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입니다. 앨빈 토플러는 1928년 미국 뉴욕 출생으로 49년 뉴욕대학교를 졸업했고 공장 노동자 생활을 비롯해 신문기자로 일했습니다. 1959년부터 3년간 포춘지의 부편집장을 지냈고 코넬 대학 객원교수와 록펠러 재단 등에서 활동했으며 미래학자인 부인 하이디 토플러와 함께 토플러 어소시에이츠(Toffler Associates)를 공동창설해 세계 여러 나라의 정보와 기업들을 대상으로 경제와 기술발전, 사회변화에 대해 조언하고 있습니다. 또 글로벌 트렌드에 대한 집필과 강연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고, 대표적인 저서로는 '문화 소비자' '미래의 충격' '제3의 물결' '부의 미래' 등이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최근 방한한 앨빈 토플러와 우리 젊은이들의 대화 내용을 직접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통역에는 이화여대 통역대학원 조경실 교수입니다
질문1 : 먼저 박사님 만나뵙게 돼서 굉장히 영광이구요, 안녕하세요, 저는 성신여대 4학년에 재학 중인 박영미라고 합니다. 제가 드릴 질문은 한국은 현재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이고 또한 일본과 중국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놓여 있는데 박사님께서는 다가올 미래 한국이 세계중심이 될 거라고 저서에서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이 미래 세계의 중심이 될 거라고 하셨는지 궁금하고, 또 이를 위해 한국의 젊은이들이 꼭 해야 할 일에는 무엇이 있는지, 또 어떤 점을 꼭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박사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앨빈 토플러: 한국은 오늘날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앞서가고 있는 국가입니다. 한국의 역사를 되돌이켜 보면 30년 만에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가 됐습니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다른 나라가 백 년이 걸린 것을 한국은 30년에 해냈으니까요. 그러니까 제1의 물결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넘어가면서 이제는 제3의 물결. 지식기반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해 더 빨리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근면성 덕분에 한국이 그렇게 될 수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여러 가지 다른 원인이 있을 겁니다. 한국이 과연 앞으로 세계의 중심국가가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중심국가가 아예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국가가 중심국가가 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한국은 대량생산을 하는 공장 중심으로 운영되는 체제에서 서비스기반 지식기반 경제로 아주 빨리 성공적으로 진입한 국가입니다. 그리고 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한국이 당면할 과제들은 지난 20, 30년간 한국이 당면했던 과제들과는 조금 다를 겁니다. 한국은 분명 브로드밴드나 기술적인 부분에서 가장 앞서가고 있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 한국이 강점으로 삼고 앞서갈 순 없습니다. 부의 미래에서도 저희가 분명 얘기했습니다. 기술적인 혁신이나 혁명은 제도적인 혁명, 변화, 기관이나 사고의 변화 없이는 별로 크게 성공할 수 없다. 그러니까 기술적인 혁신이 있어도 제도적 혁신이 없으면 이 기술적 변화 자체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산업시대에 맞는 공장 같은 틀에서 계속 일하면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점점 더 가난한 나라로 공장을 운영하는 대량생산 체제는 움직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은 다른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도전이 한국 앞에 놓여지게 될 겁니다. 무엇보다 저는 제도가 바뀌고 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재벌을 없애야 되냐 남겨야 되냐, 공기관의 혁신이 필요하냐 민간기업의 혁신이 필요하냐, 이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관료주의를 완전히 우리는 없애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관료주의가 공공부문이건 민간부문에 존재하면서 모든 것이 더 비효율적이 되니까요. 이 관료주의 때문에 지식기반 경제, 빨리 움직이는 경제, 하이텍경제에서 모든 것이 잘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제도적 개혁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고, 저는 교육제도부터 개선하고 바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도 물론 그렇구요 한국과 마찬가지로. 왜냐하면 기존 여러 나라들의 교육제도를 보면 아직도 공장식의 시뮬레이션을 통한 교육을 고집하고 있거든요.
질문2 : 안녕하세요? 저는 김태용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군대에 있을 때, 몇 십 년 전 출판된 미래쇼크를 읽게 됐습니다. 그 당시 너무 비슷하게 미래를 예상했다는 점에서 너무 깜짝 놀랐으며 그러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평소에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미래학자가 되려면 어떤 준비와 노력을 해야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앨빈 토플러: 제 얘기와 제 아내 얘길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저희는 공식적으로 미래학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한 적도 없고 사실 어떤 선생이 미래학자가 되기 위해 이런 수업을 받으라고 한 적도 없고 그 당시만 해도 미래학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대학을 졸업하고 제 아내와 저는 다른 사람들이 별로 안 하는 경험을 가졌습니다. 저희가 공장에 들어가서 5년 동안 근로자로 일했습니다. 그때는 저희가 몰랐지만 어떻게 보면 저희가 산업사회의 맨 밑바닥에서부터 일하면서 연구하고 공부했다는 거죠. 공장에 근로자로 들어가서 공장이 운영되는 조직이나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다 직접 보게 된 거죠. 그리고 하이디는, 제 아내는 그 당시 노조 지도자 역할도 맡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상당히 아내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하나의 스토리가 있는데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그 당시 저희가 일했던 공장은 알루미늄 공장이었습니다.
백인 5백 명, 흑인 5백 명, 총 한 천 명이 일하는 공장이었는데요, 제 아내가 레크리에션위원회의 리더였습니다. 리더가 하는 것은 여름에 노조원들이 나들이 갈 때나 외출할 때 프로그램을 짜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여름이니까 시 수영장에 가서 수영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흑인 근로자들이 우리는 거기 못 간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이 흑인들이 못 들어가는 금지되는 장소들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 아내 하이디에게는 NO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가능이라는 건 없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우리는 간다고 얘기하고 근로자들은 한 백 명이 됐나요 그 당시에 수영장으로 갔고 그날부터 이 수영장에는 흑인들과 백인들이 함께 수영할 수 있는 곳이 됐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희는 대학을 졸업해서 현실적인 삶을 직접 체험한 거죠.
저는 7살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 외숙모와 외삼촌이 작가가 되는 꿈을 키워라 하면서 격려해 주셨지만 부모님은 정말 싫어하셨습니다. 겁이 나셨던 거죠. 작가가 되면 굶어 죽는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그렇게 되지 않았지만. 어쨌건 공장에서 일하면서 상당히 많은 것을 공부할 수 있게 됐고 다음 제가 한 일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줬습니다. 공장에서 나와서 다음 한 일이 신문사에 취직한 건데요 노조가 발간하는 신문사에서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한 2,3년 동안 일했는데 노조가 발간하는 신문사인데 갑자기 편집장이 저를 불러서 워싱턴에 사람이 필요한데 가겠느냐 해서 제가 워싱턴으로 가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대단한 거죠. 공장에서 근로자도 일하고 3년 안에 백악관을 출입하는 기자가 됐다는 겁니다. 상원과 백악관을 출입하는 기자로 완전히 바뀌었다는 겁니다 제 삶이.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러한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체험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얘기하자면 긴데요, 그 다음에 기자로서 워싱턴에서 2, 3년 일하다가 뉴욕으로 가서 <포춘> 매거진 기자로 일하다가 IBM기자가 보고서를 부탁했습니다. 컴퓨터의 미래에 대해서, 사업의 조직이나 실업, 고용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보고서를 써달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몇 개월 동안 IBM회사를 방문하고 시설들을 방문하고 초기에 나온 인공지능기기들도 보고 컴퓨터 환경을 방문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죠. 그 당시 저희는 깨닫게 됐습니다. IBM 시설들을 보면서 뭔가 미국에서 새로운 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 탄생하고 있구나 하는 것. 그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 사람들은 컴퓨터를 모르거나 무서워했거든요. 컴퓨터 때문에 우리는 실직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요. 그래서 그 다음 아내와 저는 프리랜서 기고자로 활동했습니다. 정치 전문잡지, 여성잡지, 많은 미국 잡지에 글을 기고하면서 일했는데요 여기서 하나의 공통적인 테마가 나오는데 저희가 굉장히 다양한 체험과 경험을 했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를 통해서.
그 다음에는 제록스사가 R&D에 대해서 자기네들 연구개발에 대한 보고서를 써달라고 부탁했고 AT&T가 또 와서 통신의 미래에 대해 보고서를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실 저희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본의 아니게 기술전문가도 아니고 수학가도 아니었는데 여러 첨단기술을 다루는 미국회사들을 위해 일하다 보니까 이런 첨단기술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접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그 다음에는 이런 내용들을 <미래쇼크>라는 책에 담아냈죠. 그러니까 변화가 아주 빨리 오고 있다. 모든 것이 빨리 변하고 있고 더 빨라지고 있고 따라가기 참 어려울 것 같다는 내용의 <미래쇼크>를 내놨습니다. <미래쇼크>가 베스트셀러가 됐고 영향력 있는 책으로 선정됐죠. 그래서 그 다음으로 저희가 계속 다른 미래와 관련된 책을 쓰게 된 것입니다.
미래학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일단 저는 책을 정말 많이 읽습니다. 독서를 많이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읽는 기계라고 불러도 좋은데 신문도 많이 읽고, 미국 신문뿐만 아니라 외국신문들도 많이 읽습니다. 요미우리 신문이 있는데 일본신문인데 영어판이 나와요. 그래서 구독해서 읽습니다. 두 번째로 저희는 전 세계로 돌아다닙니다. 연사로 초청을 받아서요. 오늘도 한국에서 초대를 해주셔서 저희가 여기 왔는데요, 여러 나라와 대륙을 다니면서 많은 문화와 접하고 이러한 문화와 접하면서 풍부한 것을 경험하고 배우게 됩니다. 한국에 와서 상당히 기쁘고 이렇게 돌아다니면 또 제가 강연을 하지만 제가 또 다른 문화를 만나면서 배우는 것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배우는 것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나 시각을 갖게 되는 거죠.
질문3 :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외국어고등학교 3학년 김정완이라고 합니다. 박사님께서는 프로슈머를 정확히 예견하셨는데요, 미래의 정보화사회에서는 프로슈밍이 어떻게 발전해 나아갈 것인지, 그리고 프로슈밍과 관련된 유망직업에는 어떤 직업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앨빈 토플러: 시장에서 제가 아까 얘기한 기존의 경제구도, 그러니까 돈 버는 시장에서 상당히 많은 제품들과 기술들이 급속하게 늘어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 기술이나 제품들은 프로슈머... 생산적 소비자들을 위해서 프로슈머들을 겨냥한 제품들이 될 겁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제가 아까 혈압측정 기계에 대해 얘기했죠. 혈압측정을 직접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기계가 나왔기 때문에 병원에 갈 필요 없다. 이런 식으로 자가건강진단을 할 수 있는 것들이 나올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일이 어딜 가서 돈을 내서 서비스를 받거나 뭘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기술을 사서 우리 스스로 우리를 위해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도래하게 될 거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젊으니까 잘 기억 못할 수도 있지만 예전에는 사진을 얻고 싶을 때 큰 카메라를 가지고 찍고 현상시켜서 오랜 기간, 일주일 동안 기다려서 그 사진을 받아볼 수 있었죠. 그런데 이제는 디지털카메라 하나만 이용하면 사진을 찍어서 그 자리에서 사진을 손 안에 넣을 수 있습니다. 기술이 있기에 이렇게 현상할 때까지 기다리고 어디 보내지고 이런 것을 기다릴 필요 없다는 거죠. 스스로 더 싸게 더 편하게 사진을 손 안에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보이지 않지만 프로슈머가 된 겁니다 우리는. 그리고 기계적인, 기술적인 발전 덕분에 우리가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면 우리가 데스크탑 상에서 뭘 제조할 수 있는 날도 올 겁니다. 그러니까 아주 작은 제품들을 우리가 집에서 컴퓨터상으로 스스로 제조할 수 있는 날도 곧 올 거라고 봅니다.
질문4 : 전국 지리교사모임에서 나온 문소연이라고 합니다. 박사님께서 저술하신 책 보면 학교라는 기관을 굉장히 느리거나 아주 시대에 뒤처진 기관으로 묘사하셨는데요 실제로 19세기 학교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말이 나올 정도고, 현직에 있는 저로서도 굉장히 공감이 가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박사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앞서나가는 기업이나 시민단체를 따라가기 위해서 학교는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변화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고요. 한국의 경우는 오히려 교육제도가 너무 자주 바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공교육에 대한 불신이 오고 또 사교육시장이 너무 비대해져서 과열되는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한국의 교육은 도대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앨빈 토플러: 한국의 학교나 교육제도에 대해선 잘 모르니까, 제가 아는 건 굉장히 공부를 길게 늦게까지 한다는 사실 밖에 모르니까 제가 주로 미국의 얘길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마 한국도 비슷할 겁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요즘 기존의 학교 제도는 산업시대의 근로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학교들입니다. 그러니까 공장 근로자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틀을 가지고 있는 학교들이죠. 어떻게 보면 공장처럼 운영 되는 거죠. 제2의 물결.. 산업경제체제에 맞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매스미디어, 많은 사람들 상대로 광고를 하는 체제에 맞는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획일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제도를 갖고 있는 겁니다. 산업시대에 이런 교육체제는 어떻게 보면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희가 이제는 산업시대에 사는 게 더 이상 아니고, 한국도 더 이상 산업국가가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우리는 산업시대 틀에 맞는 교육제도를 그대로 갖고 가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이제 더 이상 대량생산을 안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량생산 체제에서 어떻게 보면 탈 대량생산화 하려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틈새시장을 공략해서 생산하려고 움직이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점점 다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맞춤형 제품을 더 만들고 한 사람에게 딱 맞는 한 제품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량생산, 획일화 이런 것을 거부하는 상황인데 교육제도도 이걸 따라가야 되는데 그렇게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찌보면 학교 안에서도 실험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과거의 시스템은 모든 사람들이 따를 수박에 없는 하나의 제도를 고집했죠. 학교가 바로 그런 것인데, 어떻게 보면 조금 더 다변화된 형태의 교육제도가 필요합니다. 그 내용도 더 다변화시켜야 되구요. 그리고 또 이런 질문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인데요, 한국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겠지만 우리가 의무교육을 받아야 되는 나이가 있잖아요.
예를 들어 5살이면 무조건 모든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해야 된다고 하는데 왜 5살이어야 합니까? 5살 때 학교에 입학할 준비가 된 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아이는 7살 때 입학하는 게 나을 수도 있고 어떤 아이는 4살이 돼서 입학하는 게 나을 수도 있는데 완전히 틀에 박혀서 일정한 나이에 꼭 입학해야 된다고 정해 놓고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정치적으로 논쟁이 될 수 있어서 좀 위험한 질문이기도 하고 제가 반드시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연 교육이라는 것을 의무화 시켜야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교육의 의무화와 관련된 것입니다. 교육이 의무교육이 되면 민주주의에게는 좋지만 교육 그 자체에게는 별로 안 좋을 수도 있거든요. 정말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질문을 던져야 됩니다. 제 생각에는 65세 이상인 사람은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된다고 아예 정하고 5살 때부터 무조건 받아야 된다는 걸 바꿀 필요가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질문5 : 안녕하세요, 저는 여의도여고에 재학 중인 2학년 신정윤이라고 합니다. 박사님께서는 청소년 시기에 멘토가 있으셨나요? 만약 있으셨다면 어떤 분이고 또 왜 그분을 멘토로 삼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청소년 시기에 꿈이 무엇이었는지 또 그 꿈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래학자가 아니라 한 인생의 선배로서 앞으로 꿈을 펼칠 청소년들을 위해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앨빈 토플러: 제가 어렸을 때 가졌던 꿈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을 잘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육을 중요시하는 집안에서 컸습니다. 돈은 별로 많지 않고 가난했지만 교육을 정말 중요시하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7살 때 제가 작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좀 겁을 냈습니다. 작가는 좀 배고픈 직업인데... 이런 생각을 하셨겠죠. 그 당시 경기도 나빴으니까, 부모님은 아마 이런 것을 연상했을 겁니다. 미국사람이 작가가 되겠다고 파리로 가서 옥탑방에 살면서 끼니도 굶고 고생하겠지.... 그래서 별로 격려를 별로 안 해주셨어요. 그런데 다행히 바로 옆에 삼촌과 숙모가 살고 게셨는데 너무나 멋지다면서 저를 많이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제 멘토는 초기에는 숙모와 삼촌 아니셨나 싶습니다. 제 숙모는 시를 쓰는 분이었고 삼촌은 출판업에서 일하는 분이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정말 큰 힘이 됐습니다. 작가가 되고 싶으면 되라고 얘기해 주셨거든요.
아직도 숙모가 제게 준 단어백과사전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12살 14살 때 선물을 받은 건데요, 그리고 또 다른 많은 멘토들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멘토라는 것을 제가 몰랐지만 기회의 문을 열어준 고마운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저는 NYU를 졸업했습니다. 정치학과 교수님 한 분이 계셨어요. 영국 교수님이었는데, 한 학기 동안 이 교수님의 수업을 들었는데 말 한 마디도 안 하고 교수님과 직접 얘기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교수님이 저를 부르더니 미국에 전미학생회라는 것이 있는데 위스콘신주 메디슨에서 회의가 있는데 NYU학생대표로 나가보지 않을래? 하고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저는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일단 학생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이 있는데 한 번 후보로 나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생각은 안 했지만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기에 후보로 나갔고 선출됐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또 제 삶이 바뀌었죠. 정치에 대해서도 조금 더 생각하게 되고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기회를 주는 분들이 많은데 그렇게 생각을 그 당시엔 못하더라도 나중에 되돌이켜 보면 도움을 준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요, 이게 좀 뻔한 얘기가 될 수도 있지만 만약에 뭔가를 진짜 하고 싶고 거기에 대해서 꿈꾸고 계신다면 그냥 저질러 버리고 하세요. 남이 뭐라고 하고 너는 못한다는 안 좋은 얘기를 해도 그냥 저질러 버리고 그냥 해버리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부분은 제 아내, 배우자인 하이디를 만났던 일입니다.
박인규 :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어제와 오늘 이틀 동안 2부작으로 최근 한국을 방문한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그의 새 저서 부의 미래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뭔지 짚어보고, 한국경제와 교육의 미래에 대한 우리 젊은이들과의 대화 내용을 직접 들어봤습니다. 특히 토플러는 한국은 변화에 잘 적응한 역사를 지닌 역동적인 나라로서 앞으로 한국사회가 좀 더 발전하려면 비효율적인 관료주의에 대한 개혁과 함께 무엇보다 교육이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는데요.
청소년 청중을 의식한 듯 자신의 청소년 시절 이야기도 꺼냈습니다. 청소년 시절 시를 쓰는 숙모와 출판사를 다녔던 숙부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고 작가의 꿈을 꾸었기에 기자가 될 수 있었고 변화의 시대에 기자를 하면서 미래를 꿈꾸었기에 미래학자가 될 수 있었다며 꿈을 잃지 말 것을 주문했는데요. 앞으로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 갈 많은 젊은이들, 젊은날의 매력은 결국 꿈을 위해 무엇을 저지르는 것이라는 앨빈 토플러의 말을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박인규였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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