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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평화와 통일, 더 많은 복지로 나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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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제는 평화와 통일, 더 많은 복지로 나아가야"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6/07] 87년 학생운동 지도자, 이인영 열린우리당 의원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어제부터 사흘동안 '6월 민주항쟁 20주년 특별기획'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1987년 6월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국민들의 저항과 열망으로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격렬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군사독재의 억압에 맞서 젊음을 바쳤던 대학생들이 있었는데요.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대학생들은 취업 대란에 시달리며 사회참여나 학생운동과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특히 한 설문조사에서 6월 민주항쟁을 아는 대학생들은 10명 가운데 4명 정도로 20년이란 세월이 만들어 낸 세대의 차이가 꽤 크게 느껴지는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1987년 6월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자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1기 의장으로 6월 민주항쟁을 진두지휘했던 열린우리당 이인영 의원을 초대해 87년 당시 민주화를 열망했던 학생운동의 모습과, 요즘 우리 시대 대학생들의 사회참여와 학생운동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열린우리당 이인영 의원입니다. 이인영 의원은 1964년 충북 충주 출생으로 88년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87년 6월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자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으로 6월 민주항쟁을 진두지휘했고 같은해 8월 출범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1기 의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조직국장과 한국청년연합회(KYC) 지도위원, 한반도재단 동북아전략 연구소장을 역임했습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으며 2003년 제1회 박종철 인권상을 수상했습니다.

박인규 :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그 당시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입장에서는 벌써 20년이란 생각도 들 테고 그때 좀 더 잘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갖게 되실 텐데, 지금 어떤 생각을 갖고 계세요?

이인영 : 87년 6월 항쟁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꼭 엊그제 같은데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산이 두 번 변할 시간이었는데 시비가 엇갈릴 수 있지만 그래도 많은 걸 우리가 이뤄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확고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반기 10년은 군사독재, 권위주의 이런 것들을 청산하는 시간이었고 후반기 10년은 정권교체, 정권재창출을 치면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시간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이제 그런 민주주의의 기반, 반석과 같은 기반 위에서 우리가 평화와 통일로 가는 국민들의 더 많은 복지로 가는 길을 열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박인규 : 그 당시 민주주의 독재타도를 외쳤던 학생운동 지도자 입장에서 보자면 20년 후의 한국은 이럴 것이다라는 나름대로의 그림이 있었을 것 같은데 지나고 나서 보시면 만족스럽습니까,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까?

이인영 : 부분적으로 아쉬운 점들이 있습니다. 특히 10년 전에 있었던 IMF 이후에 우리 사회가 최근 4,5년 사이에 급속하게 양극화사회로 가고 있고, 그런 만큼 일하는 보람, 또 삶의 품위가 인정되는, 삶의 품위가 영유되는 삶의 질이 보장되는 행복한 민주주의로까지 왔느냐 이런 생각을 하면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특히 이제는 FTA를 통해서 자칫 잘못하면 이 양극화가 훨씬 더 넓은 폭으로 깊은 상처를 우리 사회에 줄 수 있기 때문에 경제정의실천을 통해서 사회적인 기본권으로서 최소한의 경제적 평등, 이런 것들을 더 많은 복지를 통해서 해결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거 아니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박인규 : 앞으로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더 우리가 힘을 쏟아야겠다. 우리가 보통 6월 민주항쟁.. 하면 10, 11, 12일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날 하루가 아니라 상당히 오랫동안 시위가 있었어요. 그런데 보니까 그 당시 이인영 의원이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으로 말하자면 학생운동의 최고지도자였는데 6월 10일 당시에는 감옥에 있었다고 해요.

▲ ⓒ프레시안

이인영 :
그렇습니다. 6월 10일에 국민대회가 예고되고 전 국민적 저항이 시작될 것 같은 말하자면 전운이 팽배해지고 팽팽한 긴장이 감도니까 아무래도 그런 시간에는 학생운동이 선봉적 역할을 하고 막강한 돌파를 시작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사전에 검거, 이런 과정이 있었고 제가 거기서 1차적 타겟이 됐죠. 그래서 6월 1일 새벽에 제가 연행됐는데 10일간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10일 당일은 검찰로 이송돼서 당시 서대문구치소로 호송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서울지검이 당시 시청앞에 있었고 호송차의 틈으로 6월항쟁의 함성, 또 시위대의 모습, 그것을 진압하려고 했던 전투경찰들의 모습을 봤습니다. 좁은 틈이었지만 민주주의의 햇살과 함성은 그걸 뚫고 들어오고 있었고 경찰 유치장과 그 밖, 구치소 안과 밖, 이런 데가 아무런 장벽 없이 민주주의의 한 목소리 한 몸짓을 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박인규 : 17일인가 석방이 되셨던데, 그 당시 시위가 계속되고 명동성당에서도 항의농성도 있었는데 어떻게 석방이 됐어요? 말하자면 상황이 끝난 게 아니었는데...

이인영 : 6월 10일 국민대회를 통해서 국민적인 공감대, 저항이 폭발했고 이미 짧은 시간, 불과 1주일의 시간이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학생들, 국민들의 저항은 옳은 것이 입증됐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6월 10일 국민대회를 주도하고 그걸 준비했던 저를 더 이상 가둬둘 명분, 어떠한 정당성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석방됨과 동시에 곧이어서 당시 항쟁의 지도부였던 국민운동 지도부들도 연행됐다가 대부분 석방돼서 나왔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고대 학생들이 6월항쟁의 와중에서도 군사독재 물리치고 민주주의 쟁취하자는 구호 못지않게 고대 총학생회장 이인영을 석방하라! 이런 요구를 강력히 주창했고 그런 국민들, 고대학생들의 요구 덕택에 구속취소라는 아주 이례적인 조치로 석방돼 나올 수 있었습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군사독재정권에서도 더 이상 묶어둘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군요. 지금은 많은 분들이 잊고 있지만 6월 10일 항쟁 당일이 사실은 그 당시 노태우 후보가 당시 간접선거법으로 대통령후보로 지명되는 날이었죠.

이인영 : 그렇습니다. 잠실에 있는 올림픽체육관에서 후보로 지명되고 저녁에는 남산의 하얏트인지 힐튼인지 거기서 축하리셉션을 벌이기로 예정돼 있는, 그들만의 잔치가 다른 한편에선 이뤄지고 있었죠.

박인규 : 결국 6월 내내 시민들, 대학생들의 항의시위에 굴복했다고 할까요? 6.29 선언이 나왔는데..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 참 그 당시에 이게 대체 뭐냐,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느냐 저도 굉장히 헷갈렸던 기억이 나는데 이인영 의원은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이인영 : 당시 서대협지도부 학생지도부 일부에서는 직선제 개헌이라는.. 군사독재가 수용할 수 있고 또 민중들의 저항에 타협할 수 있는 구호와 주장을 내걸었기 때문에 스스로 덧에, 자기함정에 빠진 거 아니냐는 일부의 비판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학생운동 지도부와 국민적 저항을 했던 국민운동지도부들은 4.19 이후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저항이 최초로 승리한 투쟁이다. 그리고 완전한 승리는 아니지만 부분적 승리를 시작한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열려진 합법적인 공간, 정치공간을 더 확장해서 민주주의의 대세를 확장하고 12월에 있는 대선을 계기로 해서 궁극적 승리를 향해서 우리가 나아가면 된다는 승리에 입각한 평가. 또 우리의 투쟁의 성과물로 자리매김하자는 평가가 대세였습니다. 실질적으로 6.29선언 자체가 군사독재가 국민들의 아무런 저항 없이 스스로 내어놓은 것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요구에 후퇴해서 강제당해서 내놓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승리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게 옳은 거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

박인규 : 결국은 12월에 가서 노태우 후보가 직선제로 당선이 됐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양김분열에 대한.. 저희 어제 시간에 나온 함세웅 신부님께서는, 양김께서는 역사의 죄인이다 지금이라도 국민 앞에 무릎꿇어야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당시 전대협에서는 비판적 지지라고 해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겠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고. 그 결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프레시안

이인영 :
당시 10월 말, 이렇게 되면서 양김의 분열이 현실화됐고, 이런 과정에서 민주진영의 분열이 예고되고 있었기 때문에 전대협의 입장에서는 후보단일화를 위해서 노력하자.. 그래서 11월 말 12월 초까지는 후보단일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압박하고.. 그런 과정에서 양김 스스로가 후보를 단일화해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되지 않을 때 양김의 팽팽한 균형을 깨야 되기 때문에 후보단일화를 하기 위한 일환으로 특정 세력에게 힘을 집중하는 힘의 균형을 깨서 하나의 후보로 힘을 쏠게 하는 것이 어떠냐, 이런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단일화를 도덕정으로 주장하는 것 못지않게 그걸 이뤄내는 실천적 수단이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12월 초쯤에는 비판적 지지를 통해서 후보단일화를 이루자. 그래서 단일한 힘을 만들어서 대통령선거에 임해야만 승리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느, 사실은 이런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후보분열, 양김의 분열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민주화운동세력의 분열로까지 나아가서 도덕적 책임감을 그 후에도 많이 져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이인영 의원은 제가 어떤 언론보도를 보니까 본인 이메일 주소에도 1987을 쓰시고, 굉장히 의미가 깊은 것으로 받아들이신다고 했는데, 6월 민주항쟁이 본인의 삶에서는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인영 : 제 인생에서 오랜 인생을 살진 않았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가졌던 시간 아니었나 싶습니다. 가장 뜨거웠던 열정, 또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더라도 때로는 부모님께 아픔을 드리더라도 더 큰 어머니인 조국을 위해서 그럴 수 있어야 한다는 맑은 마음, 이런 것을 갖고 있었던 시기였고. 그 시절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정의는 승리한다. 역사는 대중이 주인이고 주인인 대중이 일어서서 결단하면 역사는 바뀐다. 이건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가 아니고 살아있는 진실이고 신화다. 이런 것들에 대해 아주 확신을 가졌구요, 그런 역사관, 가치관이 아주 구체적으로 확립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6월항쟁에 승리했다는 자부심, 명예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박인규 : 제가 최근에 한 역사학자가 쓴 글을 보니까 87년까지 현대 한국의 정치사는 민주화운동사라고 할 수 있다. 그 정점에는 학생운동이 있었다. 60년대 이후로 한국 정치의 주요한 세력이었다 학생운동이.. 그런 말씀을 하셨던데, 최근 설문조사를 보니까 대학생 10명 중 6명 정도가 5.18도 잘 모르고 6월 민주항쟁도 잘 모른다는 얘기를 해요.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이인영 : 수많은 선배들이 희생하고 때로는 역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역사를 위한 재단에 바쳤던 숭고한 정신에 비추어서 이런 것을 후배들에게 살아있는, 생동감 있는 이야기로 면면히 이어갈 수 있도록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선배로서 책임을 많이 느낍니다. 더 많은 귀감이 되고 모범이 돼서 그런 역사정신이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동시에 후배들에게도,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 못지않게 역사와 사회에 대해 주목하고, 특히 대학생이면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이기 때문에 비판적 지성을 가지고 비판적 지성의 안목으로 역사와 사회문제에 대해서 늘 각성된 사람으로서 생활해 줄 것을 주문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노력을 통해서... 동일한 역사를 반복할 수는 없지만 미래를 더 창조적인 역사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박인규 : 아직도 학생운동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학생들이 있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도 90년대 이후로 상당히 고립됐다는 느낌이 들고, 이인영 의원도 90년대부터는 학생운동이 퇴조했다.. 지금 학생운동의 모습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이인영 : 학생운동이 20년 전에 비해서 국민, 대중 속에서 사랑과 기대가 높지 못한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학생운동의 몫이 달라져서 생긴 일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달라진 시대에 맞는 달라진 학생운동의 몫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더 많이 연구하고. 특히 1차적으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학생대중이 어떤 문제에 주목하고 그걸 통해서 어떻게 더 많은 더 좋은 미래를 설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주목하고, 그것을 제2의 학생운동으로 창조한다면 학생운동은 다시 제2의 중흥기를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분단돼 있고 냉전이라는 민족의 현실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평화와 통일로 가는 데 있어서 학생들의 비판적인 목소리, 또 어떤 면에선 선도적인활동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고 새로운 사회의 과제로서 다문화 가정이나 이주노동자 또 동성애 등등 새로운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편견 없이, 인권을 옹호하는 것이 더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것이구요. 또 양극화사회 속에서 비정규직을 비롯해 노인과 어린아이들에 대한 더 많은 복지 이런 것들이 필요한 시점이거든요. 환경 문제도 아주 사회 곳곳에 뿌리깊게 직면한 문제로 와 있고.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학생들이 더 많은 사회적 공헌, 의미있는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은 많이 있다. 그런 것들을 다시 잘 모아낸다면 국민들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제2의 학생운동의 중흥기를 맞이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박인규 : 민주화운동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부분에 대해서 학생들이 운동의 형태로 해야 될 일이 아직도 많이 있다.

이인영 : 네. 저는 그것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 확대하고 더 굳건하게 뿌리박는 동일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386세대에 대해서는 공도 많고 과도 많고.. 최근에 와서는 오히려 386 기득권세력화 됐다고 해서 오히려 칭송보다는 비판이 많은 것 같은데, 386세대의 대표적 정치인 중 한 분으로서 사회의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인영 : 저희들 중 일부가, 특히 정치권에 몸담은 386세대 중에서 운동권 출신이 기득권세력화 된 거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따가운 질책으로 받아들입니다. 실제로 기대만큼 못해낸 측면도 있고. 그러나 386세대의 시대정신은 몇몇 정치권 386들에게 있다기보다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아주 건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직장과 가정에서 또 이웃에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름대로의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뿌리박고 또 평화의 가치관을 세워가는 386대중, 생활인386들한테 그 시대정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적어도 그런 시대정신을 갖고 있는 386대중이나 생활인386들은 변함이 없다.

그 당시 87년에 우리가 가졌던 우리 사회의 더 많은 자주와 민주,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고 그것을 갈망하고 열정적으로 실천했던 정신들이 사회 곳곳으로 뿌리내리고 확장돼 나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변명 같지만, 정치권에 들어온 386들도 우리 사회가 더 많은 진보로 가는 데 있어서, 특히 평화와 복지를 확장하는 데 있어서 이것을 법과 제도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함께하고 있고 앞장서고 있다, 이런 점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박인규 : 87년 12월 대선이 이른바 민주진영의 분열의 시점이라고 많이 얘기하는데 그 분열상황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거 아니냐.. 최근에 와서는 노무현 정부와 다른 진보세력 간에 내가 진짜 진보다, 이런 얘기들도 많이 나오는데.. 지난 4년간 노무현 정부의 성과에 대해서 한 팀이셨겠지만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잘된 점과 못된 점..

▲ ⓒ프레시안

이인영 :
정치개혁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돈선거를 추방하고 깨끗한 선거를 법과 제도로 확립한 측면, 그리고 권위주의를 완전히 청산하고 아주 민주적인, 개방된 정치문화를 확립한 측면 이런 것들을 우리가 확고히 인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경유착을 근절해서 관치경제가 아니라 자율적인 시장경제의 물꼬를 트고 확립한 점들은 우리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남은 문제들은, 지역주의에 갇혀서 아직도 우리 정치문화가 개선되지 않은 점, 이런 점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확실히 반석처럼 전제시켰다는 점들을 우리가 주목해야 되고. 그 다음으로 많은 영역에서 생활상의 영역으로까지 복지를 확충하기 위한 노력들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보육이라든가, 어르신들... 고령화 사회에 맞는 노인들에 대한 대책, 이런 것들을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보다 더 많이 재정적으로나 법제도적으로 확장해내고 있고, 그런 점들은 성과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에서 시작된 평화의 길, 또 그걸 통해서 통일로 나아가는 길, 이런 부분들이 더 확대되고 가속페달을 밟고 있느냐, 이런 점에서는 아직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구요. 또 다른 측면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이 실질적인 민주주의로 가는 데에 매우 중요한데,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의 정의에 맞는 경제개혁을 했느냐 이런 측면에슨 아직 좀 부족한 거 아니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양극화의 사회적 문제들을 의미있게 해결하고 있지 못하다. 이런 점들은 우리가 비판적으로 지적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현실정치인이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지금 한나라당은 말하자면 질서있게 경선을 하고 있는 반면 이른바 민주평화개혁세력이라고 하는 진보진영은 갈라져 있거든요. 대통합, 소통합, 여러 가지가 나오는데, 이쪽은 어떻게 나가야 된다고 보십니까?

이인영 : 87년 6월항쟁의 정신은 군사파쇼, 군사독재세력에 반대하는 모든 민주화세력이 대동단결해야 한다. 이런 것이 매우 중요한 정신이었습니다. 그런 연장선에서 반파쇼 민주연합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그 당시엔 굉장히 중요한 과제였고 실제로 그걸 해냈습니다. 그래서 6월항쟁이 승리했구요. 지금도 우경화 되는 보수와 수구냉전화, 또 양극화되는 신자유주의, 이런 것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들, 말하자면 민주평화개혁세력들이 크게 대동단결해서 하나의 힘으로 대통합을 이루는 건 아주 절박한 과제고 6월항쟁의 정신일 뿐 아니라 오늘의 시대정신입니다. 그 대통합의 과제를 반드시 실현해야 하고 그런 과정에서 모든 국민이 참여해서 국민과 함께 단일한 후보를 국민경선을 통해 선출해낸다면 87년 6월항쟁을 통해서 승리하고 12월 대선에서 분열해서 패배한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국민과 함께하는 국민경선, 오픈프라이머리를 치를 수 있는 시간의 제약도 있기 때문에 6월 중순에서 7월 중순까지는 대통합의 결실을 확고히 매듭지어야 된다. 그걸 통해서 단일한 후보를 국민경선을 통해 선출하면 그것이 6월항쟁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고 오늘의 시대정신을 완성해서 미래를 평화와 더 많은 복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자유, 또 행동하는 자유, 이런 것을 확고하게 한 민주주의를 지금 이루었는데 이제는 일하는 보람, 풍요롭고 품위있는 생활이 가능한, 삶의 질이 보장되는 행복한 민주주의로 갈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올해가 6월 민주항쟁 20주년인데, 올해 와서야 6월 10일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됐고, 법정기념일 지정하는 데 이인영 의원이 앞장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6월항쟁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무엇인지 간단히 말씀해 주시죠.

이인영 : 지난 20년 동안 민주주의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곳곳에서 총체적인, 한국사회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 동력을, 엔진을 달았다면 이제 남은 20년 동안 더 많은, 더 확고해진 평화, 더 많은 복지, 더 좋은 삶의 질을 만들어내는 민주주의로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그걸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희생해서라도 봉사하고 헌신했던 그날의 정신을 잊지 않고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새삼 거듭 가져봅니다.

박인규 : 낮은 수준의 정치인들은 권력을 잡는 데만 골몰하지만 높은 수준의 정치인들은 국민들이 잘 사는 데 헌신한다고 하는데 이인영 의원도 앞으로 높은 수준의 정치인이 되도록 노력하시길 부탁하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이인영 :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6월 민주항쟁 20주년 특별기획' 두 번째 시간으로 당시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열린우리당 이인영 의원과 함께했습니다. 내일 3부에선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조희연 교수를 초대해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의미와 성과를 정리해봅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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