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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 지배 상황을 해방이라 할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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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군정 지배 상황을 해방이라 할 수 없지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5/11] '8.15 공간' 책 낸 장을병 교수 <상>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5공 시절 해직교수로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온 원로 정치학자 장을병 교수가 최근 '인물로 본 8.15 공간'이란 책을 펴냈습니다. 한국 정치사에 있어서 8.15 공간은 민족의 역사적 운명을 가름했던 결정적인 시기로 특히 저자는 '8.15 정국의 주역들'로 여운형과 김구, 이승만을 선정하고 이 세 사람의 정치활동과 미국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는데요. 오늘과 내일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원로 정치학자 장을병 교수를 초대해 .15 정국의 주역들을 통해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뭔지 또, 역사를 통해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떤지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정치학자 장을병 교숩니다. 장을병 교수는 1933년 강원도 삼척 출생으로 1959년 성균관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75년 같은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와세대 대학 연구원으로 활동했습니다. 1967년부터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80년 지식인 134인 선언을 주도해.. 해직됐고, 87년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았습니다. 이후 다시 성균관대 교수로 복직해 1991년 성균관대 초대 민선 총장을 지냈고 1996년에는 제15대 국회의원, 2001년부터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냈습니다.

박인규 : 장 교수께서는 2000년 전반기까지 국회의원도 하시고 성대 총장도 하시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까지 하시다가 한동안 대외활동이 뜸하셨어요. 제가 알기론 미국 하와이대학고 다녀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 ⓒ프레시안

장을병 :
그 당시는 아직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었습니다만 요즘은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바뀌었죠. 그때 그 임기가 2004년 9월 31일까지였어요. 그 임기 끝내자마자, 10월 5일에 물론 사전에 준비는 했습니다만 그 날 하와이대학으로 떠났습니다. 그 까닭은 사실 95년 성대 총장 임기를 마치면서 그 당시에 외국으로 하와이대학으로 떠났어야 옳았는데 그때 떠나지 못하고 국내에 있다가 젊은 후배들이 붙들려서 정치참여를 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끝나자마자 갔던 겁니다.

또 하와이대학으로 갔던 또 하나의 이유는 사실 평소부터, 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한국정치론을 전공으로 삼기 이르렀는데 한국 현대정치가 출발한 게 어쨌든 8.15 정국 아니나. 그 출발 당시가 사실 그 후 한국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컸는데 그때 상황이 진짜 어떻게 돼 있었는가. 단적으로 얘기하면 미군정하에서 한국 정치는 소위 새로운 발돋움을 하기 시작했는데 미군정과 우리 정치지도자들 혹은 정치세력과의 관계는 어떻게 돼 있었는가를 한 번 정리를 해줘야겠다, 하는 내 평생의 나름대로의 과제로 생각을 했는데 사실 그 후 한 번도 들어앉아 그걸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까 말씀하셨지만 1991년부터 95년까지는 성대 총장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다음엔 정치판에 뛰어들어서 돌아다니느라 겨를이 없었고, 또 2001년부터 2004년까지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아주 편하게 있었지만 그나마 일을 정성을 쏟아서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집필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평소에 생각하면 이 책을 정리해보자는 내 나름의 결심을 갖고 그 당시 하와이대학으로 떠났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지요.

박인규 : 2004년 10월부터로 따지면 2년 이상을 천착해 오신 저작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분들은 이런 말도 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70년대 후반에 이른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란 책이 나온 것부터 시작해서 작년에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란 책도 나왔어요. 8.15 공간에 대한 책이 참 많이 나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을병 교수 같은 분이 또 책을 쓴 걸 보면 아직도 그 부분에 대해서 풀리지 않은, 합의되지 않은 부분이 많은 모양이다. 굉장히 논쟁적인 것이 아닌가...

장을병 : 8.15 전후사의 인식이란 책도 읽어봤고, 중요한 책이고 재인식도 사실 중요한 책입니다. 그런데 그건 어떤 한 사람의 총체적으로 본 저서가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 각 분야별로 모아 놓은 책이고 나는 내 나름대로의 시각을 갖고, 그래서 총정리를 했으니까 조금 난 의미가 다르지 않나

박인규 : 보통은 해방공간, 해방정국, 이런 말을 많이 쓰는데 장을병 교수께서는 굳이 8.15정국이란 표현을 하세요. 특별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까?

장을병 : 아니 저도 솔직히 말씀드리면 해방공간이라고 하고 싶은 생각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를 따져보면, 우리가 8.15를 계기로 해서 일제 강점기하에서 벗어난 건 분명하지, 그런 면에선 해방이란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다음에 우리 통치기구가 어떻게 계승됐느냐, 남쪽에선 미군정 지배하로 들어갔고 북쪽에선 소군정의 지배하로 들어갔는데 과연 무작정 그때 그 상황을 소위 해방이라는 표현으로 마음 편히 할 수 있겠느냐. 난 그래서 사실 맘 편하게 해방이라는 표현보다는 가치중립적인 8.15라는 표현을 쓰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에서, 내 책에서는 8.15해방이라는 용어는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박인규 : 보통은 해방이라고 하지만 진정한 해방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다. 8.15공간의 주역으로 뽑으신 분이 여운형, 김구, 이승만, 이렇습니다. 어떤 기준이신가요?

장을병 : 왜냐 하면, 사실은 일제가 패망하고 난 다음 그 치안이나 사회 질서를 그래도 인계를 맡아서 질서를 잡아갔던 사람이 누군가 하면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해서, 또 각 지방의 인민위원회를 만들어서 여운형씨가 소위 정리하고 질서를 잡아갔다는 사실. 그러니까 초창기에 여운형씨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고 난 보는 겁니다. 그런가하면 11월 23일 귀국을 했지만 귀국하고 난 다음 소위 상해 임정의 간판, 정통성을 내세우면서 한국 정치의 중요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게 난 백범 김구 선생이었다고 보는 거고. 솔직히 표현하면 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선 그렇게 썩 좋게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단적으로 보면 아주 이기적인 성격이 강한 사람이거든요. 그건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설명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양반을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8.15정국을 매듭지은 사람이 누구냐... 어쨌거나 이승만 박사였다. 그러니까 이승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 아쉬운 점이 하나 있더라. 원고를 정리하고 대충 마무리 지어가면서 김구 선생까지 정리를 하면서 한 사람을 빠뜨린 게 죄스럽다,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어요.

박인규 : 서문에 말씀하신 김규식 박사...

장을병 : 예. 그래서 서문에도 그 얘기를 꼭 밝혔습니다. 김규식 박사를 넣었어야 옳았는데.. 1946년에서 사실 나중에 남북협상까지도 주도.. 김구선생과 주도했던 김규식 박사를 넣어야 하는데 이걸 빠뜨린 걸 난 아주 죄스럽게 생각하고. 그래서 대충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보강하는 입장에서 나중에 언제가 될지 정확하게 약속할 순 없지만 꼭 책을 만들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장을병 교수께서는 일제가 물러간 1945년부터 대한민국이 건설된 48년까지는 해방공간이 아니라 8.15공간이라고 말씀하시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남에서는 미군정이 주도권을 잡았고 북한은 소군정인데, 그 과정에서 남한은 여운형, 김구, 이승만 세 분을 주역으로 꼽으셨어요. 미군정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어쨌든 우리나라가 진정한 독립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행로가 있었는데 보시기에 여운형과 김구, 이승만의 행로가 어떤 차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 ⓒ프레시안

장을병 :
여운형씨는 잘못 인식이 돼서 널리 알려진 공산주의자로 오인되고 있습니다. 나는 여운형씨의 행적을 다 살펴봤더니, 난 단언합니다.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여운형씨가 가장 싫어한 사람이 누구였냐, 공산주의자였던 박헌영씨를 가장 싫어했습니다. 박헌영씨의 독재적 운영방식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려고 했고. 그러니까 그 사람은 절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진보주의자였던 것만은 틀림없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은 내가 그래도 좀 밝혀줘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진짜진짜 분통이 터지고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 국민들이 자생적으로 자발적으로 만든 이 정치조직이 어느 것이었느냐 할 때 아까 내가 얘기한 건국준비위원회의 지방조직이었던 인민위원회.. 그 인민위원회가 우리 국민들의 자생적인 민주적인 조직이었는데 이것마저도 미군정이 해체시켰다는 건 난 너무너무 아쉬운 일이다. 그런데 에드거 스노도 그 얘길 했어요. 사실 그걸 살리는 것이 한국 문제를 해결짓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무작정 해체시켜 버린 건 미군정의 잘못이라는 얘기는 스노도 주장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 김구 선생은, 사실 그 양반이야 우리의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던 임시정부를 이끌어온 지켜온 지킴이라고까지 나는 표현했어요.

맨 처음 출발은 정무국장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주석까지 끝까지 떠나지 않고 우리나라 임시정부를 지켜온 지킴이였는데 그 양반이 돌아와서 참 아쉬운 점이 하나 있어요. 무작정 반탁을 주장했거든요. 이승만과 같이 주장했는데, 그때 반탁을 또 한편에선 이해해 주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해왔던 사람인데 또 다시 해방됐다고 하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데 외세의 지배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거부하기 위해서 반탁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측면을 이해해 주고 싶은데, 그러나 반탁을 주장하다가 결과는 어떻게 되는 거냐.

박인규 : 미국과 대립하게 되는 거죠.

장을병 : 그것보다, 그건 이승만도 그랬지만. 나중에는 반탁을 주장하게 되면 미군정주도하에 단정으로 나갈 수밖에 없어진다. 단독 승부로 나갈 수밖에 없어집니다. 그런 걸 예견하지 못하고 소위 무작정 반탁을 주장해왔던 건 잘못이다. 그런데 47년에 이르러서 다시 반탁 주장을 철회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해야 한다는 자각을 하면서 남북협상에 나간 것은, 백범 선생의 만시지탄이었지만 위대한 결정이었다고 나는 보는 거죠. 그런데, 그 다음 이승만이라는 사람은 아주 명확한 사람입니다. 아까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박인규 : 그렇지만 8.15정국을 마무리 지은 사람이다.

장을병 : 그런데 이 양반은, 반소반공주의자에요. 그 점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미소의 협력에 의해서 만약 한국정부가 수립되면 자기는 반소반공주의자니까 자기는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이런 판단을 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미소협력을 통해서 수립되는 한국정부라면 자기가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는 영악한 판단 때문에, 그래서 내가 이기적인 판단이라고. 애초부터 반공을 주장했는데 그 논리가 나중에는 운이 좋아서 맞아떨어지는 겁니다. 시대적 흐름과 맞아서 결국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마무리 지어서 대한민국을 수립하는 그건 또 하나의 공로로 인정해 주고 싶은 하나의 측면이기도 하다.

박인규 : 이승만이라는 분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 때문에 이기주의적으로 행동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8.15정국을 마무리 지으셨어요. 그걸 보면서 참, 정치라는 게 뭐냐. 보통은 옳고 그른, 옳은 것을 지향하는 게 정치라고 생각하는데 장 교수께서는 정치가 옳고 그름보다는 오히려 힘의 작용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장을병 : 아니, 난 이승만 관계를 쓰면서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라는 기술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아까 박 선생 말씀하신 대로 정치는 그저 옳고 그름에 따라서만 판정이 나는 건 아니다. 오히료 잘못된 길이면서도 그것이 소위 하나의 정세로.. 힘의 방향으로, 힘의 작용 때문에 그릇된 방향이 오히려 올바른 방향으로 착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박인규 : 그런 측면에서 보면 어떻게 보면 김구 선생의 노선은 어떻게 보면 민주적 입장에선 옳았지만 그 당시의 국제정세나 힘의 방향에서는 좀 간과하신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장을병 : 그런데 참 아쉬운 게.. 난 사실 이 책을 쓰면서 어떤 시각을 가졌느냐 하면 민족주의 좌파와 민족주의 우파가 결합되면

박인규 : 가장 좋은, 이상적인

장을병 : 그 얘기는 김구하고, 민족주의 우파고. 소위 여운형은 민족주의 좌파입니다. 이 두 민족주의 세력이 좌파 우파가 소위 연합하고 결속이 이뤄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또 우리네 정치가 새로운 정향을 가다듬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난 저버리지 않고 있어요.

박인규 : 아까 김구 선생이 8.15 정국 초창기에 지나치게 반탁을 주장하신 게 좀 실수라고 말씀하셨는데, 신탁통치 문제가 굉장히 논쟁적인 것 같아요. 그때 민족지도자들이 뜻을 모아서 잘 해결했으면 분단이 없었을 텐데, 오히려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는 게 나았다는 말씀을 하시는 분도 있고. 이 신탁통치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장을병 : 제가 아까 주역들 중에서 세 분만 거론하고 한 분을 뺀 게 너무너무 아쉽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로 우사 김규식 박사를 뺀 게 잘못이었고 하나의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 양반이 보는 신탁통치관이 가장 올바르다고 나는 봅니다. 그 양반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뭐냐면 한국, 조선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를 1차적 문제로 제기하고 있어요.

그 결정문을 보면. 임시정부를 가장 먼저 만들어가지고. 그 다음에 임시정부가 소위 신탁하느냐 반탁하느냐를 결정하면 될 일인데 왜 앞질러가지고 정파들끼리, 정치지도자들끼리 어느 것이 옳고 나쁘다라는 주장하느냐, 그런 주장을 하는 양반이. 그러니까 신탁이고 반탁이고는 나중에 결정하고, 그보다 앞서서 가장 1차적 과제인 한국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문제를 선결과제로 해결하자라는 게 김규식 박사의 주장이거든요. 난 그게 가장 올바른 입장이었다고 보는 겁니다.

▲ ⓒ프레시안

박인규 :
김규식 박사의 그런 주장이 당시에는 별로 큰 힘을 못 얻었던 모양이군요.

장을병 : 그때는 예스인가 노인가. 친탁이냐 반탁이냐. 그리고 또, 반탁을 사실 미군정에서 뒤에서 부추긴 측면도 있습니다. 그 당시 대체적으로 좌파가 주도하는 한국... 남한의 경우 좌파가 주도하는 경향이었으니까 반탁을 소리 높이 외쳐서 좌파 중심의 주도의 정계를 우파 중심의 정계로 소위 조종해 보자. 바꿔보자는 정치적인 의도도 미군정에서 없지 않아 있었던 겁니다.

박인규 : 미군정이 말하자면 반탁을 좀 부추겼군요.

장을병 : 그렇죠. 부추겨서 나중에 조절이 될 줄 알았는데 안 돼서 이 반탁세력과 미군정과 미묘한 관계서 성립되는 경우도 생기는 거죠.

박인규 : 45년부터 48년까지의 8.15정국은 어쨌든 미군정이 가장 결정적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서 좀 진보적이랄까, 그런 분들은 굉장히 비판적이고 문제가 많았다. 또 보수적 입장에서는 그래도 한 일이 많지 않느냐... 여러 가지 논쟁이 많은데 장을병 교수께서는 또 미군정이 그 당시에 한 긍정적인 면도 평가해야 한다. 그런 입장이세요.

장을병 : 미군정도 잘한 점이 있습니다. 특히 나도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지적했지만 그 당시 유행병이 굉장히 번졌는데, 그때 의료관계는 미군정에서 상당히 대처를 잘 해서 우리네 국민들의 생명을 구했다는 면에서는 미군정의 치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고. 어쨌든 나중에 잘못하다 보면 남한도 소련의 영향 아니면 공산주의 영향으로 넘어갈 위험성이 있었는데 그걸 버텨준 소위 반공의 보루로서 버텨준 미군정의 역할은 긍정적으로 봐 줘야 한다고 보는 거죠. 다만 문제는 우리네 정치가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역할을 더 해줬으면 옳았을 텐데 그 면에서는 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아시다시피 이승만 대통령을 이승만을 미군정에서 아주 나중에 지원하고 나온 건 객관적인 현실인데, 과연 그래가지고 민주주의 할 수 있는 의지나 체질이 아닌 사람을 내세워서 정치를 맡기다 보니까 나중에는 결국 국민들과 갈등이 생기고 대립이 생기고 그래서 기어이 폭발한 게 1960년의 4.19 혁명이 아니냐. 그런 면에서는 민주화를 소위 실천해 나간다는 면에서 미군정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느냐, 난 그건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죠.

박인규 : 8.15 이후 60여 년이 지났습니다만 우리나라 대외관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물론 미국입니다. 2002년도 월드컵 때 보면 효순이·미선이 사건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자주적인 모습을 좀 보여왔고 그 여파로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기도 했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초기의 모습과 지금 모습이 달라졌어요. 처음에는 사진 찍으러 미국 안 간다고 하시더니 한미FTA만이 살 길이라고 해서 진보에서 반발도 많고. 현재 한미관계.. 많은 한국 국민들은 좀 더 자주적인 대등한 자세를 원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고 계세요?

장을병 : 아니, 저도 우리나라, 한국이 소위 자주적 입지가 강화돼야 한다는 얘기에 대해서는 이의 없습니다. 나도 앞장서서 그런 주장을 펴고 싶은 사람인데, 다만 정치라는 건 엄연한 현실입니다. 국제적인 정치 속에서 우리를 지켜나갈 수 있는 지혜, 슬기가 어디 있는 건가, 이럴 때 나는 미국과의 관계는 사실 그런 자주나 소위 사대냐 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 미국의 우산 속에서 우리가 그래도 안정을 유지해왔고 경제발전을 이룩해왔던 게 아니냐. 그렇다면 그 우산을 무작정 허물어버리는, 거부하는 방식은 슬기롭지 못하지 않느냐. 감정적으로 보면 외세 의존의 틀을 깨버리는 게 편할지는 모르지만 그걸 무작정 깨버렸을 때 우리가 사실 감당해야 할 자주의 역할, 안보의 역할을 어떻게 우리가 해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이 고민도 함께하는 것이 나는 바람직하다고 보는 거죠.

박인규 : 무작정 반발이나 이해보다는 현실의 힘을 좀 인정해야 된다. 그럼 오늘 말씀은 여기서 마무리 짓고 내일 다시 얘기를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장을병 : 아주 수월하게 얘기가 진행되니 아주 편합니다.

박인규 :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원로 정치학자 장을병 교수를 초대해 8.15 정국의 주역들을 통해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지 말씀 나눠봤습니다. 장을병 교수의 말씀은 내일도 이어집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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