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어음 줄테니 북한은 현금 내놔라?

힐, 'BDA 해결 전 북핵 폐쇄' 요구

북핵 6자회담의 미국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미국 등이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자금 송금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북한은 핵시설 폐쇄 등 2.13합의에 따른 약속사항을 먼저 이행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힐 차관보는 29일 인도네시아에서 북한과 미국이 2.13합의 이행의 전제조건으로 합의한 BDA 송금 문제가 매우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문제라고 지적하며, 북한은 BDA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핵 시설 폐쇄를 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방문을 먼저 허용하라고 촉구했다고 <연합뉴스>가 전했다.
  
  미국, 합의사항 변경하나
  
  힐 차관보의 이같은 발언은 미국이 BDA 문제 해결을 북한이 원하는 '가시적인 방법'으로 보장하는 대신 북한이 2.13합의를 먼저 이행하자는 방안을 뉴욕 채널 등을 통해 북한에 제기했다는 최근의 보도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북한과 약속한 '선(先 )BDA 해결, 후(後) 2.13합의 이행'이라는 원칙을 변경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BDA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이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행동만을 먼저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이 취해야 할 조치로는 △미국 금융기관을 송금의 중계기지로 지정하거나 △불법으로 낙인찍힌 BDA와 외환거래를 해도 추후 문제 삼지 않겠다는 명시적인 보증을 하며 △미 국무부-재무부-법무부의 이견을 조율해 '비핵화 우선' 원칙을 합의하는 것 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미국은 이같은 행동을 하지 않은 채 북한에 대해 'BDA 해결 약속'이라는 어음을 줄 테니 '핵폐기'라는 현금을 내 놓으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BDA 문제 때문에 핵실험이라는 극한적인 대립까지 불사했던 북한으로서는 북미간의 합의사항을 깨는 미국의 그같은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 오히려 미국의 제안은 2.13합의로 시작된 북미간의 신뢰조성에 악영향만 미쳐 북핵 해결 과정에 또 다른 난관을 조성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힐, 여전히 중국이 자금중계역 맡기 원해
  
  힐 차관보는 이날 "북한 역시 BDA 문제를 처리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그러나 중요한 점은 북한이 핵 문제에서 빠져나오려면 핵사찰단의 방문 허용과 핵시설 폐쇄 등 북한이 해야 할 역할을 이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언제 해결될지 단언해 말할 수 없지만 몇 가지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 이번 베이징 회담에 기대를 걸고 있다"며 "만약 북한이 (BDA 문제는) 우리에게 남겨 두고, 먼저 IAEA 사찰단 방문 허용과 핵 시설 폐쇄를 이행한다면 사태 해결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동남아시아를 순방 중인오른 힐 차관보는 태국(22일), 베트남(23일), 필리핀(25일)에 이어 이날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뒤 중국으로 떠났으며 30일부터 베이징에서 북한 핵문제와 관련된 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한편 하산 위라주다 인도네시아 외무장관은 힐 차관보와의 회담에서 북한자금의 중계기지로 자국 은행을 이용할 것을 제의했지만, 그는 그보다는 중계기지를 중국이 제공해줄 것을 바라고 있었다고 밝혔다.
  
  위라주다 장관은 "힐 차관보는 중계기지로 중국의 은행을 이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게 될 것"이라며 "북한자금 송금 문제에 대해 미국이 확실한 약속을 해줄 것을 촉구했으나 이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기술적 문제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