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협상 타결로 취임 이후 처음으로 보수언론과 보수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지지율이 30%까지 상승하던 노무현 정부가 느닷없이 정부부처 기자실 통폐합 조치를 발표하였다. 노무현 정부가 임기를 몇 달 남기지 않았고 더구나 선거국면을 맞이한 이 민감한 시기에 그러한 무모한 정책을 내놓았는지 의아해 한 사람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우선 노무현 대통령이 '기분이 째진다'고 할 만큼 한미FTA 타결 이후 지지율이 올라갔고, 이것은 '기고만장'이라 할 정도로 청와대 내 사기를 고양시켰다고 알려지고 있다. 진작부터 물밑에서 추진 중이던 노무현 대통령 직계세력(이른바 '친노세력')의 본격적인 정치프로젝트가 이 시점을 기회로 표면화되었다고 보인다. 대외적으로 참여정부평가포럼이 출범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다음으로 친노세력의 세 결집이 갖게 될 정체성 문제이다. 한미FTA는 더 이상 설명이 불필요할 만큼 보수적 어젠다이며, 지지층의 결정적 이반을 낳게 되었다. 친노세력이 여권 내에 자기 입지를 확보하려면 집권 이래 거의 상실해 온 진보적 정체성을 조금이라도 갖추어야 하며, 새로운 전선을 형성할 필요가 생겨났다. 이것은 사회경제 정책을 둘러싼 진정한 대결보다는 노무현 정부가 지금껏 그랬듯이 '말싸움'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수언론과 일전을 벌이기 위한 구상으로 추진된 것이 바로 기자실 통폐합조치였을 것이다. 이는 한나라당과의 '대립적 공생관계'의 구도를 의식적으로 추구한 것이라 할만하다.(서동만, '한반도브리핑'의 이전 글 참조) 지난 주 참여정부평가포럼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토해 놓은 연설에서 친노세력을 '합리적 진보'라고 자기 규정한 것도 이러한 강박증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진보언론을 제외한 보수언론만이 타게트가 될 것으로 생각한 당초 예상은 크게 어긋나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언론 전체를 상대로 한 전쟁이 되어 버렸다. 겨우 올라갔던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도 20%대로 하락하고 있다. 이것은 청와대의 정책 결정과 관련된 정보능력, 정무적 판단능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수준인가를 드러내는, 정권말기의 전형적 실패사례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또한 그동안 한미FTA는 물론이고 그 이전의 용산기지 협상이나 전략적 유연성 협상을 비롯한 일련의 외교협상과정에서 이미 드러난 바이지만, 노무현 정부의 국민참여 의식, 민주의식이 위태로운 수준에 달해 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로도 기록될 것이다.
여기서 노무현 정부가 스스로 진보세력의 일원이 되고 싶어 안달이라고 해서 친노세력이 객관적으로도 진보세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더 이상 따질 계제는 아닌 것 같다. 그에 앞서 '기본'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주도하에 정부 참가자들이 전담조직을 만들어 이번 정부의 성과를 평가하겠다는 자세가 갖는 역사의식은 국왕 자신도 왕조실록의 사초 기록에 일체 관여하지 못하도록 독립적 사관에 맡겼던 조선시대의 문제의식보다도 한참 뒤처져 있기 때문이다.
한미FTA의 대북정책과 관련된 효과
한미FTA가 대북정책에 어느 정도 효과를 가질 것인지는 판단이 쉽지 않은 문제이며, 중장기적 영향력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한국경제 뿐 아니라 남북관계, 동북아시아경제협력 전반에 걸쳐 핵심적 과제가 된다.
이 글에서는 우선 그 단기적 효과부터 언급해 보기로 한다. 협상 개시 발표 직후부터 우려 수준 내지 음모설 차원에서 한미 간에 한미FTA와 남북정상회담의 빅딜설이 나돌고, 그 가능성에 대한 예상이 반대세력 내부에서 나온 적이 있었다. 한편 열린우리당 내부 지지 세력은 적어도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만은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을 통과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협상의 막바지에 관련조항이 들어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지지층 대부분이 반대라는 상황에서 이것이라도 건지지 못하면 찬성할 수 없다는 마지노선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국회가 협상에 대한 통제권도 없고 굳이 이렇다 할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은 형편에서 통상관료들이 주도한 결과는 이미 알려진 대로이다.
개성공단과 관련된 합의 내용은 오히려 남북경제협력을 미국의 대북정책에 연계시킨 것이었다. 개성공단 제품의 남한산 인정이란 남북경제협력을 미국의 대북정책과는 독자적인 남북관계의 영역으로 확보하자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미 한-싱가포르 FTA, EU를 제외한 스위스 등 유럽 4개국과의 FTA에서는 북핵문제 해결의 시점과 무관하게 전제조건 없이 협정 비준 시점에 개성공단제품을 특혜관세 대상으로 삼기로 합의한 바 있다. 한미FTA는 기존 FTA의 도달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거꾸로 미국의 대북정책에 남한의 대북경제협력을 얽어매는 개악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혹 떼기는커녕 혹 붙였다는 말만큼 정확한 비유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직접적인 결과 다음으로 검토해야 할 사안은 미국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타결된 협상이 한반도평화와 직결되는 대북정책 전반에 미치는 영향 문제이다. 이것은 남한의 독자적 대북정책을 미국이 일정 부분이라도 양해할 수 있는 여지가 한미FTA타결로 확보되었는가 하는 측면과 관련된다. 외교부는 한미동맹이 군사안보동맹에서 경제동맹으로 한 차원 높아졌다고 설명하지만, FTA가 현재까지는 미국이 남한의 독자적인 대북정책에 우호적으로 대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대북정책은 철저하게 북 핵무기 철폐라는 군사안보 문제로 접근하고 있지 이를 FTA라는 경제문제와 연관시키고 있지는 않다. 물론 연관시켰다고 해서 필자가 그것이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본다는 뜻은 아니다. 노 대통령이 FTA를 준비도 없이 그토록 서둘러 추진했는데 그 뒤에는 무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지푸라기나마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북미관계가 진전되며 6자회담의 2·13합의가 이루어진 호전된 조건 하에서도 BDA문제로 지난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남측은 인도주의적 문제인 대북 쌀 지원을 거부하였다. 장관급회담은 결렬된 채 다음 회담 일정도 잡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 이유는 남북관계를 6자회담과 별개로 진전시키지 말자는 노-부시 양 대통령의 직접 합의에 있다는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대북정책까지 통일부를 제쳐두고 외교부가 주도하는 상황이 초래됨에 따라 지난 주 남북장관급회담은 결렬된 것이다. 이와 같은 경위를 보건대 현 시점에서 한미 FTA의 효과는 한국경제의 이해관계라는 경제적 관점에서 평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만 선거국면을 앞둔 한국의 정치상황 속에서 사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어가고 있다.
FTA 자체의 비준문제
그 이유는 FTA비준을 둘러싼 미국 워싱턴의 분위기에 있다. 현지 사정을 전하는 소식통들에 따르면, 현 시점에서 FTA협상안의 비준 문제가 미국 정부 안에서는 전혀 현안이 되어 있지 않다. 최근 미국을 방문하는 한국 측 인사들에게 미국 내 고위당국자들은 협상 비준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협상결과가 미국의 이해 관철에는 미진하다는 이유로 민주당이 압력을 가함에 따라 정부와 의회가 새롭게 합의한 신통상원칙에 의거하여 '재협상' 내지 '추가협상'론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외교정책에 관한 한 초당적 협력이 관행처럼 되어 있는 미국의 외교정책의 성격을 감안해 보더라도 그 의도나 이유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전 세계 온갖 유형의 국가들과 FAT협상을 추진하며 갖가지 사례의 실패나 성공을 맛본 초강대국 미국이 한국과의 협상에서 정말 혀를 내두를 만큼 지독한 양보를 받아내고도 정작 비준에 무관심한 듯하거나 재협상, 추가협상을 주장하는 자세는 몇 가지 각도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의회 사정으로는 민주당이 자신의 지지층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강력한 압력을 넣고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단 기본 협상이 타결된 이상 추가 이익을 확보하려는 의회의 노력은 민주당의 정파적 이유를 넘어서도 미국 정부 입장에서 불리할 것은 없다.
한국 측 사정과 관련해서는, 노 대통령 임기 중에는 협상이 비준되기를 원하지 않거나 실제 거의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했을 수 있다. 더욱이 거센 반대가 예상되는 노무현 정부 하에서 비준을 꾀하게 하기보다는 차기 정부로 넘기는 쪽이 원만한 비준에는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미국의 경험으로는 협상 상대로는 노무현 정부만큼 손쉬운 상대는 없지만, 비준 문제는 정반대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한미FTA로 분열에 빠진 채 당장 대선의 쟁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여권 주변에는 다행스러운 것으로 비칠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현지 사정을 노 대통령을 필두로 한국정부가 제대로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광개토대왕이 미 대륙에 진출한다'는 선전을 하고 있는 정부는 아직 국회의 검증이 시작도 되기 전에 더구나 위와 같은 미국 사정과는 무관하게 거의 홍수와 같은 홍보물을 퍼부으며 한국경제의 백년대계에 해당하는 엄청난 사안을 이번 국회 회기 안에 통과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무색하게 미국 측이 재협상을 요구해 오자, 어쩔 수 없이 이에 응하려는 옹색한 자세로 나가고 있다. A플러스로 채점할 만큼 훌륭한 협상이었다는 자화자찬을 해놓고서 과연 어떠한 전략을 가지고 재협상에 나설지 한심스러운 상황인 것이다.
더욱이 앞에서 언급했듯이 2·13합의 이후 순조로워 보이던 6자회담 내 북미관계가 BDA문제로 꼬이고 있다. 당초 단순한 기술적인 문제로만 간주되던 사안을 둘러싸고 최근에는 미국 내 대북 강경파가 재무부를 거점으로 금융계좌 재개와 관련된 기술적 문제 해결을 미루고 있는 데 원인이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아직 사태의 추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원인은 어떻든 결과만을 놓고 보면 당초 예상보다 합의 이행이 지체되는 진행을 보일 것이다. 따라서 현재 남북관계를 사실상 북핵문제와 연계시키고 있는 노무현 정부 입장으로서는 북미관계가 진전되는 것 밖에는 남북관계 개선의 카드를 갖고 있지 못한 셈이 된다. 그 반면에 부시 정부 입장에서는 올해 말로 임기가 끝나는 노무현 정부에 대하여 그 임기 안에 협상 진전을 가져갈지를 두고 시간이란 무기를 지니고 있는 셈이 된다.
정치적 중심의 형성
한미FTA의 합의문이 공개되고 나서 그 내용 속에는 한국의 경제정책 전반을 제약하며 사실상 개헌이나 다름이 없는 독소조항이 곳곳에 포함되어 있다는 분석이 잇달아 제시되고 있다.(<프레시안> 송기호의 글 참조) 핵심적인 몇 가지만 예를 들어도 투자자-정부간 제소 조항, 이와 관련된 간접수용 문제(특히 부동산 및 조세정책과의 관련), 지적 재산권 보호문제, 무역구제 및 농산물 보호 조치(세이프가드) 문제, 개성공단 문제 등이 있다.
아마 다른 나라라면 협상과정이 몇 차례나 중단되며 아예 협상 자체를 포기했을 사안인데도 이렇다 할 쟁점이 되지도 못하고 경제주권을 양도한 것과 다름없는 내용이 합의되어 버렸다. 이는 정해진 시간 안에 합의를 성사시키려는 노 대통령의 의지에 관료적 관성이 결합한 결과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민 전체 이익의 관점에서 협상과정을 통제할 국회나 시민사회의 역할이 철저히 배제된 '통상독재'의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더욱 심각한 사정은 한미FTA의 졸속비준을 막아야 할 여권 자체의 지리멸렬에 있다. 이제 여권은 정치적 중심이 없이 표류하고 있고, 얼마나 제대로 검증작업에 임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태이다. 나아가 이러한 사정은 남북관계에도 미치고 있다. 지난 해 북한 핵실험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대북포용정책의 수정을 시사하며 개성공단, 금강산관광을 중단시키려는 의향을 내비친 적이 있으나, 열린당, 민주당, 민노당은 물론 국민중심당까지 가세하여 이를 견제하여 가까스로 정부가 남북경협의 기조를 견지하도록 추동하였다. 그런데 이번 남북장관급회담이 쌀 지원문제로 결렬되는데도, 정치권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북미관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데 따른 위기의식의 이완도 있었겠지만, 정부에 영향을 미칠 만큼 여권의 정치력이 결집되지 못한 점도 작용하였다.
지금까지 여권이 시급히 정치적 중심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은 노무현 대통령이 중심이 되어 한나라당이 대치하는 '대립적 공생'의 구도를 타파하고 선거국면과 그 이후에 대비해 간다는 측면에 집중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임기 말의 정책 운영과 관련해서 이를 견제하고 견인할 주체를 형성하는 과제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임을 한미FTA나 남북관계를 둘러싼 최근 상황은 일깨워주고 있다.
우선 한미FTA에 관해 철저한 검증작업을 수행하려면 고도의 정치력을 갖추어야 한다. 구체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각계각층을 조정하고 조직하는 작업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재협상과 관련해서는 본 협상 과정에서 무력했던 전철을 뒤집을 기회로 삼아 확고한 조건을 내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가까운 장래에 국민의 삶이 걸린 문제이며 한국경제의 백년대계가 걸린, 나아가 동북아시아경제협력의 미래가 걸린 중차대한 사안이다.
다음으로 한반도평화와 관련해서 김대중 정부 이래 화해-협력정책의 기조를 확고히 견지해 가도록 정부를 임기 마지막까지 추동하고 견인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에 온 힘을 기울여 대처하는 것이야말로 선거국면에서 국민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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