부에 이르러는 한국의 국가와 사회를 아예 해체해버리는 한미FTA를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밀어붙이고 있다. 바로 눈 앞에 다가오고 있는 오일피크(Oil Peak)와 끔찍한 식량위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런 인식조차 없다.
한마디로 오늘날 한국 사회는 사람이 살 만한 공동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살벌한 사막사회가 되고 말았다. 아마도 이 모든 원인이 아직도 미국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도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누구에게도 물어도, 진보건 보수건, 여건 야건 정치성향이나 자신이 처한 계급 계층을 떠나 그 주장의 방향이나 내용을 다르다 할지라도 이구동성으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역대 민주정부에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소리높여 외친다. 군사독재정권을 국민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들어선 민주정부의 무능력과 무력함은 지금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한심한 정도를 넘어서 국가를 파탄으로 몰고 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지경이 되었다.
이제 민주화운동은 어느 학자의 표현대로 자랑과 영광이 아니라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미래가 없는, 아니 미래를 전혀 준비하지 않는 타이타닉 침몰 5분 전의 사회, 삼풍백화점 5분 전의 풍요를 구가하는 베짱이 사회임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반세기에 걸친 민주화운동의 눈부신 성과는 신기루처럼 간데없이 사라진 폐허 위에서 말이다.
그렇다. 민주화 20년은 민주주의의 주춧돌인 인민들의 삶을 모래로 만들어버리는 붕괴와 폐허만들기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 민주화운동에 대한 반동으로 성장을 소리높여 외치며 들어서는 이른바 차기 정부는 아마도 한국사회를 완벽하게 사막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사회전환운동의 시작: 새로운 적녹연대
한국의 압축 산업화와 압축 민주화를 칭송하고 심지어 이를 모방하는 경향까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단기간에 세계 12위의 산업대국으로 성장하고 단기간에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에 성공한 그 저력이 무엇일까를 놓고 여러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조만간 이는 공허한 한때의 논의로 역사의 모래더미 위로 묻혀버릴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한국의 경제성장은 그 배후에 그야말로 값싼 석유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국의 산업화란 석유를 비롯한 지구자원을 단기간에 무제한으로 값싸게 착취한 결과물이었다. 물론
노동력을 값싸게 착취할 수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그런 값싼 석유, 값싼 자원의 시대는 지나갔다. 석유생산은 곧 정점에 도달하고 고갈되어 갈 것이다. 다른 천연자원도 마찬가지이다. 개발독재 시대부터 이어져 온 한국의 에너지 자원 고소비 산업구조는 지금 재기획되지 않으면 반드시 붕괴하고 만다.
무엇보다고 석유고갈과 함께 가장 우려되는 사태가 세계 식량위기이다. 오늘날의 식량은 씨앗에서부터 땅갈기, 비료, 농약, 수확, 운송, 보관에 이르기까지 석유가 투입되지 않으면 생산이 불가능하며 실제 식량의 90%가 석유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석유가 한 방울도 나지 않으면서도 산업의 석유의존도가 매우 높은 세계 8위의 석유소비 대국이다. 2006년 석유수입액은 855.7억불로 반도체와 자동차 수출액을 합한 702.8억불보다도 많다.
자본주의 산업문명은 길게 보면 전혀 지속불가능하다. 오일피크보다도 더 주요한 문제는 기후변화이다. 화석연료의 무분별한 착취와 낭비가 나은 자업자득의 결과이자 그 어떤 과학기술로도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바로 지구온난화와 이에서 비롯된 기후변화이다. 기후변화는 식량생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금으로서는 예측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산업문명은 분명 그 옛날 나무라는 에너지를 마구 낭비함으로써 붕괴될 수밖에 없었던 수메르문명이나 앙코르와트 문명처럼 자살문명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붕괴와 끔찍한 식량위기를 예견하고 이에 대한 대비와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지속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기획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에너지 고소비의 산업구조는 조만간 근본에서부터 재편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으며 아예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선 당장 이산화탄소 저감 압력이 현실로서 불어닥칠 것이다. 자동차, 철강, 조선, 반도체 등을 중심으로 한 현재 한국의 산업구조는 철저한 재편을 강요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의 국가 관료들과 주식회사의 단기 성과주의는 이런 시각 자체와 미래에 대한 준비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때문에 이런 전환의 기획은 밑에서부터 시민사회운동을 통한 사회운동이 맡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민주주의와 함께 인간 삶의 생존과 사회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생태적 전환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민주화 20년, 이른바 민주정부 15년을 허송세월하면서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은 것을 분노하면서 지적해보았자 이제는 소용이 없는 일이다. 이제는 풀뿌리 인민 속으로 들어가 생태적 전환을 실천에 옮기는 시민사회운동의 능력이 문제이다.
한국의 환경생태운동은 처음부터 노동운동을 환경생태운동과 함께 하는 동맹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공해의 일차 피해자는 공해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한국공해문제연구소가 발표한 1987년 공해선언을 보자.
"공해문제의 피해를 가장 심각하게 온몸으로 받고 있는 계층은 생산현장의 노동자들이다. 국력의 원동력이요 역사발전의 견인차인 이 땅의 노동자들의 실체는 한마디로 공해 속에 시들어가는 직업병 환자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공해공장과 핵발전소의 공해는 그곳에서 작업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산업재해 직업병이니 하는 것은 이윤추구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이 땅의 비인간적 자본주의 기업의 바로 그 본질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산업재해를 추방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 나가야 할 것이다... "
- 한국공해문제연구소, 「87 반공해선언」, 1987. 6. 5.
그러나 민주화운동의 초록 전통을 이어받음직한 6월항쟁 이후의 한국 민중운동,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은 이웃사촌인 환경생태운동과의 결합이란 기획 자체를 할 능력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1991년 대구 페놀사건이나 수많은 핵발전소 폐기운동, 새만금 경우처럼 노동운동은 오히려 자신의 직업이익을 앞세워 침묵하거나 환경생태운동을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특히 노동운동은 1987년 이후 대중화, 제도화되자마자 급속하게 기업별 노조라는 우물 안에 빠져 임금인상과 단체협약 투쟁만 되풀이하는 이른바 자판기 노조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사실 기업별 노조는 노동조합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기업별 노조는 기업조직, 회사조직으로서 노동자의 정체성을 노동자 의식이라는 사회의식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게 하는 달콤한 독약이다. 노동자들을 철저히 종업원 의식, 회사원 의식에 가두어 두고자 하는 감옥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이후 한국 노동조합의 성장은 그렇기 때문에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으며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력과 인간다운 삶에 대한 절절한 염원은 그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한국 노동운동은 그야말로 기업별 노조 시대를 마감하고 산별시대를 열어제껴 나가고 있다. 한국노동운동 역사를 새롭게 쓰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산별노조의 전혀 다른 차원과 경험은 이미 전교조와 보건의료노조와 발전노조가 그 사례를 제공하고 있다. 산별시대가 개막되는 지금, 노동운동은 어떻게 보면 새로운 이념을 만들면서 새로운 노동운동으로 재구조화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오일피크와 관련해서 불가피한 산업구조의 재편성을 노동운동과 환경생태운동이 연대해서 준비할 수만 있다면 이는 아마도 한국사회를 새롭게 전환시키는 사회운동 연대 전략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발전노조와 환경생태운동 단체들이 연대한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는 이런 관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획기적인 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시민사회운동은 경제성장의 지속인가 경제성장의 폐기인가라는 점에서 환경생태운동과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에 서있다. 물론 이 경계는 대단히 애매모호하다. 그러나 지속가능성이란 말을 쓰건 안쓰건 경제성장을 인정하는 순간 그것은 타협이라기보다 기후변화와 피크오일에 눈감는 범죄행위라고까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은 "민주노동당은 인간의 물질적 부를 위해 생태계를 파괴하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하며, 인간이 자연 그대로의 환경을 유지하면서 생태계와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추구한다"고 명시하고는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또한 동시에 사회주의 경제성장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범죄행위에 동참하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산업문명,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항한 대안을 현실에서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데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대안은 그 시작이 농업에서부터 비롯될 수밖에 없다. 다가오는 자원고갈 사태에 대비하여 석유농업을 탈피한 지역자립과 자치의 유기농 생태농업을 기초로 식량자급 사회, 에너지 자립과 자치 사회가 주춧돌이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임노동 관계가 아니라 평등과 협력의 인간관계, 이윤극대화의 주식회사가 아니라 사회책임의 협동조합, 지배와 착취의 사회가 아니라 자립과 자치의 공동체, 자원착취와 낭비 문명이 아니라 자원절약과 생태계 보호의 문명 등등 우리가 전환을 기획하면서 논의할 수 있는 대안은 이미 상식의 차원에서도 충분히 제시되어 있다. 우리는 어느새 스스로의 힘으로 사고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기획도 못하는 산업문명의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음을 겸허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과 이른바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전문가주의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전혀 다른 신천지가 보이는 데도 말이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민주화운동과 시민사회운동, 이른바 1990년대 들어 멈추어버린 진보운동의 녹색화를 다시 제기해야 한다. 이제 사실상 진보라는 개념 자체를 폐기해야 함을 이른바 진보운동과 민중운동은 직시해야 한다. 사회정의와 평등의 적색은 사회주의에 그 정통성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의 무지개빛 가운데 있는 적색에 적통이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한국의 초록과 적색은 서로 결합해 새로운 울창한 숲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민중운동과 함께 하는 녹색운동의 전략을 기획해야 한다. 새로운 생태적 전환을 이루기 위한 사회전환운동의 맨 첫단추는 초록의 무수한 이파리들이 낙엽으로 떨어진 적색의 비옥한 토양 위에서 새로운 적색의 씨앗을 싹튀우는 일이다. 동시에 여기저기 흩어진 초록 또한 새로운 덩굴손으로 서로서로 감싸안으면서 광범위한 숲으로 변하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계간지 <환경과 생명> 여름호에 실린 것을 필자가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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