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언론인들은 '우리의' 이익에 부합하느냐에 따라 인류를 바라보기 쉽다. 선한 독재와 악한 독재를, 가치 있는 희생자와 가치 없는 희생자를 정하는 정부의 시책에 따라 반대 의견이 옳을지라도 '우리의' 정책을 언제나 선량한 것으로 포장하기도 쉽다. 모름지기 언론인이란 제일 먼저 자신이 속한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써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필저는 또한 언론인이란 공공의 기억을 지키는 수호신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란 바로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란 밀란 쿤데라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지금껏 55편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온 그가 처음으로 극장용 영화를 만들었다.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위협에 저항하며 남미의 '보통 사람'들이 벌이고 있는 새로운 대중운동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민주주의에 대한 전쟁(The War on Democracy)>이 그것이다. 이 영화는 오는 11일 영국에서 시사회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영국에서의 정식 개봉은 6월 15일로 잡혔으며 호주에서는 오는 9월 개봉된다. 영화 제작을 위해 필저는 수 주간 베네수엘라에 머물렀으며 영화에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독점 인터뷰도 담겨 있다.
다음은 베네수엘라 인터넷 매체인 <베네수엘란어낼리시스(Venezuelananalysis.com)>에 2일 게재된 인터뷰를 전문 번역한 것이다. 인터뷰를 한 파블로 나바레테는 이 매체에 정기적으로 투고하는 프리랜스 기자다.
파블로 나바레테(이하 파블로): 새 영화 <민주주의에 대한 전쟁>에 대한 설명부터 해 주시겠어요?
존 필저(이하 필저): 나는 우연히 조지 부시의 두 번째 취임 연설을 보게 됐습니다. 부시는 "전 세계에 민주주의를 가져다주겠다"고 맹세했었죠.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말을 21번 하더군요. 그것은 매우 중요한 연설이었습니다. 현란한 수사법을 구사했던 전직 대통령들과 달리, 로널드 레이건은 좀 예외였지만, 그는 "민주주의"와 "자유"란 말의 본의가 지닌 고귀한 개념을 박탈해 온 대통령임에 틀림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위선적인 진실'을 조명해 보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미국인들의 지성과 도덕을 왜곡해 프로파간다를 만들어 놓고 그 뒤에서 이른바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 온 미국의 위선 말이죠. 이 인터뷰를 읽는 많은 독자들이 이미 아시는 바일 겁니다. 그러나 서구의 어떤 다른 이들은 미 행정부의 야망을 덧씌운 프로파간다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의 뿌리는 제2차 세계대전은 '좋은 전쟁'이었으며 냉전에 대한 '승리'라는 끊임없는 자축연에 닿아 있습니다. 이들은 미국의 권력이 다른 나라에 선행을 베풀었고 그것은 곧 '우리의 선행'이라고 여깁니다. 그나마 부시와 그 패거리들, 그리고 블레어 덕분에 수백만 명이 흐린 눈을 바로 뜨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민주주의에 대한 전쟁>을 통해 이들을 각성시키는 데 한 몫 하고 싶었습니다.
내 영화는 제국의 힘과 국민의 힘에 관한 것입니다.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 칠레, 미국, 과테말라, 니카라과 등을 돌아다니며 찍었습니다. 영화는 '미국의 뒷마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미국이 남미 전체를 멸시하며 부르는 이름이죠. 영화는 처음에는 스페인 제국에, 그 다음에는 낡은 엘리트주의로 재무장한 유럽 이민자들에 맞서 온 남미 원주민들의 투쟁 과정을 추적합니다. 특히 고산지대에 오두막을 짓고 중력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그러나 대륙인들에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한 지역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아주 긍정적인 이야기가 포함돼 있습니다. 제국주의 지도자에게 맞서고 국가의 재산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겠노라 약속한 대중사회운동이 정부 권력까지 잡은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선두는 베네수엘라입니다. 그리고 우고 차베스 대통령과의 흔치않은 대면 인터뷰가 영화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겠죠. 차베스 대통령이 스스로 발전시킨 정치의식과 역사의식은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유머도 있는 사람이더군요.)
영화는 차베스 정권을 뒤집기 위한 쿠데타가 일어난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동시대적인 맥락 아래에서 사건을 조사합니다. 영화는 또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차이와 차베스가 처음으로 당선된 이래 정치경제상 일어난 변화를 보여줍니다. 볼리비아에서는 자원 수탈에 맞서 싸운 평범한 사람들의 괄목할 만한 얘기를 담았고, 칠레에서는 번창한 민주주의 혹은 현대화의 모델이란 가면 뒤에서 활동하는 살아 있는 귀신들을 담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이 '뒷마당'을 주도했던 이들의 목소리가 또 다른 '뒷마당'인 이라크에서 반복되는 상황이 벌이지고 있습니다.
동료 감독인 크리스 마틴과 나는 <민주주의에 대한 전쟁>이 시기를 잘 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 영화를 봐 주길 기대합니다. 베네수엘라에서 베트남까지, 또 팔레스타인에서 과테말라까지 펼쳐진 민주주의에 대한 넓은 의미에서의 전쟁과 보통 사람들의 광대한 투쟁을 이해하는 은유로 여겨주길 바랍니다.
파블로: 말씀하셨듯이 흔히 남미를 미국의 '뒷마당'이라고 표현합니다. 세계적 관점에서 미국에게 남미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필저: 종종 남미의 전략적 중요성은 깨끗이 잊히고 맙니다.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레그 그란딘의 최근 역사서를 읽어보세요. 이번 영화에도 그의 인터뷰가 나옵니다만, 이 책은 미국이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충동을 보상받고 연마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남미를 '실험실(work shop)'로 활용해 온 사례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자면,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퇴각한 뒤 미국의 '민주주의 건설자들'은 어디로 가서 자신들의 비전을 주창했습니까. 남미입니다. 그 결과는 니카라과와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등지에서 무시무시한 공격과 '콘도르 작전'이란 이름의 반체제 인사 제거 작전으로 나타났죠. 이것이 바론 로널드 레이건 식의 '테러와의 전쟁'입니다. 여기서 얻은 기본적인 훈련은 지금도 중동 등지에서 부시와 체니가 벌이고 있는 '긴 전쟁(long war)'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파블로: 노암 촘스키는 유럽이 침략한 지 5세기가 지나서야 남미가 독립을 주장했다는 말을 최근에 했는데,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필저: 네, 그렇습니다. 그들의 손에 목숨이 달린 가난한 이들을 목격하기 위해 화려한 유럽에서 온 일부는 남미 사람들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What can I do?)"란 질문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볼리비아의 코차밤바란 도시에서는 주민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물에 대한 권리를 얻을 때까지 도시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버텼습니다. 남미 대륙에서 아마 가장 가난한 도시일 엘 알토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남미가 완전한 독립을 쟁취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여전히 많은 부분 신자유주의적입니다. 풀뿌리 민주주의, 건강보험, 교육, 그리고 삶의 질의 급격한 향상 등 차베스가 만들어 낸 변화는 특별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등, 사회적 정의, 부패로부터의 자유 등은 아직 먼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경제력에 의존한 권력이 사라진 데 대한 베네수엘라 부자들의 불만은 끝이 없습니다. 경제성장률이 높아진 것도, 사업이 더 잘 되는 것도 아닙니다. 더 이상 정부는 부자의 것이 아닙니다. 경제가 국민 다수의 것이 됐을 때 진정한 독립이 눈앞에 보일 것입니다. 이는 어디서나 통하는 진실입니다.
파블로: 존 네그로폰테 미 국무부 차관은 최근 차베스 대통령을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칭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필저: 그야말로 '오웰리언의 말'이죠. "전쟁이 곧 평화"라고 말하는 식이예요. 네그로폰테는 중미에서 자행한 워싱턴의 테러를 감독한 경력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그 사람의 관점에선 맞는 말입니다. 차베스는 미국 정부로부터의 독립이 실제로도 가능하다는 예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위협적이죠.
파블로: 차베스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에 21세기형 사회주의를 세우겠다고 얘기합니다. 20세기 사회주의자들의 실험과 차베스의 프로젝트가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필저: 차베스와 함께 있는 시간 동안 그가 자신의 발전된 정치적 의식을 내보이면서도 전혀 우쭐되지 않는 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지도자로서의 그의 면모 못지않게 교육자로서의 면모에도 관심을 갖고 그를 관찰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이 식수 문제를 논의하러 모인 학교에 그는 책을 한 아름 들고 나타났습니다. 오웰, 촘스키, 디킨스, 빅토르 휴고 같은 책 구절을 인용하고 청중들의 상황과 결부시켜 설명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보통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신감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자신감과 권력 행사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고 있었습니다.
1998년 그가 처음 정권을 잡았을 때에 그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점이 그의 정치역정을 더욱 흥미롭게 하는 것이죠. 확실한 것은 그는 항상 가난한 민초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개혁주의자였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오늘날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사회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노동당 애틀리 정권 시절 영국 경제와 닮은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차베스는 다른 유럽인들이 자신을 '사민주의자'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할 것입니다.
차베스가 하는 일에 딱지를 붙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아시겠죠? 그는 그 자체로 원형이고 스스로 영감을 불어넣는 사람입니다.
볼리비아의 코차밤바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눈을 돌려보세요. 변화를 견딜 수 있는 권력만이 풀뿌리부터 떠받쳐지는 진정한 권력입니다. 차베스의 힘은 그가 보통 사람들에게 부패한 낡은 체제에서도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준 데에서 비롯됐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귀찮은 일로 여기는 영국에서는 이런 정신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차베스는 적어도 '희망적인 교훈'이란 얘기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