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힐 차관보는 이날 오후 서울 외교통상부 청사에서 열린 한미 6자회담 수석대표 공동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말하고 "(폐쇄 후 단계인) 핵시설 불능화도 지킬 준비가 됐다고 밝혔다"고 말했다.
힐 차관보는 이어 "북한 핵시설을 어떻게 불능화할 것인지에 대한 상세한 사항은 앞으로 논의해야 한다"며 "이번 (북미) 회의에서는 그에 대한 일부 사항을 논의했다"고 말했다.
이는 북한이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자금 송금 지연으로 미뤄졌던 2.13합의 초기조치에 대한 이행 의지가 있음을 확인한 것으로 향후 2.13합의 이행이 본격화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힐 차관보는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도 "북한과 미국은 2.13합의를 완전히, 잘 이행하겠다는 양자의 의지를 재확인했다"고 거듭 강조했다.
북한은 종전에도 BDA 문제가 풀리기만 하면 핵폐쇄 등 초기조치에 착수할 것임을 공언해 왔다. 하지만 힐 차관보를 평양에 직접 초청해 이같은 의지를 재확인한 것은 기존의 공언과는 무게가 다르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북한 우라늄 장비 구매설에 대해서는 답변 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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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합의에서는 북한이 핵시설을 폐쇄 및 봉인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검증이 완료되면 그에 대한 상응조치로 일본을 제외한 6자회담 참가 4개국이 중유 5만톤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어 2단계에서 핵시설을 불능화(disablement)할 경우 중유 95만톤을 추가로 제공하고 미국과의 관계정상화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힐 차관보는 21일 오후 군용기편으로 경기도 오산기지를 출발해 평양에 도착한 후 20여 시간 만인 22일 오전 돌아왔다. 그는 평양에서 6자회담 북한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회담했고, 박의춘 외무상을 예방했다. 그러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나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만나지 못했다.
2.13합의에서는 북한이 핵시설을 폐쇄하는 1단계(초기단계)에 북한이 향후 신고할 핵 프로그램 목록을 논의하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2002년 10월 2차 북핵위기의 발발 원인이었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의 존재 여부에 대해 북한과 미국의 시각차가 좁혀지지 않아 핵 프로그램 목록 협의가 난관에 부딪힐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힐 차관보는 이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 내용을 밝히고 싶지 않다"면서도 "단지 모든 핵 프로그램과 관련해 포괄적인 리스트를 만들자는 논의를 했다. 내가 말한 '모든 것'의 의미는 '모든 것'이다"라며 HEU 문제를 논의했음을 시사했다.
또한 미국이 북한의 우라늄 농축 시설을 구매하려 한다는 <뉴욕타임스>의 21일자 보도에 대해 힐 차관보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겠다"고 피해갔다.
"北 납치문제 해결 의지 확인돼 고무"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및 북-일 관계정상화에서 돌파해야 할 또 하나의 쟁점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다. 일본은 납치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관계정상화를 추진할 수 없을 뿐더러, 2.13합의에 따른 대북 에너지 지원에도 동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해 힐 차관보는 "(이번 방문에서) 각국의 양자관계 증진 필요성에 대해 논의했고 특히 북일관계 증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며 납치문제를 제기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일본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납치문제에 대해 북한도 해결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확인하게 되어 고무됐다"며 "그것은 일본의 관심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관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북한이 힐 차관보에게 납치문제에 관해 어떤 해결 의지를 보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방북시 북한이 납치 사실을 시인한 후 양국관계가 오히려 더 악화됐고, 납치 피해자를 본국으로 보내는 등 납치문제가 이미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북한이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와 관련해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지난 4월 미일정상회담에서 '납치 해결을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의 전제조건으로 해 달라'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요청에 대해 "미국인이 직접 피해를 본 게 아니므로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라이스 쇼크'로 불리는 이 발언은 과거처럼 미국이 납치문제에서 일본과 마냥 보조를 취하지는 않을 것임을 시사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번 평양 북미회담에서 미국은 북일 양국이 이 문제에 대해 양보할 수 있는 길을 북측과 숙의한 것으로 보인다.
천영우 "중유 지원 일본 동참 믿는다"
한편 6자회담 한국 수석대표인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대북 중유 지원 비용 분담에 대해 "원칙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대로 분담될 것"이라며 "경제 및 에너지 지원 의무가 안 돼서 2.13합의의 이행이 안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이 중유 제공에 불참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천 본부장은 "중유 제공 완료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완료되기 전에는 일본도 균등과 형평에 따라 지원한다는 원칙에 동참할 것으로 믿고 있다"고 우회적으로 일본을 압박했다.
힐 차관보는 이번 방북이 김계관 부상의 초청과 라이스 장관의 임무 부여에 따라 이뤄진 것임을 강조하며,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친서나 구두메시지를 전달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북한이 북미 관계정상화를 위해 미 행정부의 고위 관계자를 특별히 초청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관심을 모았던 북미 외교장관 회의에 대해서는 "(핵 폐쇄 후) 6자 외무장관 회의가 열리면 라이스 장관과 박의춘 외무상이 만날 것"이라고 말해 라이스 장관의 방북이나 별도의 회담은 추진되지 않고 있음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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