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응수씨는 1942년 충북 청원 출생으로 1960년 우리 나라 대목장의 계보를 잇는 이광규 선생의 문하생이 돼 봉원사 요사와 종각 공사를 하며 본격적으로 고건축 일을 배웠습니다. 1962년 숭례문 중수 공사 때는 도편수 조원재 선생을 만나 두 스승의 가르침 아래.. 1970년 불국사 복원공사에서 부편수를 맡았습니다. 1975년 수원성곽 장안문과 창용문 복원 공사를 진두지휘하는 도편수가 됐고 경주 안압지와 청와대 상춘재, 창덕궁과 하동 쌍계사 대웅전 등의 보수 공사를 도맡아 했습니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경복궁 복원 공사에 참여하고 있으며 같은해 인간문화재 대목장으로 지정됐고 만해예술상과 옥관문화훈장 등을 받았습니다.
박인규 : 제가 소개를 해드렸는데, 대목장, 도편수 이런 말들 사실 일반인들은 좀 모를 것 같아요. 대목장과 도편수.. 한옥 건축일을 하시는 분이란 생각은 드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죠.
신응수 : 목수를, 집을 지을 적에 소목과 대목으로 나누죠. 나무를 가지고 하는 사람을, 큰 나무를 다루는 사람이 대목인데, 지정하면서 대목의 장이다.
박인규 : 대목은 집을 짓는 거라면 소목은 가구를...
신응수 : 문이나 가구를 짜든지. 보통 일반인들 알아듣기는 도목수 그랬죠. 궁궐이나 큰 집을 지을 때는 도편수라고 해서 집을 지을 때 각 분야의 우두머리를 편수라고 해요. 보통 궁궐을 지으면 12편수가 들어가는데 그 중 우두머리를 도편수, 대목이라고 하죠.
박인규 : 부편수는 도편수 바로 밑에 있고. 그 뒤에 태편수가 계시고. 근에 신응수 선생께서 부천에 한국전통건축박물관을 짓겠다고 해서 상당히 관심들이 많은데 전통건축박물관이 국내에 그동안 없었나요?
신응수 : 없었죠. 지금 한 군데 예산에 전흥수씨가 건축박물관을 하나 지었어요. 오래 전에 해놓고 있는데 상당히 대단한 일을 했죠. 그렇지만 저 역시도 좀 더 나은, 모든 장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계획을 한 7년 전부터 해내려왔어요.
박인규 : 어떤 언론보도를 명색이 전통건축도편수인데 사시는 데가 아파트이셔서 약간 그런 것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전통건축박물관을 만들기로 작심하신 특별한 이유는 어떤 겁니까?
신응수 : 집도 그전부터 계획을, 꿈은 오래 전부터 꿨죠. 바쁘다 보니 실천을 못하고. 그래서 지금은 나이도 있어서 빨리 실천해야겠다 싶어서 한 7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그래서 강릉 쪽에다가, 강릉 하면 대관령에서 울진까지 소나무가 참 좋죠. 소나무가 궁궐 건축에 다 갖다 썼고 이번에 91년부터 지금까지도 그쪽에서 영동소나무가 와서 복원하고 있어요. 그 소나무 있는데다가 전통박물관을 한 번 하고 싶었는데, 지주들하고 여러 가지 잘 안 돼서 부지매입에서 여러 가지 안 돼서 부천에 협의를 했어요.
박인규 : 부천 같은 경우는 부천시에서 만 평인가를 내주기로 했다고 보도가 나와 있던데요?
신응수 : 그 전부터 부천시에서 내주려고 했는데 그냥 주는 건 제가 좀 마다했죠. 왜냐 하면 법적으로그렇게 되면 한 30년 후에는 시로 귀속돼야 되더라구요.
박인규 : 이른바 기부체납이라는 걸 해야 되는 군요.
신응수 : 네. 그래서 저는 좀 싼 땅을 갖다가 해서 땅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집이라도 한 채 제대로 지은 집을 보여주고 남겨줘야 하기 때문에 제가 매입해서, 그것을 후대 장인들에게 넘겨주고 가려고, 그래서 끝까지 장인들 손에서 전수되게끔 계획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지금 부지를 확보해 놓으신 상태인데 앞으로 언제까지 어떤 계획으로 만 평의 박물관을 만드실지 청사진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신응수 : 이틀 전에도 제가 설계사무소 등 관계된 사람들과 터를 보러 갔어요. 설계를 들어가기 위해서 가서 시청 분들과 만나서 저도 급해서 빨리 해야 된다고 했더니, 이것이 지금 그린벨트인데 용도변경을 하는 데서 건설부까지 갔다가 내려와야 된대요. 허락을 받는 데, 이틀 전에 들었는데 1년이 걸린다고 하더라구요. 참 답답한데... 박물관 부지로 변경하는 데에 1년이 걸린다니까 까마득한 생각이 들더라구요. 서둘러 달라고 부탁하고 있죠.
박인규 : 원래 계획은 12년까지 완공한다고 들었는데요
신응수 : 저도 협약서를 맺으면서 올 가을에는 시작될 줄 알았죠.
박인규 : 그런 식으로 나가면 상당히 오래 걸릴 수도 있겠네요.
신응수 : 그렇죠. 그렇게 되면.. 큰일 났어요.
박인규 : 정부에서 좀 특별케이스로 봐줬으면 좋겠는데...
일단 그게 된다고 치면 전통건축이 절도 있고 궁궐도 있고 민가도 있는데 어떤 식으로 꾸미실 예정이십니까?
신응수 : 전통건축이라면 건축에 대한 보는 것, 밖에서... 집을 한 채 지어도 정말로 우리 양식에 맞게 지어야죠. 그래서 민가나 궁궐, 사찰 밖에도 재현하지만 내부도 나눠서 민가건축이나 사찰건축, 궁궐건축이라든지 이 자재를 자료를 실제로 볼 수 있게끔 다 진열하고 그런 모형도 만들어서 놓고. 실제 모든 건축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장인뿐 아니라 거게 종사자들은 모든 것을 공부할 수 있게 설치하려고 해요.
박인규 : 신응수씨께서 사실 집도 만든다고 들었습니다.
신응수 : 그 전부터 박물관을 하면 아예 그쪽에다 짓는다고 한 걸 자꾸 미룬 것이 지금까지 와서 아파트에 살고 있죠.
박인규 : 말씀 들어보니 만 평에 건축물을 세우려면 상당히 재정적으로도 클 것 같은데 혼자 힘으로 가능할까요?
신응수 : 힘들죠. 물론 시와 정부에서 지원을 받아야지요.
박인규 : 박물관 건립에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시는 분들은 있으십니까?
신응수 : 몇 분 도와주겠다는데 아직은, 본격적으로 시작이 돼야 같이 협력을 하겠죠.
박인규 : 잘 되시길 빌구요, 신응수 선생님은 60년부터 한옥건축일을 하셔서 지금 거의 50년 가까이 해오셨는데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중요하다는 건축물들은 거의 다 복원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자랑스럽다고 할 만한 게 있으면 소개해 주시죠.
신응수 : 제가 제일 처음 도편수로 일한 것이 수원 장안문이죠. 4대문 중에서 서울은 남대문과 동대문... 흥인지문과 숭례문, 수원에 가면 장안문과 팔달문이 있는데 그 중 한 부분인 장안문을 제가 도편수로 처음 복원했어요. 저로서는 대단한 영광이었고 열심히 했고
박인규 : 복원이라는 건 아예 없었던 걸 새로 만든 겁니까? 복원을 할 경우, 말하자면 아예 없었던 걸 만들려면 기록이 있어야 할 텐데 어떻게 가능한 거죠?
신응수 : 복원이 상당히 힘들죠. 복원이라는 말 자체가 어렵죠. 옛날 것을 그대로 재현해야 되는데 실제로 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선적으로 자료를 옛날 것을 많이 수집해야죠. 사진이나 기록이 있다든지 궁궐지 같은 데서 자료를 찾고 그러면서 우선, 집이 없어진 거니까 발굴을 해서 옛날 터를 다 찾아내서 고증이 될 수 있는 건 전부 자료를 종합해서 최대한 옛 건물에 가깝게 지어야죠. 만약에 잘못 지었다가 후대에 사진이라도 발견됐을 때는 이것은 똑바로 된 복원이 아니죠.
박인규 : 복원작업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역시 원래 모습이 뭐였느냐를 찾아내는 게 어렵겠군요.
신응수 : 제일 어렵죠. 두렵죠. 복원을 하면서도, 자료가 있으면 마음이 놓이는데
박인규 : 그럼 새로 복원하시면 그런 기록을 남겨 놓으시겠군요.
신응수 : 그렇죠. 다 남겨놓죠.
박인규 : 아까 말씀하실 때 강릉에 박물관을 만들고 싶었다. 거기 소나무가 많아서.. 라고 하셨는데 우리나라 건축물은 거의 다 소나무를 쓰는 모양이죠?
신응수 : 사찰, 관아, 민가 같은 데 그 지역에 가면 그 지방에 있는 나무를 잘라 썼죠. 나무가 멀리서 오기는 어려우니까. 그러다 보니 참나무도 대들보로 쓰는 데도 있고 느티나무도 기둥으로 쓰고 대들보로 쓰기도 하고. 민가 같은 데는 미루나무도 쓰고 있지만 실제 궁궐에선 거의 우리나라 소나무로 지었어요. 웬만한 건물은 전부 소나무로 발견됐는데 이번에 근정전을 해체해 보니까 근정전에서는 전나무가 일부 큰 나무에서 발견됐지만 다른 수종은 일체 발견되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소나무가 참 좋은 거고..
박인규 : 소나무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좋은 나무라고 알고는 있지만 그걸 쓰는 건 나름대로 장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왜 그런 거죠?
신응수 : 소나무로 일을 안 해본 대목들은 몰라요. 그렇지만 대목이라면 우선 소나무의 우수성을 알죠. 우선 나무가 건축에는 너무 강해도 안 돼요. 적당히 강하면서 뒤틀림이 있어서 벌어지지도 않고. 아주 나무가 트지도 않는 건 나무 자체가 무르다는 겁니다. 열대지방 나무는 트지 않아요. 많이 트지도 않고 적당히 트는 것. 약간은 갈라지는 거죠. 성격이 있는 거죠. 그래서 세포와 나이테가 촘촘하면서, 이것이 또 소나무 중에 적송 같이 나이테가 붉은 것은 아주 상질의 나무거든요. 중국이나 일본 가서 지어 놓은 고건축을 보면 밖을 천으로 쌌어요. 칠을 했죠. 나무가 약해서 그래요. 그렇지만 우리 건축에선 궁궐 지으면 자연 그대로 놔 두죠. 터 있지만 그래도 천 년을 간다는 건 얼마나 소나무가 우수한가 증명이 되는 거죠. 우리나라에 5, 600년씩 간 건축물이 남아 있으니까 그 나무를 시험해 봐도 그 이상 간다고 증명이 되니까 소나무가 우수하죠.
박인규 : 그런데 91년도부터 경복궁 복원작업을 해오셨는데 제가 듣기로는 서까래인가요 큰 나무가 없어서 캐나다에서 적송을 수입해 왔다고 들었어요.
신응수 : 귀주 네 개가.. 기둥을 처음 보수할 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기와를 다 내리고 보니까 뒤쪽의 지붕 속에서 네 군데가 거의 파손됐어요. 하나는 그 직전까지 갔고, 그래서 그 네 본을 교체하는데 현재 우리나라에 그런 나무를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했어요.
박인규 : 높이가 18미터라고 들었는데요
신응수 : 네. 상당히 크고, 한 50자씩 되니까, 그런데 지금 그런 나무를 많이 썼다는 것이 건물로써 증명되거든요. 그것이 중간에 이어서 쓰면 쉬운데 하나로 올라가기 때문에 근정전에 가면 긴 기둥이 있는데 그게 한 나무거든요. 그래서 못 구해서 할 수 없이 홍송을 들여다가, 그 나무를 검사를 해보니까 나이테도 촘촘하고 아쉽죠.
박인규 : 18미터까지 크려면 몇 백 년은 커야 되는 건가요?
신응수 : 그렇죠.
박인규 : 아쉬운 마음이 드네요. 요즘 웰빙 바람이 불면서 좀 여유있으신 분들은 직접 한옥을 짓기도 하고 고건축을 사서 짓기도 하던데, 신 선생님 보시기에 한옥이 사람 살기에 어떤 점에서 좋은 겁니까?
신응수 : 지금 전해지는 것이 자꾸 한옥은 살기가 불편하다. 또 집값이 많이 들어간다, 건축비가 많이 들어간다. 사실 건축비를 간단한 걸 말하더라도 한옥은 기둥 중심에서 중심의 평수를 따지기 때문에 실제 기둥 중심 밖으로 나가는 건축의 공사비가 많이 들거든요. 그래서 건축비가 많이 드는 거지, 실제 아파트는 쓰지 않는 공간이 많죠. 50평이면 실제 쓰는 건 40평 밖에 안 되는데 그러다 보니 비교를 그렇게 해서는 안 되거든요.
박인규 : 기둥 바깥이라는 건 무슨 의미로 말씀하시는 거죠?
신응수 : 한국건축에서는 30평을 산다고 하면 기둥이 서 있으면, 기둥 중심에서 중심까지 그 안의 사이즈를 갖다가 30평이고. 실제로 바깥까지 나가면 배는 되거든요. 그래서 공사비가 많이 드는 거고, 살기가 불편하다는 건 꼭 옛날 전통방식으로 하는 것보다 시대에 맞게 간편하게 할 수 있는, 내부에서는 화장실, 주방이라든지... 물론 한옥을 느끼려면 구들 놓고 하는 방도 있어야겠지만 침대 놓고 살면 되니까 절대 살기 불편하다는 소리는 안 했으면 좋겠고. 앞으로 아마 한옥이 상당히 많이 선호될 것 같아요.
박인규 : 지금까지는 주로 한옥에 대해 비싸다든가 살기 불편하다든가 그런 것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적극적으로 살아보면 이런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것이 있을 것 같아요.
신응수 : 저도 지금 한옥에서 못 살고 시멘트로 만든 아파트에서 사는데, 사실 시멘트 공기 맡고 사는 게 상당히 안 좋은 거거든요. 그렇지만 나무라는 건 전부 창호지에서 통풍이 되고 나무 자체나 흙이나 벽, 이런 데서 전부 통풍이 되고 온도조절을 자연으로서 밖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게 한옥의 특징이거든요. 그래서 건강에 상당히 좋죠.
박인규 : 자연친화적 재료기 때문에 나무나 종이나...아까 경복궁 말씀을 하다 잠깐 넘어왔는데 경복궁 광화문 복원작업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콘크리트로 지은... 제가 듣기론 광화문 건물의 방향이나 위치가 잘못됐다는 말씀을 하신 걸로 들었는데 어떻게 잘못된 겁니까?
신응수 : 기존 건물에서 많이 들어왔죠 앞으로. 안으로 들어오고 동쪽으로 치우쳤고. 동쪽으로 치우쳤다, 방향이 틀어졌다는 건 그것이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설이 두 가지에요. 남산에 신사가 있었는데 그걸 방향을 그리 뒀다는 설도 있고, 또 청와대와 중앙청, 서울시청... 대일본 하는 그걸 맞춰서 지었다. 어쨌든 5.6도 정도가 비뚤어졌어요. 남산 쪽을 바라봤죠. 그게 왜 그렇게 되냐면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비뚤게 지으면서 그 안마당에 축을 맞춰서 이걸 건립하다 보니 완전히 축에서 벗어났죠. 그래서 그 전에는 구총독부 건물이 있을 땐 몰랐는데 건물이 해체되고 거기 흥례문이 복원되고 보니까 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죠. 그래서 하루 속히 복원돼야 한다는 것이 국민들한테 인식이 됐고, 기왕 복원할 바에는 제자리로 가서서... 그러다 보니까 서쪽으로 가야 되고 앞으로 좀 나와야 되고
박인규 : 광화문 복원을 비롯해서 경복궁 전체 복원작업은 언제까지 끝나게 돼 있습니까?
신응수 : 지금 현재 1차 계획한 데서 5단계 공사가 광화문이거든요. 광화문 권역이죠. 그 옆에 부속건물도 있고. 그래서 지금 저희가 보기에는 80% 정도 되지 않았을까
박인규 : 그럼 앞으로도 한 3, 4년 더
신응수 : 그래서 2009년까지, 2009년 말에 광화문이 완성되게 돼 있으니까 1차 계획은 그때 다 끝나는 건데, 그렇게 복원이 돼도 그것이 한 20년 동안 하는 건데 기존 건물이 있던 데서 한 30% 복원되는 거죠. 중요한, 꼭 있어야 할 건물만 복원하기 때문에 대원군 시대에 복원한 것에 먼저 있던 건물을 합쳐도 40%가
박인규 : 그 뒤로도 복원작업을 계속 하시게 되나요?
신응수 : 그렇겠죠. 중요한 건 그 후에도 다시 연구를 해서 복원하겠지요.
박인규 : 경복궁 복원도 하시고 전통건축박물관도 지으시려면 앞으로도 상당히 바쁘실 것 같습니다.
목수로 한 50년 가까이 일해 오셨는데 후회는 없으십니까?
신응수 : 지금 와서 후회는 없어요.
박인규 : 17살부터 일을 시작하셨는데, 어떻게 목수의 길에 들어서시게 되신 거죠?
신응수 : 아주 사는 데가 아주 산골이에요.
박인규 : 병천이라고 들었는데
신응수 : 병천만 해도 차가 다니는 데도 아우내 나오려면 20리가 넘어요. 걸어서 나오죠. 그래서 시골에서 중학교도 병천에서 겨우 마치고 가정형편이 서울로 올라왔죠.
박인규 : 그렇게 해서 형님이 목수신데 목수일을 따라하시다가 한옥건축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당시 한옥건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신응수 : 한옥건축을 배우는 게 아니고 그 당시는 목수 일을 배운다는 건데요, 서울 시내에 6.25 후기 때문에... 60년대에 엄청나게 집장사... 50년대 말 건축붐이 일어났어요. 그저 20평, 15평, 30평짜리도 별로 없고. 대단위 아파트단지 들어오듯이 논 같은 델 다 메우고 집을 지어나가요. 한옥으로 전부. 그 똑같은 집을 쭉 지어 내려가죠. 그래서 팔고 사고 하는 집장사라고 했어요. 그런 것이 서울에 엄청나게 일어났기 때문에 그때 목수들이 많이.. 중간에 일제 30년이라든지 여러 가지, 6.25로 일이 없다가 그 당시 한옥이 붐이 일어났죠.
박인규 : 신응수씨의 선생님으로 이광규, 조원재 선생님을 꼽는데 이 분들은 어떤 분들이세요?
신응수 : 저도 몰랐죠. 봉원사 일을 하면서 겨울에는, 집장사는 겨울에 일이 없어요. 늦가을만 되면 벌써 일이 떨어지고 겨울에 쉬어야 되는데 겨울에 일을 가지러 갔다가 이광규 선생님을 뵈었는데 절 일을 하고 있더라구요. 절은 큰 데는 겨울에도 계속 공사를 해요. 그래서 이렇게 큰 공사를 하는구나 했는데, 남대문 중수공사가 이뤄졌어요 61년도에. 완전 해체를 해서 다시 보수하는데 기둥도 많이 갈고, 그때 오라고 해서 갔더니 그때 조원재 선생님이 도편수시더라구요. 제가 제일 어른으로 모시던 분이 부편수... 제자 분이셨고.
박인규 : 아, 이광규 선생님도 조원재 선생님의 제자시군요.
신응수 : 네. 조원재 선생님 부편수로 계시더라구요.
박인규 : 조원재 선생님이 경복궁 같은 데도 참여하셨습니까?
신응수 : 그렇죠. 그 분들이 전통적으로..
박인규 : 목수로서 일을 배운다는 건 어떻게... 서양건축은 건축학과 대학에 가서 배우지만 한옥건축 하시는 분들은 일을 하시면서 배우는 건가요?
신응수 : 그렇죠. 그래서 기왕 뜻을 가졌다면 좋은 선생을 찾아가서 현장에서 배우는 것만이, 자기 나름대로 이론과 실습을 겸해야 하기 때문에 이론을 아무리 알아도 손이 따라가 줘야 하거든요. 할 줄 모르고 말로만 해선 안 되죠.
박인규 : 신응수 선생님은 인간문화재가 되신 게 언젭니까?
신응수 : 91년도 5월 1일에 됐죠.
박인규 : 대목장으로서는 그 전에 되신 분도 있으시죠?
신응수 : 그렇죠. 두 분이.. 이광규 선생님이 그 전에
박인규 : 혹시 그럼 지금도 제가 한옥건축을 좀 해보고 싶다고, 신응수 선생님께 배우겠다고 오는 젊은이들이 있나요?
신응수 : 많은데 다 받아줄 수가 없고, 면접을 해서 정말 끈기 있게 배울 수 있나 이런 것도 보고. 지금은 그래도 건축과를 대학에서 나오고... 4년제 나온 사람도 있고 전문대학 나온 사람들이 찾아와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상당히 저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보람을 느끼죠.
박인규 : 몇 분이나 후학을 양성하고 계세요?
신응수 : 지금 현재 제가 목수들이 현장에 한 50명 되는데 그 중 한 10여 명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죠.
박인규 : 제가 어떤 TV프로그램에서 보니까 목수학교라고 해서 시골에서 한옥 짓는 걸 가르치고 그러던데, 우리 한옥 같은 경우도 그런 교육과정이랄까요? 현장에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만들어서 가르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신응수 : 절실히 필요하죠. 저도 부여에 전통문화학교 생긴다고 해서 장인들에 대한 그런 걸 가르치는 게 생기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고. 사설적으로 목수학교가 두어 군데 있는 걸로 알아요. 경상도에 하나, 삼척 쪽에 하나 있고. 있는데 지금 거기서 배우고 나온 사람들을 보면 상당히 미약해요. 그래서 좀 체계 있게 문화재처에서 협조를 해줘서 제대로 된 장인들을 양성할 수 있게 지원해 줬으면 좋겠어요.
박인규 : 신 선생님 보시기에 아직도 미흡한 측면이 있다. 문화재청에서 그런 데 한 번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신응수 : 그래서 그것도 상당히 좋은 얘기지만 원래 여러 부서에서 들어오니까 잘 안 되겠죠. 저도 부천에 만약 박물관이 들어서면 우선 장인들 양성소부터 한 번 마련해 볼까, 문화재청과 협의를 해서 제대로 된 장인을 한 번 길러볼까 계획을 세우고 있죠.
박인규 : 한옥건축을 해보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요즘 많을 것 같아요. 많이 가르쳐 보셨으니까 한옥건축을 하려면 이 정도의 재능이랄까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어떤 걸까요?
신응수 : 재능은 오래 해야 느는 거지만 우선 마음가짐이 중요하죠. 상당히 어려우니까, 손으로 큰 나무를 다루고, 또 건축 하면 나무가 부재가 커요. 아파트 같은 공사야 부재가 작은 걸 가지고 하지만 우리 대목들은 큰 부재를 다루기 때문에 이걸 때에 따라서 목 뒤로 이고 다니기도 하니까 상당히 힘들죠. 구멍을 하나 파도 어려우니까 끈기가 있어야지요. 뭔가 해보겠다 하는 것. 정말 한옥에 매료되지 않으면 안 되죠. 건물을 보면서 자기가 거기 도취돼서 정말 내가 한 번 배워서, 지금 여기서 성공 못하더라도 내 집이라도 한 번 내 손으로 지어보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돼요
박인규 : 경복궁 복원공사도 하셔야 되고 전통건축박물관 착공되기 시작하면 많이 바쁘실 것 같은데
앞으로의 계획을 마지막으로 말씀해 주시죠.
신응수 : 지금 남은 궁궐건축이 걸려 있는 게 상당히 많이 있어요. 그것이 마무리 되면서 박물관이 시작하더라도 한 5년은 걸리죠. 그렇게 모든 걸 한 번 정리하는 차원에서 잘 만들어서 후배들한테 넘기고 떠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박인규 : 전통건축박물관, 빨리 용지 문제도 해결이 되고, 특히 정정하실 때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셨으면 고맙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늘은 인간문화재 대목장 신응수씨를 초대해 우리 나라 고건축물의 숨겨진 매력과 복원작업의 의미 그리고, 이 시대의 살아있는 장인 정신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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