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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거울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40> 나는 왜 저항의 문학을 하는가

이십대에 숨어서 보던 책들이 있었다. 골방 속에 갇혀서, 혹은 아무도 없는 산 속에 홀로 들어가 시인의 노래를 부르며 눈시울을 붉히다가 가슴을 쥐어뜯기도 했었다. 술에 취하면 술병에 대고 민주주의를 부르짖었고, 독재정권을 향해 저주의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다가 시인의 노랫말처럼 민주주의를 찾아 나서다 최루탄을 온몸에 뒤집어쓴 채 경찰서로 끌려가 갈비뼈에 금이 가도록 발길질을 당한 적도 있었다.
  
  민주주의는 꽃이다. 그 꽃은 자유고 평화다. 독재정권은 그 꽃을 짓밟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고 의문사로 사라졌다. 나는 피로 얼룩진 어둠 속에서 피어난 상상화 꽃 같은 시인의 노래를 세상에 퍼뜨리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분노와 상처로 일그러진 언어들. 그 언어들은 공권력을 향해 날리던 돌멩이처럼 투박했다. 민주주의가 아닌 모든 것들은 적이다! 팔십년 광주항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 나는 민중이라는 새로운 얼굴을 만났다.
  
  민중의 얼굴들 중에서 가장 강렬하게 내 앞에 나타난 얼굴은 노동자들의 얼굴이었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자들. 자본가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노예처럼 살아야 하는 자들. 그들은 하루에 14시간씩 일하면서 몸 하나 반듯하게 눕힐 수 있는 방 한 칸조차 가질 수가 없었다. 그 삶이 억울해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요구하면 가차 없이 일터에서 쫓겨났다.
  
  민중들이여 혁명이다! 민중에게 권력을! 독재정권과 부패한 자본가들을 쓸어내고 새로운 민중에 의한 정부가 생겨날 거대한 파도가 몰아칠 꿈을 꾸었다. 민주주의를 노래했던 글과 말들이 민중의 힘을 상징하는 노래로 탈바꿈했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평등이라는 눈부신 햇살이 필요했다. 세상 곳곳을 밝혀줄 수 있는 그 찬란한 빛을 통해 민주주의의 꽃도 만발할 것이라고 믿었다.
  
  평론가들은 민주주의를 노래했던 시기의 글들을 참여문학이라고 불렀고, 민중을 노동자를 부르짖는 문학을 민중문학, 노동문학이라고 불렀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얼마나 많은 작가와 평론가들이 문학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해석을 했었던가. 문학에 관한 완전한 정의와 해석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작가여, 당신은 왜 글을 쓰는가. 가슴에 담아두면 터질 것 같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이 이야기를 어찌할 것인가.
  
  자본가가 이윤을 좇는 것처럼 작가는 자신의 가슴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오는 그 소리를 좇아 문학을 한다. 어떤 작가는 인간 존재의 근원을 찾아, 어떤 이들은 인간의 의식 저 편에 있는 초월적 세계를, 또 어떤 이들은 사랑을 찾아, 생명의 근원을 찾아 문학을 한다. 찾아가는 세계와 그 이야기를 담는 그릇은 다르지만, 그의 가슴에서 올려오는 세계를 쫓아가는 것은 다르지 않다.
  
  나는 소설을 쓴다. 평론가 혹은 독자들이 내 글을 읽고 어떤 문학적 용어를 붙이든 간에 나는 소설을 쓴다. 내가 겪어온 삶의 편린들이 어느 날 내 안에서 요동을 치면 나는 글을 쓴다. 물론 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루어지기 힘든 소망을 가슴에 품은 채 소설을 쓴다. 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소설을 쓴다. 한때 그 열망이 너무 커서 모든 사람과 사건과 사물들이 흑백논리에 가둔 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원하는 목소리만 키워 세상을 향해 내뱉었다. 왜 당신들은 민주주의를, 민중들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상처를 통해서, 인간의 상상하기 어려운 내밀한 모습의 다양성을 통해서, 생의 놀랄만한 풍부한 세계를 접하면서, 현실문제에 직접적인 발언을 하면서 이 세계를, 인간을 진지하고도 깊이 있게 보기 위해 애를 쓴다. 그게 내가 살아 온 길이다. 나는 그 길 위에서 꿈을 꿨고, 그 길 위에서 이 세계를 인간을 보고 있다. 그것이 정녕 잘못 본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건 내 몫이다. 그래서 나는 저항의 문학을 한다. 그 저항은 오랜 시간을 겪으면서 느꼈던 흑백논리의 저항이 아니라, 인간세계의 아름다움을 찾아나서는 저항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저항,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저항, 자연과 자연 사이의 저항, 인간과 종교 사이의 저항,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저항, 그리고 수없이 계속되는 모순을 넘어서는 모든 저항의 아름다움을 찾아나서는 저항이다. 그 과정은 생명의 근원을 찾아나가는 길이고, 비틀어지고 왜곡된 생명을 치유하기 위한 길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무슨 노래를 부르고 싶은가. 어떤 꿈을 가슴에 품고 노래를 부르고 싶은가. 당신의 가슴에 귀 기울여 보라. 무슨 소리가 당신의 가슴 속에서 들려오는가. 그 소리는 당신이 살아 온 삶의 거울이다. 문학은 바로 그 거울 속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던가.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www.palbridge.org)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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