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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한국정치, 그 돌파구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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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2007년 한국정치, 그 돌파구 어디에 있는가?

[기고] '희생적 戰意' 없는 정치는 '권력의 不毛地'

1. 지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한국정치 발전의 새로운 분수령이 될 것인지의 여부를 가늠하는 2007년 대선을 앞둔, 그 중반의 시기는 지금 어떤 일들을 목격하고 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정파적 자구책을 위한 책략"은 난무하나 "나라의 앞날을 위한 진정한 전투"가 없고, 권력에 대한 욕구는 있으나 역사를 마주한 고뇌와 이를 감당할 열정적 의지는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그로써 누가 역사발전의 현 단계에서 최대의 장애로 떠오르고 있는지에 대한 명쾌한 인식이 부재하고, 피아의 구별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상대적 소수파인 진보진영이 어떻게 힘을 모아나갈 것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권력에 대한 비난은 왕성한 듯 하나 정작 맹렬한 전의를 가진 전투력 높은 정치세력은 조직화되어 있지 않다. 국민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싸우려는 이가 보이지 않고, 정치 공학적 계산은 열심히 하지만 자칫 마주치게 될지 모를 패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압도하는 탓인지 희생적 선택을 하는 위대함은 한국정치에서 사라지고 있다. 정치는 졸렬해지고 있으며, 정치인들은 최고 권력자에서부터 거의 모두가 조무래기처럼 되어가고 있다.

책략이라는 정치공학은 무성하나, 역사를 건 전투는 없다

현실정치에서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는 감동은 세상 물정 모르는 낭만주의로 폄하당하고 있으며, 제각기들 밥숟가락은 몰래 들고 있으나 불을 때기 위해 산에 올라가 장작을 패려는 자는 없거나 적다. 국민을 위해서라면 때로 수모를 각오하고 일전을 불사하기보다는, 남들이 마련해놓은 자리에 꽃가마 타고 가려는 이만 그득한 모양새다. 진흙탕 속에 들어가 연꽃을 피우려 하기 보다는, 연등제 행사에서 앞자리를 차지하려는 이전투구(泥田鬪狗)만이 계속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로써 국민들은 이 나라가 과연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워하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전망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면서 국가적 운명을 함께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정치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주면서 국민들을 열광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어떠한 가치를 가진 대안들이 서로 대립, 경쟁하고 있는지조차 질서 있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치는 지금 길에 버려진 돌이 되었다. 모두가 길에 버린 돌이 미래의 집을 짓는 모퉁이 돌이 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을 것인가?

기이하게도 임기 말의 권력누수현상에 처할 것으로들 예상했던 노무현 정권과 그 휘하의 세력이 가장 일사분란하게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반면, 이와 대치하는 여러 세력들은 도리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분열이 가속화하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연대의 가능성을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민주/진보세력마저 공동전선형성에 전략적 투지를 결집시키지 못하고 있다.

5년 전 노무현 정권 창출 당시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1)특권체제의 타파와 서민을 위한 정치경제적 개혁, (2)남북간 민족문제의 주도적 해결의지 구현, (3) 대미관계의 자주적 입지 확보는 이제 모두 허물어지고 역전(逆轉)사태가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이는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열세로 인해 불가피하게 강요된 상황의 산물이 아니라 스스로가 이들 과제의 주체적 실현과는 전혀 반대방향의 자세와 정책을 취해 온 결과다.

더더군다나 노무현 정권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 이후의 지원군 파견에 이어 한-미 FTA체결이라는 신자유주의체제의 전면적 구현의지를 내세움으로써, 한국정치와 경제, 그리고 세계적 입지에 후퇴를 가져왔고, 자신과 그 세력은 철저하게 기득권 세력화 되었다. 노무현 정권은 오늘의 한국정치 발전에 중대하고도 심각한 장애물이 된 것이다. 이 장애와 정면으로 마주하여 치열한 전투력을 과감하게 발휘하지 않고서 한국정치의 발전을 이루어낼 길은 없다.

노무현 정권, 한국정치발전의 장애물

한나라당에 집결한 보수 세력의 역사적 퇴행성이 엄존하고 있음에도 이들과 대연정을 기획한 바 있던 노무현 정권의 구조적 본성은, 이제 한국정치의 진보적 발전을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바가 되었다. 여기서 노무현 정권의 구조적 본성이라 함은, 특권체제를 포함하는 기득권 질서의 엄호에 권력을 행사하는 현실을 일컬음이다. 특히 한-미 FTA의 협상과 체결과정에서 반대세력의 눈과 귀를 막고 목소리는 죽이며 손과 발은 묶어놓고 자신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강요한 끝에 목적하는 바를 성사시킨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행위는 철학적으로 독선적이고 행태적으로 야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다소간의 지지도 상승은 그 독선과 야비함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도 이는 한국 민주주의에 중대한 위협이다. 이것이 아무런 대대적인 문제제기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지 않고 그대로 기성질서로 인정되고 만다면 한-미 FTA 사안 자체에서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집권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를 교정할 수 있는 기초를 세우지 못하게 된다.

한국정치에 있어서 지금 민주적 발전의 역사적 지향점은 노무현 정권의 성과에 기초하여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다기보다는, 한편으로는 노무현 정권과의 치열한 접전을 통해 이를 청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한나라당에 대한 대안세력으로서 진보적 역량을 조직화하는 것에서 분명해질 수 있게 되었다.

민주/진보진영으로서는 냉전수구의 잔재와 신자유주의체제를 적극 지지하는 세력이 결집된 한나라당과의 일대 회전(會戰)이란 조만간 예정되어 있다. 한나라당의 대선정치와 맞대결하기 그 이전에, 오늘의 정치를 주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노무현 정권과의 정면승부를 통과하면서 미래 세력의 집결이 국민적 지지를 통해 도모되지 않는 한, 한국정치의 발전은 본질적으로 제약되고 말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황이 분명함에도 우리는 현재 민주/진보진영 내에서 "희생적 전의를 가진 정치"를 보지 못하고 있으며 오만과 독선에 기초한 전투력을 과시하는 노무현 정치에 의해 사태는 장악되고 있다는 점이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자기선택에 확신을 가진 전의가 없는 민주/진보진영에 대한 대통령 노무현의 조롱에 대해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 자신에게 뼈를 깎는 반성과 결연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노무현식 정치는 과거사가 아니며, 현재 진행형이자 미래를 가로막는 정치적 암이다. 이를 철저하게 제거하지 않는 한, 한국정치는 바른 방향을 잡지 못할 것이며 한나라당으로의 집권을 막고 새로운 미래적 대안으로 국민들의 희망을 결집시키는 일은 날로 불가능해져만 갈 것이다. 본래의 출발점을 배신적으로 이탈하고, 국민적 기만을 통해 철저하게 기득권 세력이 된 정치권력과 정치집단에 대한 심판적 성격을 갖는 정면승부를 피하는 것으로서 어떤 대안적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어디에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날카롭게 파악하지 못하는 정치에서 새로운 미래는 태어날 수 없다. 노무현 정치는 엄연히 청산대상이며, 한나라당의 집권은 그 근본적 청산을 어렵게 만드는 사태다. 노무현 정치와 한나라당의 국가의지에 있어서 우리는 차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노무현 정권 스스로가 이미 자인한 바가 아니던가? 이들은 머리는 두개이며 몸은 하나인 샴쌍둥이가 되고 말았다. 둘 사이의 다툼은 기득권 질서라는 몸에 대해 누가 주도권을 가진 머리가 되느냐의, 한 통속 정파 싸움에 불과하다.

2. 4.25 재보선 결과에 대한 몇 가지 시선

우선 오늘의 일차적 논제가 되는 지난 4.25 재보선에 대한 분석과 평가도 복잡할 이유가 없다. 어떤 지역이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지지를 보냈는가, 누구에게 승리와 패배를 어느 정도로 안겨다 주었는가 하는 식의 분석은 이번 선거의 참여정도를 전제하지 않는 아전인수가 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30퍼센트도 되지 않는 투표율 자체가 기존 정치권에게 보낸 민심의 성적표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각 당과 정치세력이 선거결과에 대한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이고 있으나, "어느 누구도 국민들의 기대를 압축시킨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고서는 향후의 정치적 돌파구를 제대로 모색하는 것은 어렵게 보인다. 상대의 패착으로 반사이익을 얻거나, 기존의 지지기반에만 몰두하는 방식으로는 대선정국의 강력한 회오리바람에서 미래 세력으로 살아남는 것은 아마도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래도 각 정당으로서는 이번 선거의 의미나 여파는 어떨 것인지 간략하게 살펴보는 일도 무의미하지 않다. 이번 선거가 각 정치세력으로서는 대선에 앞선 중간점검의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재보선 승리에 대한 강한 기대를 가지고 있던 한나라당의 경우에는 선거패배 책임공방이 도화선이 되면서 경선의 방식 논쟁이 재점화되는 가운데 이명박-박근혜 양 진영의 갈등과 격돌이 진화되기 어려운 위기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는 이번 재보선 결과가 아니더라도 한나라당의 당권 구조와 후보 간의 경쟁을 넘어서는 적대적 관계로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상황이다. 혹여 선거승리가 있었다 해도 그로써 한나라당의 내부 분열이 완화될 것으로 전망할 수 없었다. 그 경우, 선거승리 요인에 대한 공헌도를 둘러싸고 양 진영은 세력 싸움에 기력을 쏟아나갔을 것을 상상하는 일은 별반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나라당의 착각, 그리고 열린우리당의 사당화(私黨化)

"한나라당의 경선이 곧 본선"이라는 공식에 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적 논쟁을 통해 당의 진로와 국가의 방향을 연결시키는 노력은 이미 관건이 되지 못한다. 이 고비만 넘으면 손에 넣을 것 같이 여겨지는 권력에 대한 맹렬한 정파적 경쟁은 있으나, 국가 차원의 전망을 놓고 깊은 고민의 실체를 드러내 보이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이번 재보선과 당내 후보 간 갈등의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세력으로서는 여권의 후보 공백 내지 상대적 열세의 상태에서 대안적 실체를 자임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내용에 있어서는 대안적 전망을 제출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를 자기 자신이 폭로하고 있는 셈이다.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도 승세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염증의 결과와, 민주/진보세력의 정치적 분해과정의 산물일 뿐 독자적 자산이라고 주장하기에는 거리가 있다.

한편 한때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의 경우, 이번 선거에서 그 존재는 정치적으로 실종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선거연합을 통한 간접승리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이미 독자적 지지기반의 상실에 대한 비극적 자인에 불과하며, 자기생존을 위한 "정치적 아부"가 되어버린 격이다. 노무현 정권 수립 직후 민주당을 지역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분당을 통해 창당의 명분을 세웠던 열린우리당으로서는 4.25 재보선과정에서 민주당과의 선거연합 운운으로 자기존립의 근거를 스스로 부정했고, 정치적 부담으로 인식된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이라는 조건도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독자적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 정당의 미래는 공중분해, 약화 내지는 자연소멸 가운데 하나가 될 터인데, 이미 국민적 지지를 대부분 잃어버린 친노 세력을 중심으로 한 열린우리당 사수파가 이러한 현실에서 어떤 전략적 생존력을 보일 수 있을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결국, 탈당했으나 영향력 발휘를 고수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력에 의존하는 당으로서 잔존한다고 해도, 창당 이후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권력의 사당적(私黨的) 존재"를 넘어서기가 어렵게 되어갈 것이다.

민주당은 그렇다면 어떤가?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서 일정한 승리를 거둠으로서 소수당의 비애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확보했으며 향후 통합과정에서 중대한 주도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런 면모가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민주당은 자신의 지지기반에 개혁적 요구를 가세시키는 방식이 아닌 지역주의 정치로의 회귀 조짐을 보임으로써 퇴행적 정치문화의 양상을 드러냈다. 이는 민주당의 앞날을 위해 매우 불길한 대목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지역주의 선거를 차선 내지 차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유권자의 본질적 고뇌와 갈망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민주당은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한 비판적 평가의 교훈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만들어내는 일에 성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에 더하여,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족 문제에 대한 역사적 기여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태적인 정치력 행사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엄존하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행동반경을 스스로 좁히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국민중심당의 경우, 애초부터 지역주의 정당의 성격을 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 결과를 자신의 지역주의 정치의 자산으로 적극화하려는 모습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국민 중심당이 미래 세력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대한 장애가 되어갈 것이며, 새로운 정치의 구심점이 생겨나면 언제든 분해당하는 운명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별한 정치적 전망이나 국가적 구상이 돋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국중당의 정치적 장래는 불투명하고 불안정하다.

여기까지 보면, 한나라당과 이에 대치하는 열린우리당, 민주당, 국민중심당 등은 지역적으로는 동서 분할의 정치적 경계선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를 놓고 정치공학적 계산에 몰두하고 있다. 서부벨트 운운이나 영남권 기반 등의 논리는 결국 전국정당으로서의 입지보다는 지역주의 체제로 승부를 걸겠다는 자세일 뿐이다. 또한 국민들을 정치공학의 조작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희생적 전투력 없이 권력창출 없다

이에 반해, 지역주의 정치를 넘어선 정책 대안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의 경우 두 자리 지지율 증가로 지지기반의 일정한 성장을 이번 재/보선에서 확인했다는 자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선 국면에서 집권가능 세력이라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했다고는 할 수 없다. 민주노동당은 세 명의 대선 후보경선 체제로 들어서고 있으나 대중들의 관심권에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사각지대에 있으며, 대선정국에 중대관건이 될 만한 영향력 발휘에는 역부족인 상태이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민주노동당이 대중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를 놓고 대대적으로 내부 논쟁과 방향 전환이 없고서는 경직된 지지 기반으로 규정 될 계급정당의 한계를 돌파하는 일에 있어서, 난관에 직면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총괄하자면, 여러 정당과 정파가 이번 선거에서 각기 나름의 승리와 손실을 맛보았으나 4.25 재보선의 과정에서 부상당하지 않은 유일한 세력은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강력한 친위 집단이다. 이들은 이미 참여정부 평가단을 조직하고 출범했으며, 대선후보 가능 인물에 대한 조준과 견제, 그리고 자파 지지 후보를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추진에 강력한 기세로 시동을 걸었다. 그 방식이 결국에는 성공하지는 못하겠지만, 이에 대한 대응을 제대로 못하면 민주/진보진영은 일정기간 전선의 혼란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따라서 이제 민주/진보진영은 노무현 정권과 그 휘하의 재집권 전략에 동조하면서 한나라당 집권을 저지할 것인지, 아니면 독자적 연대의 틀을 기반으로 하여 노무현 세력과 한나라당 세력을 포함한 두 전선에서 접전을 벌여야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이 판단을 두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민주/진보진영의 결집 동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어느 쪽으로든 흡수되어가거나 소수파로 남아 정치적으로는 큰 의미 없는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애매함과 확실함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당연히 확실함 쪽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희생적 전투력 없는 정치에서 미래를 위한 권력은 태어나지 못한다."지역을 엮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절박한 갈망이 담겨지는 용기 있는 정치에서 미래의 구심점은 당연하게 이루어진다. 정치공학적 연대가 먼저가 아니라, 국민의 삶을 진실하게 담아내는 정치적 투지가 연대를 가능한 현실로 이루어낸다.

3. 왜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노무현 정권이 개혁과 진보적 선택을 꾸준히 하고 그로써 한국정치의 발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데 일조했다면 우리는 현재 이러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열린우리당은 한국정치 발전에 중대한 진지가 되어 이를 사수하려는 민주세력의 광범위한 집결지가 됨으로써, 이번 대선 정국의 한 판은 모든 민주/진보진영의 결속 아래, 특히 1960년대 이후 이 나라를 주도해 왔던 일체의 기득권 정치세력의 극복에 종지부를 찍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과 그 휘하집단은 물론이고 열린 우리당은 자신의 역사적 책임을 방기했고, 이번 대선이 지난 시기의 민주투쟁의 성과의 기초 위에서 벌이는 유리한 정치적 전투가 되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민노당은 아직 여러 가지로 역부족인 처지에 있으며,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그리고 최근 탈당한 세력 내부에서는 이 전투를 최일선에 나서서 힘차게 감당할 만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왜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기득권 질서가 되었고, 열린우리당은 권력에 의해 사육당한 정치집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역사에 대한 전망과 투지는 이 과정에서 하나씩 거세되었고, 역사에 대한 책임은 사고하지 않는 최고 권력자의 집요한 개인적 권력의지만 남았으며 이러한 권력의지에 의해 길들여진 정치집단의 정치력은 자생력을 잃어버린 채 무력화되어가고 말았다.

열린우리당, 권력으로 사육당한 집단 되다

잘못된 권력의지에 제동을 거는 일은 그로써 열린우리당의 정치에서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최고 권력과의 정면승부를 통한 정치지도자의 등장도 우리는 목격하지 못했다. 탈당했거나 탈당을 구상하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지도부 인사들이 보였던 과거의 처신은 싸워야 할 때 피했고 기껏 싸워도 싸움 갈지 않게 싸우고 말았다. 그러한 상대를 야유하고 조롱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그 자체로서 유치하고 비열한 것이었던 동시에, 그런 조롱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된 처지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체제 외부에서 기득권 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진력했던 세력이 그 자신이 체제의 수혜자가 되는 과정에서 "희생적 전투력의 의지"를 상실해버리고 만 결과였고, 체제의 기득권 수호에 가담해버렸던 전력이 이후의 정치적 결단에 장애가 된 적나라한 현실 자체가 바로 지금 열린우리당 과거 지도부 일부 인사들이 직면한 진상이다.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이 대중들의 집중적인 관심대상이 되었던 이유는 체제 외부에서 거세되지 않은 정치적 전망과 의지를 가졌다고 보였던 덕택이었으며, 오늘날 정치권 밖에서 대선후보를 찾으려는 경향 역시 기존 체제 타파적 정치력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가 존속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걸 제대로 보지 못하면 민주/진보진영의 정치세력은 실제로는 보수화인 중도의 이름 아래 대중들의 기대로부터 이탈하고, 정치적으로 와해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재차 강조하건대, 열린우리당의 몰락은 그 전투력을 스스로 소멸시킨 때문이요,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후퇴는 기득권 질서에 결합하거나 그 자신이 곧 기득권이 되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치가 지금 현실에서 주도권을 나름대로 발휘하는 까닭은 그것이 미래적 전망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기존체제의 권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노무현 권력은 내적으로는 이미 한나라당의 구조적 기반과 일치된 지점에 이르지 않았는가?

따라서 현상타파적인 대안세력으로서의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자기변혁이 없고서는 민주/진보진영의 정치적 미래는 확보되지 못한다.

오늘의 현실에서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던 1987년의 격동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군사주의의 청산이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고강도의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의 분출이었고, 그로써 군사주의 체제의 와해는 곧 민주화의 실현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믿은 시기의 산물이었다.

이는 또한 큰 맥락에서는 다가오는 세계적 냉전체제의 종식을 예고하는 사건이기도 했으며, 이를 뛰어넘는 역사적 진로에 대한 선택을 예비해야 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의 민주화 운동은 군사주의의 정치적 억압을 소멸시키는 것으로 만족해버리고, 주요 동력은 전선에서 퇴각해버리고 말았다. 직선제를 허용하는 "6.29선언"이 나오면서, 미국의 지배전략과 저항운동의 타협점이 마련되자 일단 성과를 이루었다는 평가와 함께 운동의 동력이 상당부분 해체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중 또는 시민사회 내부에서 세력으로서의 일정한 해체였지 권력의 차원에서는 존재의 조건을 달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이후 민주화 운동은 군사주의가 청산된 새로운 체제에 편입되는 것으로서 자신의 정치사회적 역할을 완결 지을 수 있다고 여겼으며, 그 결과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민주화 운동의 동력 대부분은 체제의 권력질서와 결합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 결과가, 기존의 정치적 전투력을 강화하고 역사의 미래적 대안에 대한 투지를 보다 풍부하게 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권력과 기득권 질서에 순치(馴致)되고 말았다.

민주화운동 세력, 체제 기득권에 편입된 후 역사적 투지 거세돼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특히 1960년에서 1980년대, 20여 년 간 한국사회를 지배해 온 군사주의 정치의 정치경제적 기반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빈곤했는가를 목격하게 되며, 보다 심층적인 과제를 포기해버린 민주화 운동의 전선이 어떻게 허물어지고 말았는지를 경험하게 된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그 다음 과제는 한국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에서 축적되어 온 모순과 그 모순의 현실적 양상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의 지배체제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로 모아졌어야 했다. 그러나 1987년 중후반기의 노동운동은 민주화 운동의 주도세력으로부터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세계적 냉전해체와 더불어 닥친 사회주의권 몰락의 충격 속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정치경제적 논의의 중심은 흔들리고 말았다.

그러한 결과, 자본의 직접 지배전략인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질서 속에 한국사회는 급속하게 빨려 들어갔으며 이에 대한 저항과 대안제출에 무능력했던 진보세력은 10년 뒤인 1997년 금융위기의 과정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게 되고 말았다.

1997년의 금융위기 상황은 1987년 이후 주도권이 교체된 신자유주의 세력의 한국경제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의 결과였으나, 이른바 거대담론에 대한 거부감과 진보적 정치경제학의 효용성에 대한 이념적 회의에 사로잡힌 대부분의 진보세력은 IMF 관리체제의 문제를 꿰뚫어 보면서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진보세력이, 민주화 운동의 다음 과제를 망각하지 않고 1970년대 중후반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자본에 의한 지배전략으로 어떠한 사태가 벌어졌는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연구하기만 했었더라도 우리의 1997년 대응전략은 다소간 달라졌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체제 심화가 진행되고 있는데도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속수무책이었으며 이 문제가 한국사회의 선택에 어떤 제약을 가하게 될 것인지 심도 있게 논쟁하지 않았다.

절차적 민주화의 완결이라는 개념에 묶인 민주화 운동의 체제내화가 이루어져가면서 정치경제적 기본 모순에 대한 운동은 외곽지대로 몰렸고, 김대중 정권 당시 한국사회는 보다 깊게 신자유주의 체제로 편입되어갔다. 오늘날 노무현 정권의 한-미 FTA 체결과정은 노무현 정권의 개별적 선택을 포괄하는 동시에 이러한 경로의 논리적 귀결점이기도 하다.

기득권 버리지 않으면 정치에 감동 없다

결국, 한국 민주화 운동은 의회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의 정치적 완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의 대안에 대한 고민을 깊게 밀고 나가지 못함으로써 한-미 FTA 반대 투쟁에 있어서도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현재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진보세력이 이 사회에 제출해야 할 새로운 사회의 대안에 대한 논쟁이 풍부하지 못하고 깊지 못한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현재는 의회주의 체제 자체도 위기에 처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저항운동의 강도를 제대로 높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열린우리당이 최근 각종 개혁관련법안에서 권력의 명령 아래 퇴각해버리고 있는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 6.15 관련 특검 저지의 실패와 이라크 파병 저지 실패 등 일련의 사태, 그 연장선에 있는 현실이다.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있어서도 이것이 미국의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과 한-미 FTA체제라는 종속적 편입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한반도 전체가 미국의 장력에 휘말려 들어가게 되는 구조적 장치를 보지 못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가령, 노무현 정권의 정상회담 기획은 민주/진보진영이 아무런 비판적 검토 없이 환영할 일이 아니다.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속성과 그간의 역사적 행로를 기초로 해 볼 때 남북문제의 해결자세는 민족적 숙원과 자주적 입지를 우선하기 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선택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최대한 경계해야 할 바이며 예상되는 평화체제의 정치경제적 성격에도 중대한 문제제기와 논쟁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민주/진보진영은 남북문제의 평화체제 논쟁의 국면에서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기획력에 그대로 장악되고 말 것이다.

기존 질서에 흡수, 순치 되어 권력에 의해 조정되는 세력과, 새로운 대안세력으로 역사적 투지를 가진 세력의 대결에서 1987년 이후 대중들은 후자에게 지속적으로 권력의 기회를 주었다. 얼핏 여론의 지층구조상 보수적이라고 여겨지는 한국의 대중들이 가진 정치적 기대는 그렇게 해서 사실상은 내용적으로 진보의 방향을 갖고 충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중들은 권력이 상상하듯 그렇게 쉽게 현상유지에 만족해버리지 않는다. 물론, 이번의 경우, 이른바 "유연한 진보"를 앞세운 노무현 정권의 기만적 정치행태로 인해 그 책임을 덮어쓰게 된 형국에 처한 민주/진보세력의 위기는 더욱 가중되었다. 하지만 모든 기득권을 손에서 놓고 오로지 국민들을 위해 양심과 용기를 가지고 나서는 정치인과 정치세력에게 역사는 냉혹하지 않다.

4. 어떻게 하면 되는가?

기본적으로 이번 대선정국은 기만과 진정성의 싸움이다. 정치 공학적 책략과 진실한 용기 사이의 투쟁이다. 독점적 권력과 탐욕스러운 거대자본에 대해, 서민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나서는 역사적 접전이며, 이기적 권력의지로 꽉 찬 오만과 통렬한 참회의 대결이다. 일방적 정치선전과 성실하고 민주적인 논쟁의 대치이며, 희생의 전가와 자기희생의 용기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대 회전이다.

오늘날 국민들은 자신들의 절박한 삶의 개선을 위해 용기를 내고 치열하게 싸워주는 정치 지도자를 보지 못하고 있다. 정치에서 감동과 진심을 전하는 열정적 연설을 듣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겸손하나 지혜롭고, 남들의 의견을 최대한 경청하나 결단력 있으며 개인적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고 양심을 걸고 진격해나가는 따뜻하고 존엄한 인격의 정치 지도자를 상상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대선정국의 전열 정비를 위해 여러 가지 많은 정치공학적 논리가 오간다. 하지만 그 공학적 논리는 오직 정치권 인사들이 자기 살기 위해 벌이는 시나리오라는 것을 국민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 논리에서, 인간적 진실이 빠져 있고 자기희생의 결단이 없으며 한 시대를 감당할 지혜와, 무엇보다도 용기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사람됨이 좋아서, 그 정치집단이 훌륭하기 때문에"라는 선택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 그걸 쌓아가기 이전에 정치적 책략부터 앞서는 세력에게 대중은 마음을 내어 주지 않을 것이다. 결국, 무엇보다도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계산을 앞세우지 말고 진심을 앞세우는 것이다. 거기에서 가장 뛰어난 지혜가 태어난다. 이걸 믿지 못하면, 그는 길에 널리고 밟히는 정객은 되어도 정치 지도자는 되기 어려울 것이다.

바락 오바마의 교훈

미국 대선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민주당 후보 바락 오바마의 경우는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관심대상이 되고 있다. 2007년 금년에 나이 45세에 불과한 그는 흑인으로서 인종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의 출신과 출생이 모두 정치적 불리함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물론 그의 하바드 법과대학 경력이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 자체가 그의 인종적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기본 동력은 아니다. 그만한 인재는 이미 많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앞으로 얼마만큼 돌파력을 지속 강화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그가 적어도 미국인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잡아가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는 대단히 성찰적이며 겸손하고 지혜를 갖춘 결단력 있는 지도자로 자신을 부각시키는 데 일정하게 성공했다. 그것은 개인의 정치적 품성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그가 내세우는 미국의 미래적 전망 자체가 또한 훌륭하기 때문이다. 일관해서 전쟁을 반대해 왔고 서민들을 위한 경제정책에 대해 후퇴함이 없는 진보성을 보였으며, 철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진지한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꾸준히 했다. 그뿐만 아니라 필요한 싸움이 있다면 상대가 누구이든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물러서지 않고 치열하게 전개했다는 점에서 그는 역사적 전망을 갖춘 전투력이 구비된 정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여론의 눈치를 살피면서 기회주의적 정치적 선택을 했던 힐라리와는 대조된 것이었다.

이라크 전선의 참담함 앞에서 곤혹스러워한 미국인들은 바로 그러한 차이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보기 시작했으며, 오바마 자신 또한 "희망의 대담성(audacity of hope)"라는 말로 자신의 철학과 인생관, 세계관을 압축해서 표현했던 것이다. 그는 정치가 국민을 열광시킬 수 있고, 추상적인 단어인 줄 알았던 희망이 진지한 정치적 구호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해가고 있다. 오바마의 등장은 미국정치의 미래를 새롭게 상상하도록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미국이라는 거대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방식 자체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이 아니라, 탁월한 지도력으로 "존경받는 미국"을 만들고자 하는 그의 정치적 이상은 권력의 독선과 전쟁의 야만에 세계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미국의 오늘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는 것이다.

실로, 민주/진보 진영은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 기존의 권력질서나 기득권에 얹혀서 가려는 유혹은 철저하게 버려야 한다. 아니면 사육된 집단으로 자생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도태되고 말 것이다. 시민사회 진영 역시 바로 이 새판 짜기를 위해 정치외각에서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통합적 진보, 또는 진보적 통합을 위해

어떤 판을 짤 것인가? 그 답은 통합적 진보다. 또는 진보적 통합이다. 그것이 역사의 진전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며, 그 역사적 진전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세력 결집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통합은 정치적 연대의 방식이며, 먼저 이루어져야 할 바는 당연히 뜻의 일치이다. 뜻이 일치되는 세력이 최대한 많아지면 아무렴 좋은 일이다. 대선정국의 정치적 전투는 질과 함께 양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역사란 민주/진보진영이 다수가 되어갈 때 진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애초부터 특정개인을 지목하고 누구를 배제하고 누구를 포함시키고 하는 식의 논리와 접근은 정치통합을 통해서 역사의 과제를 감당하는 일에 스스로 장애를 조성하는 일이다. 노선과 정책의 합의가 어떤 수준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가 통합의 전제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마음을 크게 열고 만나야 한다. 자기세력 우선 증강 내지 확보를 하고 나서 보자 식의 공학에 묶이지 말고, 뜻이 맞을 듯 하면 서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고, 뜻을 확인하고 어디까지 접근이 가능한지 알고 헤어져 돌아서면 그걸 깊이 성찰하고 다시 돌아와서 뜻과 결속의 구체적 내용을 하나씩 만들어가야 한다. 품이 넓은 정치를 하지 않고서는 통합은 언제든 복병이 나타나면 깨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한나라당의 집권에 반대하는 세력은 우선 모두가 통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노무현 정치의 퇴행성을 거부하는 세력으로 다시 통합의 범위가 조절될 것이다. 한국정치의 장애가 되어버린 노무현 정치의 권력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세력, 그에 사육된 세력, 기득권에 안주하는 세력으로서는 현실을 타파하고 새로운 미래를 건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 청산, 한나라당 집권 저지는 동일한 작업

당연히 현상적으로는 두 개의 전선이 형성되지만 그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다. 하나를 분명히 하면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싸움이 되는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최대한 자주적으로 이루어내고, 사회적 양극화를 막아내는 신자유주의 체제 내지 정책에 대한 반대가 그 중심에 서 있다면 민주/진보진영 내부의 각 세력간의 대화와 통합과정은 가능해진다. 이는 정당차원의 통합일 수도 있으며, 정책 연합의 차원일 수도 있으며 시민사회세력과 결합한 민주/진보진영의 대선 후보 단일화로 이어지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힘이 있어 보이나, 시간이 지날수록 노무현 정권의 세력화는 불리한 입지에 처하게 될 것이다. 시간이 결코 그들의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진보 진영이 튼튼하게 구심점을 가지고 꾸려지는 것은 노무현 정치에 사병화 된 세력이 점차 세 불리를 느끼고 투항하거나 혹여 기회주의적일지라도 깊이 반성하고 복귀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어떤 가능성으로 현실화되어갈지 모르나, 이러한 노력의 축적은 대선정치에 새로운 구심점 결성의 기대와 희망을 만들어줄 것이다. 여기에서 기득권에 안주했던 기성정치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비판, 그리고 책임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용기 있는 정치의 출현, 정책적 논의의 심화와 대안논쟁의 풍부화 등이 구체화될 수 있는 것이다.

대붕(大鵬)이 나와 잘 알려진 <장자(莊子)>의 "자유롭게 노닐다(逍遙遊)"편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는 것 역시 유명하다. "고인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습니다. (…)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면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는 물이 얕아 조그만 간장종지도 뜨지 못하는데 스스로 큰 배인 척 하고 있으며, 누가 봐도 까마귀에 불과한데도 대붕인 척 하는 인물과 세력이 난무하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대중들의 갈망을 실어서 대양을 건널 큰 배는 보이지 않으며, 역사의 순결한 의지로 비상하는 큰 새가 나는 것을 목격하지 못하고 있다.

까마귀가 대붕 노릇, 독수리 날면 혼비백산할 것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는 가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독수리가 날면 까마귀는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말 것이다. 독수리는 비록 외롭지만 남들이 감히 꿈꾸지 못하는 높은 창공을 난다. 성서를 떠올리자면, 광야에 나서지 않고 가나안에 갈 방법은 없다. 붉은 바다가 깊다고 무서워하며 홍해 앞에 멈칫거리는 자는 결국 노예가 될 뿐이다. 용기 없는 자에게 역사는 매정하다.

오늘 우리의 새로운 전열 정비가 미래를 가늠하는 역사의 지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날로 고단해지고 있는 국민들의 삶을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으로 껴안고, 부당한 현실에 물러서지 않는 순수한 전의를 가지고 나서면 민심은 뜨겁게 대답할 것이다. 대중들의 지지가 없는 것을 고민하지 말고, 자신의 진심과 용기가 부족함을 고민하는 것에서 역사는 새벽이 동트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로써, 사람들이 더 이상은 소용없다고 길에 버린 돌이 그로써 미래의 집을 짓는 모퉁이 돌이 된다. 이 시대의 정치는 마음과 영혼이 깊은 사람과 세력에게서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함께 모이는 것이다. 그리되면, 이제 우리는 그 영혼이 천박하고 비열한 정치와 깨끗이 결별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열정으로 뭉치는 감격에 희열을 느끼게 되지 않겠는가? "선한 싸움"은 이제부터다.

* 이 원고는 <통합과 비전>이 9일 개최하는 토론회의 발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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