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 중남미 국가들의 국제금융기관 추방 움직임은 세계은행과 IMF등 서방 금융기관들의 운영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IMF와 세계은행으로 대표되는 이들 서방 금융기관들이 최근 들어 극심한 불황과 내분에 휩싸인 것도 중남미 국가들의 이런 움직임과 무관치 않다. 이는 그동안 중남미가 이들 금융기관들에게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는 지적도 있다. 30년 넘게 중남미 국가들은 이들 금융기관들의 '봉'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 중남미 국가들이 이제 금융시장 독립을 외치고 있다. 이번 주 들어 아르헨티나의 외무·경제·재무부 장관들의 행보가 눈에 띄게 바빠졌다. 오는 6월말 혹은 7월 남미은행 창립선언을 목표로 남미 국가들과 절차와 세부운영사항 등을 확정 짓기 위해서다. 베네수엘라 역시 중미 국가들을 상대로 설득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에서다.
남미공동시장 정회원 4개국(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베네수엘라)과 볼리바아, 에콰도르 등 6개국 외교·경제·재무장관들은 22일 파라과이에 모여 남미은행 창설확정을 위한 최종 합의에 들어갔다. (남미공동시장의 정회원인 우루과이는 내부사정을 이유로 불참했다.) 이 자리에서 그동안 남미은행 창설에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던 브라질이 "남미은행 창설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브라질은 남미은행이 창설되면 남미에서 차베스의 영향력이 한층 더 강화된다는 이유 등으로 적극적인 참여도, 그렇다고 반대 입장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를 견지해 왔다.
그러나 차베스 등 중남미 정상들은 브라질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남미은행 창설을 밀어붙일 태세다. 따라서 남미은행 창설과 기금확보가 초읽기에 들어간 형국이 된 것이다.
필자는 이들 국가들이 IMF등 서방금융기관들의 영향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남미은행 창설의 최종 협의안을 입수했다. 이를 토대로 남미은행 창설의 배경과 향후 일정 등을 알아본다.
"미국 주도의 금융체제 아래선 경제종속 못 벗어난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의해 추진된 남미은행은 지난 2005년 11월 아르헨티나의 마르델 쁠라따에서 개최된 미주정상회담장에서부터 본격화됐다.
미국 정부가 전력을 다해 추진했던 미주대륙자유무역협정(FTAA)을 무력화시킨 차베스는 미국 주도의 금융시장을 통한 경제종속 관계에서 벗어나야 중남미가 발전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그는 외국 투기자본들의 공격과 서방금융시장 독점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미은행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후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 브라질을 중심으로 이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했다. ( ☞관련기사 : '차베스 궤도수정…사회주의 앞서 경제통합) 그런데 브라질이 미국과 에탄올프로젝트를 본격화하면서 남미은행 창설계획은 답보상태에 빠지게 된다.
룰라 브라질 대통령의 참여를 고대하던 차베스는 전략을 대폭 수정해 아르헨티나의 키르츠네르 대통령과 지난 2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회동했고, 양국 주도로 남미은행을 창설하자고 제안했따. 이에 볼리비아와 에콰도르가 참여의사를 내비치면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또한 이달 초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이 남미공동시장 경제장관들을 에콰도르로 초청해 '키토 선언'을 발표했다. 키토 선언은 남미은행 창설과 남미기금 확보, 단일통화 사용 등 3개 사항을 기본으로 2007년 6월 남미공동시장 정상회담에서나 혹은 7월 베네수엘라에서 개최되는 남미컵 대회기간을 택해 남미은행 창설을 확정하자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 남미은행 창설 실무 역할
차베스로부터 남미은행 창설에 대한 전권을 위임 받은 코레아 대통령은 경제학자 출신답게 약소국들을 위주로 한 남미은행 운영수칙을 마련하고 중남미 각국의 주무장관들과 아순시온에서 최종적인 합의를 유도했다.
남미은행의 기본운영수칙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며 기존의 IMF나 세계은행의 대안으로 중남미권에서 이들 국제 금융기관들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남미은행은 또 낙후된 중남미 금융시장의 발전에 주력하고 선진투기자본으로부터 약소국 보호와 외환파동 등의 금융피해 방지, 산업발전과 각종 인프라건설사업 지원, 에너지개발, 무역확대 등에 우선적으로 자금을 투입한다는 데 합의했다.
남미기금과 은행의 운영방식은 기본 참여 지분금 3억~5억 달러를 기준으로 참여 액수에 따라 투표권을 부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례로 파라과이가 3억 달러를 지분으로 하고 베네수엘라가 30억 달러를 지분으로 참여했다면 파라과이는 1표, 베네수엘라는 은행의 각종 운영결정 투표에서 10표를 행사할 수가 있다.
(이 안에 대해서는 현재 브라질이 유일하게 반대하고 있다. 모두가 똑 같은 지분을 갖고 동일한 권리를 행사하자는 주장이다. 이는 베네수엘라의 대주주 행태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의미다.)
남미은행은 나아가 멕시코와 쿠바를 포함한 중남미 전역 국가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도 준회원 혹은 옵서버로서의 참여를 기대하는 등 문호를 개방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남미은행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중남미 금융시장의 안정이다. 해외투기자본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복안이다. 예를 들어 회원국 중 한 나라가 외환부족으로 곤란을 겪으면 남미은행은 우선적으로 보유기금의 20% 한도 내에서 긴급 지원금을 송금해 외환위기를 막아 준다는 것이다.
남미은행은 또 중남미 전역이 하나의 공동화폐를 유통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다.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은 남미공동통화는 유럽연합(EU)을 모델로 중남미 전체 국가들이 하나로 된 공동통화를 사용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각 나라 정상들을 설득하고 있다. 차베스와 코레아의 이 계획이 남미에서 미 달러화의 의존도를 대폭 감소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조치라는 데에 각국 정상들은 의견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남미은행이나 남미기금에서 근무하게 될 공무원은 자신의 업무에 대해 사법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도덕적인 인사를 엄선해서 임명한다는 것을 명문화했다.
22일(현지시간) 파라과이에서 폐막된 남미은행 실무장관회담은 브라질이 제기한 지분참여 문제와 회원국들간 동등한 권리 행사 문제, 은행과 기금 운영의 기술적인 문제와 세부적인 각론 등을 오는 6월 1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각료회담에서 최종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은행의 명칭을 '남미개발은행'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는 등 소소한 문제 외에는 은행과 기금 창설의 총론은 이미 합의가 끝났다는 얘기다.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이 입안하고 차베스의 검토를 거친 남미은행 창설과 운영수칙이 브라질을 제외한 대다수 중남미 국가들의 외무·경제·재무장관들로부터 별 무리가 없다는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이제 각국 정상들이 함께 만나 '남미은행 창설'을 선언하는 최종 절차만 남긴 셈이다. 그때가 금년 6월말, 늦어도 7월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게 현지 경제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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