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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귀 때리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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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귀 때리는 집

[전태일통신 69]집이 인간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

신도시 조그만 평수 아파트에서 3년 동안 살고 있었던 우리 가족은 올 1월에 이사를 해야 했다. 아파트 주인이 자신이 그 집에서 살겠다며 집을 비워달라고 해서였다. 3년 동안 아파트마다 최소 3000~4000만 원씩 집세가 올라 우리 가족은 전에 가진 돈으로는 다른 아파트를 얻을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내 가족이 부동산 투기의 최대 피해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위 친척이나 은행에서 빌려서라도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 되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빌린 돈에 이자까지 쳐서 갚는 데만 또 몇 년, 우리 인생을 그렇게 소비해야 된다는 게 끔찍했다.
  
  이사를 하면서 나는 결심했다. 이제 집 사는 것도, 집 평수를 늘리는 것도 포기하겠다고. 여기서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그 포기는 내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자구책이라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먹어서일까? 이사짐을 정리하는데 예전에 수첩에 적어두었던 하나의 글귀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집은 삶의 터이고 그 삶의 터는 자본주의보다 더 오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착각을 했다. 평범한 사람이 집 사는 것도, 집 늘리는 것도 포기한 대가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그때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가족은 아이들 학교문제도 있고 해서 멀리 이사는 가지 못하고 신도시 귀퉁이에 있는 '주택단지'로 1월 26일에 이사를 했다. 신도시에서 집값이 제일 싼 곳은 이곳밖에 없어서였다. 차 타고 가다가 한 번씩 쳐다보면서 '저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하면서 궁금해 했던 곳이었다.
  
  아파트 사람들이 은연중 아파트 단지 옆에 화려하게 지어진 '전원주택'과는 다르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주택단지' 사람들이라 부르며 아래로 보는 것을 몇 번 느꼈던 곳이기도 했다. 주택단지의 골목들은 낯설었다. 잘 정돈된 아파트 단지 길과는 다르게 어지러웠다. 대부분 4-5층의 다세대 주택으로 이루어진 집들은 1층에는 카센터, 식당, 전자공장 등 상가와 공장을 겸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새로 집을 짓느라 기자재들이 난잡하게 쌓여 있었고 쇠 자르는 소리, 망치질 하는 소리들이 시끄럽게 돌아다녔다.
  
  우리 가족이 살게 된 집은 다세대주택 4층이었다. 전에 살던 집보다 좁아서 가구며 옷, 이불 등을 버리고 왔는데도 물건들이 집에 가득 찼다. 집이 좁으니 스트레스를 받는지 아이들이 사소한 일에도 싸움이 잦아졌다.
  
  그래도 그것은 견딜 수 있었는데 집이 부실한 것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인터폰은 겉에 기기만 달아놓고 선이 없어 작동이 안 되었고 냉장고 전기코드도 고장이 나 있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화장실에서 나는 냄새였다. 아주 지독했다. 화장실을 가만히 살펴보니 맙소사, 겉모양만 통풍시설이 되어 있지 팬이 달려 있지 않았다. 그러니 냄새가 제대로 빠질 리가 없었다. 그 냄새를 한번 맡으면 기분이 불쾌해지면서 머리가 아팠다. 어떤 때는 무기력해지기까지 했다. 아이들에게 화장실 문을 잘 닫으라고 해도 매번 잊어버리고 문을 열어 놓았다. 거실에서 밥을 먹다가 냄새라도 나면 나는 아이들을 나무라곤 했다. 야단을 치면서도 '꾸지람이 반복되면 아이들의 정서에 안 좋을 텐데' 하면서 나 자신을 책망하곤 했다. 방음 장치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지 아침마다 옆집에서 기상나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이사 와서 내가 제일 충격을 받았던 것은 아이들이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지 않는 것이었다. 전에 살던 집에서는 친구들이 떼로 몰려와 요리도 하고 장난, 놀이를 하느라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곤 했었다. 밀가루가 부엌 바닥에 하얗게 날리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고구마를 쪄 먹는다고 냄비도 태우고 그것을 바닥에 잘못 놓아 장판을 시커멓게 태운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조용했다. 한번은 둘째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즈음 밖을 내다보니 친구를 건물 밑에 세워놓고 자신만 올라왔다.
  
  "친구랑 함께 오지 그랬니?" 물으니 "집이 좁아서…" 그러면서 말꼬리를 내렸다. 나는 놀라서 "아, 그랬구나. 친구에게 집 보여주기가 창피했구나." 그랬더니 둘째아이는 빠르게 그 친구는 아파트에서 사는데 40평이 넘는다고 말했다. 어떤 친구는 전원주택에 사는데 100평이 넘는다는 말도 했다. 내 아이 입에서 직접 그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 가난도 문제이지만 가난을 부끄럽게 만드는 시선이 더 큰 문제이듯이 그 아이를 '부끄럽게 만드는 시선'에 '당당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고 그 사이에서 혼자 가슴앓이를 했을 아이들이 가여웠다.
  
  며칠 고민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다른 사람들처럼 시골로 내려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어차피 도시라는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인 결론이었다. 우선은 이사할 때처럼 짐을 다시 정리했다. 다시 버릴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버렸다. 옷은 두어 벌만 남기고 다 버렸고 그동안 아까와서 버리지 못했던 책들은 휴지 줍는 할머니를 불러서 드렸다. 차대기로 6부대였다. 거실을 최대한 넓혀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아들 친구들을 불러 맛있는 것도 해 주었다.
  
  인터폰은 새로 고치고 화장실도 전문가를 불러서 냄새를 잡았다. 통풍기에 팬이 없어 아래층에서 올라온 냄새까지 전부 우리 화장실로 새어 들어와서 그렇게 냄새가 지독했던 것이다. 그 냄새가 없어지자 아이들에게 문 닫으라고 야단치는 일도 없어졌다. 그것만으로도 집안이 평화로웠다. 아이와 함께 시장에 가서 딸기, 토마토, 고추, 상추 모종을 샀다. 다행히 우리집 옥상은 텅 비어 있었다. 플라스틱 박스에 흙을 퍼 와서 그 모종들을 옮겨 심었다. 쿠바의 하바나처럼 도시 공간 안에 농촌을 만들 수는 없다 하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식물들이 자라고 열매 맺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일 것이다.
  
  두어 달이 지나니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알게 되었다. 자명종을 시끄럽게 틀어놓았던 옆집에는 회사 다니는 총각들이 살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생일이라고 케이크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2층에는 외국에서 온 이주노동자들도 있었고, 3층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분이 살고 있는 집도 있었다.
  
  '주택단지'는 어떻게 보면 아파트를 본떠서 만든 '짝퉁 아파트'이고, 자본의 시선으로 보면 하찮고 대접받지 못하는 곳이지만 그곳에서 생활을 나누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 '살아 있는 또 하나의 삶의 공간'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집 사기를 포기한 우리 가족이 평수 넓히는 데 드는 시간과 경제력으로 그런 분들과 많은 소통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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