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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와 악어새'…베네수엘라 언론, 석유기업, 그리고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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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와 악어새'…베네수엘라 언론, 석유기업, 그리고 미국

김영길의 '남미리포트' <256> RCTV 사태 바로보기

28일 새벽 '시민에 의한 방송, 시민을 위한 방송'을 표방하며 베네수엘라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와 관심사를 반영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베네수엘라 사회TV(TVes)가 첫 선을 보였다.

이로서 그동안 면허갱신을 놓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베네수엘라 RCTV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TVes는 RCTV를 인수한 베네수엘라 국영TV 채널이다.

그러나 RCTV 사태의 여진은 수그러들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베네수엘라 국내는 물론 전세계 언론계를 뒤흔들고 있다. 일부 한국 언론들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군을 동원해 RCTV 방송국을 강제로 점거한 것 같은 뉘앙스가 풍기는 보도를 하기도 했다. 또 차베스가 최근에 발동된 대통령 비상조치 특별법을 통해 RCTV 방송국을 폐쇄한 것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차베스 정부가 장악한 건 방송국 시설이 아니라 전파발송에 관련된 채널권한뿐이다. RCTV의 모든 장비와 재산권은 고스란히 사주인 마르셀 그라니어의 소유로 남아 있다. 물론 차베스 정부는 이 시설과 직원들을 그대로 인수할 의사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적법한 절차와 현 시세에 의해 인수를 하겠다는 것이다.
▲ 베네수엘라 정보통신부가 발행한 RCTV 보고서 표지 ⓒ김영길

필자는 이미 몇 차례에 걸쳐 차베스 정부 출범 후 생겨난 RCTV와의 악연을 조명한 바 있다. 따라서 이번에는 합법적으로 출범한 차베스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던 언론권력 RCTV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아래 내용 중 상당수는 베네수엘라 정보통신부가 작성한 'RCTV 관련 보고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단 지난 2002년 총파업에 관한 내용과 반차베스 쿠데타에 얽힌 얘기들은 이미 언급을 했기 때문에 생략했다. (☞관련기사 : "RCTV는 베네수엘라에 들어온 트로이 목마""차베스, '정치적 언론' 숙청 나섰다" , "차베스와 언론, 누가 누구를 탄압하나" )

석유기업에서 언론 재벌로

RCTV의 모체인 펠프스 주니어 그룹(William H. Phelps Jr. 가문)이 베네수엘라에 뿌리를 내린 때는 석유개발 붐이 한창 뜨겁게 일던 1920년이었다. 당시 베네수엘라 전역에는 더치 쉘과 스탠더드 오일 등의 석유기업들이 석유광구 확보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석유개척시대에 베네수엘라에 진출한 미국출신 펠프스가(家)는 운송업을 시작으로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1930년 스탠더드 오일이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을 장악하자 펠프스 가문은 라디오 방송국 설립을 추진한다. 이때 펠프스 그룹이 손을 잡은 건 미국의 RCA(Radio Corporation America)였다. RCA의 기술과 자본 등으로 베네수엘라 지국형식을 띤 1BC 라디오방송을 설립한 것이다.

베네수엘라에서 라디오방송과 운송업 등으로 사세를 확장한 1BC는 이를 모태로 1953년 RCTV 방송국과 FM 라디오 방송국, 민간항공사 등을 포함한 5개의 기업을 거느린 그룹으로 성장했다. 명실공히 베네수엘라의 '언론 재벌'이 된 것이다.

1BC는 태동 때부터 외국 에너지기업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베네수엘라 역대 정권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따라 베네수엘라 정부는 1941년부터 언론, 특히 외국자본에 의해 운영되는 언론사 규제법을 입안해 언론통제를 시도해보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이 난다. 언론사들이 여론을 앞세워 정치권에 대해 로비를 한 것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RCTV와 차베스와의 악연을 재구성한 RCTV 보고서의 동영상

파트 1 : RCTV 대 차베스

2002년 쿠데타 당시 차베스 복귀에 환호하는 베네수엘라 국민들 - "방송을 할 권리"를 주장하는 마르셀 그라니아 RCTV 사장 -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러나 계약기간은 끝났다"는 차베스 대통령의 모습

파트 2 : 전문가 논평

법률 전문가들의 RCTV 시청률 분석 장면. '시청률은 높지만 포르노를 방영하고 성매매 업소를 소개하는 등 아동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오락프로에도 정부 비판 광고를 삽입한다'는 등의 분석을 하고 있다.

파트 3 : RCTV 퇴직자들의 증언

'직원 복지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RCTV 사장의 주장, 뒤 이어지는 퇴직자들의 증언 '봉급, 퇴직금, 의료보험 모두 베네수엘라 일반 기업에 비해 형편없었다.'

파트 4 : 시청자 반응 "RCTV는 사회악"

'시청률은 높아도 폭력성이 짙다. 교육적이지 못했다. 국민 정서에 악영향을 미쳤다. 삶의 가치관을 생각하지 않게 했다'고 평가

베네수엘라에 진출한 외국 에너지기업들과 언론들은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석유회사들은 광고라는 합법적인 수단으로 언론사를 지원했고 언론사들은 석유회사들이 유리한 조건으로 베네수엘라에서 사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측면에서 지원했던 것이다.

RCTV는 베네수엘라의 또 다른 언론재벌인 ODC그룹의 베네비시온과 함께 베네수엘라 전체 언론사 광고시장의 85%를 차지할 만큼 절대적인 특권을 누려 왔다. 이들 두 재벌언론사는 외부에서 보면 상호 경쟁관계이지만 정략결혼 등을 통해 혈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뉴스도 80% 이상이 이 두 채널에 쏠리게 되어 뉴스 독점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1998년 차베스의 집권으로 이들이 호황을 누려 왔던 광고시장에 변동이 생기게 됐다. 석유자원 국유화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결국 RCTV가 차베스와 날카롭게 대립의 각을 세우게 된 건 석유자원 국유화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이에 이들은 차베스를 축출하기 위해 쿠데타 세력을 노골적으로 지원하고 거짓으로 가공된 뉴스를 전파하는 한편, 루머성 정보도 확인절차 없이 내보내며 끊임없이 차베스를 괴롭혔다.

RCTV는 차베스와 정치적인 갈등만 빚어 온 건 아니다. 이 방송은 공중파로서의 최소한의 도덕적인 잣대도 무시한 채 포르노에 가까운 영상들을 마구잡이로 방영해 사회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를 문제 삼은 각종 인권단체들의 고발이 잇달았지만 이들은 사회의 공기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노력은 접어둔 채 시청률에만 신경을 써 왔다.

RCTV 처분은 '합법적'

베네수엘라 사회 전역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던 RCTV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차베스는 이에 합법적인 제제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이때 등장한 게 방송면허 갱신법이었다.

최근 차베스에 의해 집행된 방송국의 전파사용 면허 기간 허용법과 국가통신위원회의 감시에 관한 법률은 1987년 제정된 법률이다. 차베스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대통령 비상조치 특별법이 아니라는 얘기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1941년 언론사규제법을 입안해 국회에서의 의결을 주문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 의회는 46년간 이 법안을 방치해 오다 지난 1987년 5월 27일 하이메 루신치 대통령 때에 이르러 통신법 제1577조를 마지못해 승인했다. 이 법은 베네수엘라 내 모든 민간방송국들의 공중파 발송 면허유효기간을 20년으로 하고 매 20년마다 국가로부터 면허갱신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차베스가 RCTV의 면허를 취소한 것은 이 법을 근거로 한 것이다. 베네수엘라에는 현재 350여 개의 크고 작은 언론 매체들이 존재한다. 이들 언론들은 대다수가 현 정부에 대해 거침없는 비난을 퍼부어대는 반(反)차베스계 언론들이다.

그런데 유독 차베스가 RCTV에 대해 특별한 악감정을 가지게 된 건 자신에 대한 무차별한 공격보다 이들이 워싱턴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워싱턴의 전략대로 활동을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지난 1998년 차베스가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집권에 성공하자 보수정치권 인사들과 RCTV 방송사 간부들은 수시로 회합을 갖고 차베스 정부에 유리한 정보는 철저히 차단하고 사회불안 등 불리한 뉴스만 확대 보도하기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이들은 또 좌파세력의 집권으로 인한 사회불안을 거론하면서 쿠데타에 대한 구체적인 루머를 공개적으로 방송을 통해 흘리기도 했다. 2002년 총파업과 반차베스 쿠데타, 연이은 국민소환투표 등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어둠의 그림자 '미국'

이런 조직적이고도 장기적인 반차베스 시나리오가 일개 언론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 등 다른 남미 국가의 경우에서 보듯이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기 전 미 국무부는 항상 현지의 우익 재벌언론사들을 움직였다.

좌파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미 국무부의 사전 시나리오에 따라 현지언론들은 언론조작과 사회불안 부추기기 등을 통해 군부의 정치개입에 명분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 국무부는 천문학적인 로비자금을 언론사와 정치권에 뿌렸다. RCTV도 이런 남미국가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차베스의 축출을 주도했던 것이다.

미 국무부는 RCTV 임원들과 정치인들에게만 금품을 살포한 게 아니다. 미 국무부는 최소한 6명 이상의 RCTV유명 앵커들에게 2004년에서 2006년 사이에 6000달러에서 1만2000달러씩을 정기적으로 지급했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언론 연수를 명분으로 언론인들을 미국으로 불러다 교육시키고 돈까지 쥐어주면서 반차베스 여론을 주도하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 국무부의 지원을 받은 거대 언론재벌과 차베스의 해묵은 대결구도는 결국 차베스의 KO승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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