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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치욕은 그 안에 또 미래를 열어가는 힘이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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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치욕은 그 안에 또 미래를 열어가는 힘이 있었던 것"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5/09]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소설 '칼의 노래'로 큰 인기를 모은 작가 김훈씨가 최근 세 번째 역사소설을 출간했습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차갑고 치밀하게 그린 신작 '남한산성'인데요. 무엇보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 민족사의 가슴 아픈 상처를 끄집어내면서 인간의 현실이란 자존과 영광만으로 성립되기 어렵고, 치욕과 굴종 또한 삶과 역사의 중요한 일부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오늘과 내일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작가 김훈씨와 함께 합니다. 오늘은 첫 번재 시간으로, 신작소설 '남한산성'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작가 김훈씹니다. 김훈씨는 1948년 서울 출생으로 고려대 영문학과에서 수학을 했습니다. 1973년 한국일보 기자를 시작으로 시사저널, 국민일보, 한겨레 신문 등에서 27년간 기자생활을 했습니다. 50대에 소설가로 늦깎이 데뷔해 2001년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받았고 2004년 단편소설 '화장'으로 이상문학상,2005년에는 '언니의 폐경'으로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독서 에세이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 여행 산문집 '자전거 여행' '원형의 섬 진도', 그리고 장편소설로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칼의 노' '현의 노래' 등이 있습니다.

박인규 : 제가 한 2년 전에 댁 근처 집필실에서 뵈었는데, 오늘도 집필실인데 장소가 바뀌었습니다.

김훈 : 그때 지하실에 있을 때 한 번 다녀가셨죠.

박인규 : 여기는 2층 오피스텔인데 지하실과 지상에서 글 쓰는 데 차이가 있습니까?

김훈 : 먼저 쓰던 데는 지하였는데 여름에 습기가 차고 물기가 많아서 너무 견디기가 어려웠어요. 이 거대한 오피스텔에 와서 일하고 있는데, 여기 온 지가 한 이틀 됐습니다. 여기 와보니까 꼭... 이게 엄청나게 큰 오피스텔인데요, 시멘트 속에 서식하는 바퀴벌레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박인규 : 제가 알기로는 김지하 시인도 댁이 이 근처고 전망이 좋은 데여서 김훈씨도 전망이 좋은 데로 오시나보다 했더니 주변 환경이 썩 좋지는 않은 것 같아요.

김훈 : 시멘트 틈에 끼여 있습니다.

박인규 : 여기 보니? 큰 사전들이 몇 권씩 놓여 있고, 큰 흑판에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이렇게 써있는데 이게 군대용어 아닙니까?

김훈 : 군대용어가 아니라 군대의 교훈이죠. 제가 한 37,8년 전에 육군에서 근무할 때 배운 건데 평생 저걸 써붙이고 살고 있습니다.

박인규 :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기분으로 생활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김훈 : 완벽하게 정비된 상태에서 관리하라는 뜻이죠.

박인규 : 역사소설로는 '칼의 노래'를 쓰셨고 '현의 노래' 이후에 '남한산성'이 나왔는데 몇 년만에 나온 겁니까?

김훈 : 현의 노래를 재작년에 냈고 작년에 단편집 강산무진을 냈죠. 이번에 나온 소설은 강산무진 후 1년 만에 나온 소설입니다.

박인규 : 저 개인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칼의 노래를 읽어봤고 이번에 남한산성을 읽어봤는데, 그래서 그런지 작가 김훈씨는 전쟁에 관심이 많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김훈 : 물론 관심이 많죠. 전쟁은 인간의 야만성과 인간의 혼란, 인간의 야비함, 비열함... 그런 것들을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계기인 것이고, 전쟁은 역사에서 매우 결정적으로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전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박인규 : 선이나 악, 옳고 그름보다는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이 나올 수 있다. 그런 측면인가보죠?

김훈 : 그렇습니다.

박인규 : 임진왜란은 어쨌거나 나름 우리가 승리한 전쟁이고 병자호란은 사실 치욕적 패배를 당한 전쟁인데 병자호란을 소재로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으신 계기가 있습니까?

▲ ⓒ프레시안

김훈 :
제가 자전거 타고 노는 걸 좋아해서 남한산성에 오래 전부터 가서 거기서 놀았는데, 거긴 자전거 타기 좋은 코스들이 많아요. 놀면서 이상한 내 마음 속의 억눌림이라든지, 들끓는 울분...그런 것을 견딜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을 느꼈어요. 그 산성 구석구석을 들여다 보면서. 그래서 놀면서 결국 내가 언젠가 이런 것들을, 나의 억눌림이나 울분을 글로 쓸 수밖에 없게 되겠구나... 하는 막연한 느낌을 가졌는데 그런 느낌이 저를 끝까지 괴롭혀서 글을 쓰게 만든 것이죠.

박인규 : 소설의 서문을 보면 약소한 조국의 운명에 대한 한이랄까요?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 것도 억눌림의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김훈 : 그렇죠. 바로 그런 것들이죠.

박인규 : 칼의 노래하고 남한산성의 개인적인 독후감이랄까요, 독후감까지 갈 건 아니지만 비교를 하자면 칼의노래는 굉장히 집중이 되면서 잘 읽혀 나가던 반면에 남한산성은 진도가 어렵더라구요. 이게 진 전쟁이라 그런가, 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김훈 : 아마 그게 문장이 특별히 더 어렵진 않을 텐데, 칼의 노래는 이순신 장군이라는 한 사람의 주인공을 향해서 이야기가 집중돼 있는 것이고 이번에 나온 남한산성은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삶의 태도와 언어, 그리고 입장이 다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에 읽는 분들이 아마 그것들을 다 따라오기가 좀 힘드실 거라는 생각은 저도 했습니다.

박인규 : 칼의 노래 같은 경우는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명량해전까지를 클라이막스로 끌고 가는데, 남한산성은 사실 인조가 청나라 군대한테 쫓겨서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그 안에서 47일 동안 농성하다가 결국 항복하는 과정을 보여주셨는데, 책의 서문에 보면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그런 말씀을 하셨고. 삶의 영원성만이 치욕을 덮어서 위로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로 봐야 될까요?

김훈 : 갇힌 성 안에서 매 시각마다 멸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판인데, 그런 성 안에서 논의되는 치욕이나 자존, 그런 것들은 그 언어로서 정당하고 찬란한 것이지만. 자존이라는 것이. 그것은 곧 인간의 현실 속에서 큰 의미를 갖지는 못하리라 생각했던 거죠. 물론 이런 저의 말은 인간의 자존이나 삶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매일매일 살아가는 현실과는 상당히 많은 괴리가 있다는 것이죠.

박인규 : 등장인물들을 보면 15만 청 대군 앞에서 항복해야 될 것인지, 아니면 결사항전할 것인지 결정해야 되는 인조가 있었고 끝까지 싸우자는 김상헌이라는 주전파가 있었고. 최명길이라는 주화파가 있었는데, 저는 보면서 약간 유치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작가의 시선이 어느 쪽으로 가 있는가를 유심히 봤는데 아무 편도 아니신 것 같아요.

김훈 : 그렇죠. 제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아무의 편도 아닙니다. 주전파라는 사람들은 높은 이상과 인간의 정통성의 아름다움을 주장했던 분들인데, 그분들은 결국 군사적 손실을 완전히 망각한, 현실을 완전히 망각한 장님 같은 사람들이었죠. 주화파는 화해하자는 사람인데 말이 좋아서 화해지 사실 투항인 것이죠. 화라는 것이 결국 항복이라는 뜻이죠. 이 주화파들은 역시 삶의 근원적인 바탕이나 삶의 정통성을 깡그리 부정하고 있는 것이죠. 그 사람들은. 이것이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닐 겁니다.

박인규 : 어떤 선택도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네요.

김훈 : 그것이 담론의 양대 주축이었다면 그 두 담론의 축이 서로 부딪혀서 무화되는 거죠.

박인규 : 전체적으로 보면 김상헌이나 최명길이냐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작가의 시선으로 보면, 말이 춤을 춘다, 말이 뱀처럼 혀를 내밀었다. 말이 앞섰다고 말씀하시는데 전체적으로 우리의 대응에서 말보다는 실천, 행동이 없었던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신 건가요?

김훈 : 아니요. 실천이 있었어요. 거기서 엄청난 항쟁이 있었죠. 그 항쟁은 매우 소규모였어요. 그러나 소규모의 작은 전투들이 있었는데 그건 조선으로서는 필사적인 싸움이었죠. 그리고 사실상 이렇다 할 큰 싸움은 없었어요. 그 47일 동안 갇히고 줄인 성 안에서 우리는 뭘 했느냐 하면 말을 한 겁니다 앉아서. 오직 말싸움을 한 거예요. 왜냐 하면 그 이후에는 할 일이 없어. 어떻게 대응할 길이 없는 것이죠. 말싸움이라는 것은 적과 싸우는 게 아니고 내부에서 싸우는 것이죠. 그런 고통스런 날들이 하루하루 지나갔던 것이죠. 제 소설은 그 47일 동안 갇혀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있고 시시각각 멸망이 다가오는 성 안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를 써 놓은 것이죠.

박인규 : 굉장히 좀 냉혹하게 보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는 작품 줄거리 중에 흥미있게 본 부분이, 인조가 말하자면 항복문서를 쓰라고 정5품, 정6품 관리들하고 최명길을 불러서 쓰라고 하는데 한 사람은 못 쓰겠다고 하고 죽기도 하고. 어쨌든 전체로서 조선이 항복, 치욕을 받아들여야 되는데 그 방법도 별로 영웅적이지가 않더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김훈 : 그것은 그때 적에게 보내는 답신이 결국 항복문서인데, 그것을 쓰지 않기 위해서, 개인의 치욕으로 모면하기 위해서 개인은 개인의 방식으로 싸운 것이죠. 그것은 적과 싸우는 게 아니고 조정과, 내부와 싸운 것입니다.

박인규 : 여기에는 김상헌이나 최명길 같은 고관대작도 나오지만 서날쇠나 뱃사공 같은 민초라고 할 수 있는 사람도 나오고, 마지막에 마무리를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셨어요.

김훈 : 그것은 서날새라는 사람은 대장장이죠. 이 사람은 연장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무기와 언어의 세계잖아요. 성 안은 언어의 세계고 성 밖은 무기의 세계인데, 이 서날쇠라는 사람은 언어와 무기 사이에서 연장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죠. 연장은 삶의 일상성을 상징하는 도구인 것이죠.

연장이라는 것은 생활을 일구는 도구이기 때문에 서날쇠는 다시 조정이 떠나간 빈 남한산성 안으로 돌아와서 자기의 일상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죠. 그것이 결국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치욕과 굴욕과 싸움, 전쟁, 말들의 난무, 그런 것들을 다 넘어서서 그 일상 속에서 영원히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거기다 써놓은 겁니다.

박인규 : 우리는 보통 병자호란을 인조가 삼전도에 가서 청나라 칸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 숙인 치욕의 역사로 기억하는데, 그런 장면들을 아주 어떻게 보면 냉정하게 치밀하게 그려내신 의도랄까요? 메시지 같은 건 결국 치욕이나 영광보다도 삶이 중요하다. 그렇게 정리가 되는 겁니까?

▲ ⓒ프레시안

김훈 :
그것이 단순한 치욕이 아니고, 인조는 그 치욕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날을 열어가는 것이죠. 새로운 삶을 지속시키고, 우리는 그때 정말 완전히 청의 속국이 됐어요. 다만 절을 했을 뿐 아니라 우리 주권의 거의 대부분을 포기한 겁니다. 항복문서를 쓰면서. 우리는 청 이외의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지 않기로 했고 청의 요구가 있으면 사실을 막론하고 해외파병을 하기로 약속했고 실제로 그 파병은 이뤄지죠.

외세의 강압에 의한 파병의 역사는 깊은 겁니다. 우리는 절대로 한반도 안에서 성을 쌓거나 성을 보수하는 군사시설을 만들지 않기로 했고, 그리고 그 이외 수많은 공물과 여자와 포로를 바치고 이런 조항으로 우리는 항복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인조가 항복한 다음에 속국이 된 겁니다 그야 말로. 군사, 외교, 정치적 주권을 포기한 거죠. 그리고 청에 대한 사대가 시작됐는데 그 사대는 200년 이상 지속됐어요. 구한 말 때까지. 청일전쟁에서 청이 지고 일본이 이기잖아요. 한 200년 후에.

그래서 동북아 패권이 청에서 일로 넘어갔죠. 그때까지 우리는 청에 대한 사대주의를 계속해 왔던 것이죠. 그러나 그게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고, 그렇게 굴욕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국토와 언어와 민족을 보존할 수 있었고 우리 나름의 삶을, 미래를 열어갈 수 있었던 거죠. 그 후에도 북벌정책 같은 것들이 나오고, 인조의 치욕은 그 안에 또 미래를 열어가는 힘이 있었던 거라고 저는 판단했던 겁니다.

박인규 : 많은 분들은 소설을 보면서, 나라의 운명을 쥔 고관들이 말싸움만 한다는 점에서 요즘도 그런 거 아니냐, 그런 생각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제 기억으론 예전에 칼의 노래를 읽고 선거에 나서시는 분들이,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가 있었지만 그거 가지고 이겨보겠다고 했을 때 김훈씨께서 그건 잘못된 비유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김훈 : 어이없는 것이죠. 12척으로 330척을 무찌른 것이 명량해전이잖아요. 지금 12척 갖고 나가면 백전백패 하는 겁니다. 그건 이순신이나 이기는 거지 아무나 12척 끌고 나가서 이기는 것이 아니고, 그런 어리석은 얘길 하면 안 되죠. 적이 330이 들어오면 12척 가지고 나갈 생각 하지 말고 한 200척이라도 끌고 나갈 생각을 해야 그것이 올바른 지도자인 것이지 12척 갖고 나가면서 날 따라오라고 하면 아무도 따라가지 않는 거예요 지금은.

박인규 : 요즘도 많은 정치가들이 민생을 얘기하고 뭘 얘기하면서도 뭔가 일반 민중들의 삶과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혹시 정치 하시는 분들을 보면 나름대로 어떤 느낌을 갖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김훈 : 정치인들은 삶의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의 삶의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고, 너무 이미지나 느낌을 가지고 정치를 하려는 거예요. 자기의 느낌. 인기가 떨어지고 지지도가 떨어지면 그 사람들이 시장에서 생선을 주무르고 다니잖아요. 시장 재래시장 좌판에 생선 들어올려 보이고 수많은 기자들이 따라와서 사진찍고 그러면 인기가 올라가고, 양로원 가서 절하고 돌아다니고.

그건 우리 국민에게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렇죠. 자기가 정치 리더면 양로원 가서 노인들한테 절을 할 필요가 없죠. 물론 그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 양로원이 잘 운영될 수 있게끔 제도와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 정치가들이지, 자기가 거기 가서 노인들한테 절 하면 이미지는 좋아지겠죠. 지지도가 올라가고. 그렇게 삶의 구체성을 결여하고 이미지나 감각에 의지해서 지지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아마 내 생각이 맞을 겁니다.

박인규 : 병자호란 같은 경우도 사실 나라를 이끈다는, 지도자라는 분들이 제대로 이끌지 못해서 졌다고 볼 수도 있는데. 이런 주문을 작가가 할 수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정치가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떤 면에 주목해서 읽어 줬으면 좋겠다. 그런 주문사항 같은 게 있을 수 있을까요?

김훈 : 그때 우리가 말하자면 열강에 짓밟힌 것이죠. 악에 의해서 짓밟힌 것인데, 지금 우리가 처한 시대나 우리의 미래도 그와 과히 다르진 않을 거예요. 우리를 둘러싼 열강들과 싸우면서, 그들과 더불어 함께 살 수밖에 없는 거죠. 그것은 병자호란의 시대나 지금 우리의 시대나 우리 앞날이나 똑같을 겁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저는 지도자들이 그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박인규 : 우리를 둘러싼 엄중한 현실을 정치가들이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이번에 쓰신 게 세 번째 역사소설인데 역사소설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이유가 있습니까?

김훈 : 특별히 관심있는 것은 아니고, 제가 쓴 세 편의 역사소설은 제가 오래 전부터 쓰고 싶었던 소설이죠. 이순신이 저의 군사적인 영웅이었다면 현의 노래에다가 제가 그린 우륵은 예술의 영웅인 거죠. 이번에 쓴 남한산성은 우리 역사의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암담하고 가장 절망적인 부분이죠. 거기에 대해서 써보려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으로서 저의 역사소설은 이제 끝이 나는 것 같습니다.

박인규 : 역사소설을 더 쓸 생각은 없으시고

김훈 : 더 쓸 생각은 없어요. 당대의 이야기를 써나가야겠죠 이제부터는.

박인규 : 어쨌든 이른바 지식이라는 사람들은 사회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들 말하는데, 그렇다면 작가로서, 지식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 지켜야 할 것, 추구해야 할 것이라든가..

김훈 : 지식인은 남을 이해할 수 있어야 되죠. 자기의 지식이 현실과의 관계에서 정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요즘 같은 담론의 틀 있잖아요. 난 이 세계를 추호도 설명할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어떤 이론의 틀보다는 있는 사람을 그대로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훈 : 그렇습니다. 진보는 진보주의자들의 이념의 일관성이 있잖아요. 전 그런 걸 참 하찮게 보는 것이죠.

박인규 : 역사소설을 더 이상 안 쓰신다고 하셨는데, 저는 사실 남한산성을 보면서 우리 민족의 치욕, 치욕.. 하지만 병자호란보다 한일합방이 더 큰 치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혹시 한일합방 당시, 예를 들면 을사오적이라든가 이런 분들을 김훈의 시선으로 쓰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봤는데, 혹시 그쪽을 써보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가요?

▲ ⓒ프레시안

김훈 :
을사오적은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이죠. 인조는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 아니에요. 병자호란 이후에는 나라 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끔찍한 재앙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것이죠. 전혀 다른 겁니다. 완전히 반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한 것의 모든 책임이 을사오적에게 있는 건 절대 아닙니다. 을사오적을 때려잡아서 우리가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어리석은 인간들이죠. 그 시대에 나라가 망한 것은 그 나라 전체의 책임인 거죠. 을사오적이 물론 그 전후에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들을 때려잡고 그들의 재산을 환수한다고 해서 그 과거가 바로잡혀지는 건 아닐 겁니다.

박인규 : 혹시 그런, 아직 사실은 일제 청산의 문제가 많은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댁해서는 소설화하고 싶으신 생각은 없나요?

김훈 : 나는 그걸 소설로 쓰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나는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는 그만 언급하려고 해요.

박인규 : 아까 당대를 쓰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실지 말씀해 주시죠.

김훈 : 막연한 계획밖에는 없는데 내가 기자생활을 오래 하면서 많은 당대의 모습을 봤어요. 우리 시대의 좌절이라는 것은 한 30년 전에 무너졌던 그 자리에서 또 무너지고 있어요. 좀 더 앞에 나가서 쓰러지는 게 아니고 다른 자리에 가서 쓰러지는 것도 아니고 바로 그 자리에 가서, 30년 동안 계속 같은 자리에서 쓰러지고 있는 겁니다. 지금 교육의 문제도, 사교육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잖아요. 이것은 30년 전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이미 거대하게 제기됐던 문제에요.

박 대통령 때부터 이게 커다란 사회문제가 됐죠. 그런데 30년이 그로부터 지났는데도 아무런 해결이 없어요. 그대로 유지된 거죠 그 문제가. 인간의 이성의 힘으로 그걸 해결하지 못하고 30년 동안 계속 같은 자리에 쓰러지는 겁니다. 노사의 문제도 그런 거잖아요. 30년 전에 제기됐던 모든 문제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죠.

박인규 : 그렇다면 앞으로 그런 문제, 왜 우리는 우리 문제를 계속 실패하고 있는가에 대한 걸.

김훈 : 그러나 우리가 성취한 것도 있을 거예요. 우리가 성취한 것 많죠. 우리는 어쨌든 형식적 민주주의를 달성한 거잖아요. 그런 것들은 우리가 성취한 것이죠. 그런 나의 시대의 거듭된 좌절이나 성취, 그 사회 틈바구니에서 사람들이 이리저리 밟히고 채이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써보고 싶은데, 이것은 나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걸 쓰는 것이 참 두렵고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어떤지를 잘 모르겠어요.

박인규 : 하여튼 저희들도 한번 기대해 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마 김훈씨가 말씀하신 그런 답답함. 우리는 왜 똑같은, 뭔가 된 것 같으면서 다시 쓰러지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오늘 말씀 감사하구요. 앞으로 새로운 작품 기대해 보겠습니다.

김훈 : 고맙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소설가 김훈씨와 함께 신작 '남한산성'에 대해 말씀 나눴습니다. 작가 김훈씨의 말씀은 내일도 이어집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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