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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 장에 수십만 운집, 무크타다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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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 장에 수십만 운집, 무크타다는 누구?

반미여론-민족주의 업고 '시아파 대표'로 등극

미군의 바그다드 함락 4주년인 지난 9일 이라크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는 "미국 타도" 함성으로 가득 찼다. 전국에서 몰려온 수십만의 시아파 무슬림들의 행렬에 나자프를 잇는 모든 도로가 몸살을 앓았다.

이들이 거리로 나선 것은 전날 시아파 지도자인 무크타다 알 사드르가 "미군의 점령을 끝내려면 이슬람 시아파가 거리로 나서야 한다"며 '시위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 시위를 통해 지난 2월 최측근 2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종적을 감춘 무크타다는 성명 한 장만으로도 수십만을 동원할 수 있는 '파워'를 전 세계, 특히 미국에 한껏 과시했다.

"무크타다가 이끄는 메흐디 민병대가 이라크 주둔 미군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는 한, 무크타드와 미국 간의 갈등은 무크타다 승으로 결론날 것"이라던 패트릭 콕번 <인디펜던트> 중동 전문기자의 분석이 과대평가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콕번은 지난 2월 15일 미국의 좌파 매체 <카운터펀치>에 쓴 '이라크 최대 권력자, 무크타다 알 사드르는 누구인가' 를 통해 30대 초반(1974년 생)에 불과한 무크타다가 '시아파 대표 주자'로 등극하게 된 배경과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며 "이라크 안정을 위해서 무크타다는 제거의 대상이 아닌 협력의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콕번의 글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30대 청년이 시아파 최고지도자가 되기까지

▲ 무크타다의 사진을 들고 시위에 모인 시아파 주민들.ⓒ로이터=뉴시스

무크타다의 존재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작년 연말 사담 후세인 교수형 직후였다. 교수대에 올라간 후세인에게 참관인 중 하나가 무크타다의 이름을 외치는 장면이 휴대폰 카메라에 찍혀 전 세계로 유포됐기 때문이다.

수니파인 후세인에게 시아파인 무크타다는 최대 정적(政敵)이었기에 이는 죽음을 앞둔 후세인에 대한 조롱으로 받아들여졌고 당시 이에 분개한 수니파들의 시아파 공격이 격화됐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점차 존재감을 강화해 온 무크타다가 어느새 시아파의 대표 지도자가 된 것이다.

사실 무크타다는 뛰어난 웅변가도,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도 아니다. 자금줄도 탄탄치 않아 메흐디 민병대원들은 무급으로 뛰고 있고 자비를 털어 무기를 사 모을 정도다.

뒤를 봐 줄 외세도 없다. 미국은 무크타다의 배후에 이란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란 망명설'까지 퍼트리고 있지만 이란 역시 민족주의자인 무크타다를 경계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바른 판단이다.

시아파 민중을 대변하는 '사드리즘'

이런 무크타다가 '민족의 지도자'로 큰 데에는 시아파 명문가인 사드르가(家) 직계라는 점이 든든한 기반이 됐다.

이들 가문의 저항운동을 뜻하는 '사드리즘(Sadrism)'은 1950년대 모하메드 바키르 알 사드르가 이라크 공산당과 바트당에 맞서기 위해 만든 조직으로부터 시작됐다. 바키르는 시아파 정당인 '알 다위'를 창설하는 데에도 힘을 보탰다.

바키르는 시아파 종교지도자 특유의 정치적 침묵을 깨고 정치, 경제 등 일상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했다.

후세인과 바트당 정권이 위세를 떨칠 때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바키르는 "내 새끼손가락이라도 바트당원이라면 잘라버리겠다"고 공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탓에 1980년 후세인에 의해 제거됐다. 당시 그의 여동생과 수백 명의 지지자들을 처단됐다.

바키르가 죽은 후에도 '사드리즘'은 세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후세인 정권이 시아파 국가인 이란을 공격하자 이라크 인구의 60%에 달하는 시아파가 국가 정체성에 관한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를 반정부운동으로 결집하는 구심점에 '사드리즘'이 있었다.

새 지도자로는 바키르의 사촌이자 무크타다의 아버지인 모하메드 사디크 알 사드르가 선택됐다.

사디크가 지도자로 뽑히는 과정에 대한 일화는 '사드리즘'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도울 만하다. 사디크와 다른 후보들은 '토마토 가격'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난해한 종교적 질문에 익숙해 져 있던 다른 후보들이 이를 '자신들을 무시하는 질문'으로 받아들인 반면 사디크는 토마토 품종 별 가격을 자세하게 답했다.

이에 지도자 선출을 담당한 종교 지도자들은 "일반의 빈곤과 고생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며 사디크를 택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아파 민중의 대표'가 된 사디크는 모든 외세의 간섭에 반대하며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단결을 촉구했다. 사디크는 시아파를 핍박하는 후세인에 대해서도 협력의 손을 내밀었지만 후세인은 이를 암살로 되갚았다.

1999년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로 이동하는 길목에서 사디크와 그의 두 아들들이 살해당한 것이다.

사디크 사후 넷째아들 무크타다는 후세인 정보원의 감시 아래 있었으나 "지도자로 클 자질은 없다"는 정부 측 판단 덕에 죽음은 면했다.

후세인이 '낙제점을 매긴' 무크타다가 두각을 드러낸 것은 미국이 후세인을 축출한 2003년 4월부터였다. 후세인 정권을 싫어했지만 그 빈자리를 외세가 채우는 것에도 반대하는 시아파의 목소리를 무크타다가 대변한 것이다. 4월 11일 시아파 주민 수십만 명을 이끌고 카발라를 향해 행진을 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흔들림 없는 반미 소신
▲ 바그다드 함락 4주년을 맞아 시아파 성지 나자프로 향하는 시아파 시위대. 9일 시위는 종적을 감췄음에도 여전히 건재한 무크타다의 '파워'를 만방에 알렸다.ⓒ로이터=뉴시스

후세인 축출 직후 아얄톨라 알리 알 시스타니를 비롯한 '알 다와'당 일파 등 기존 시아파 지도자들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군 점령을 인정하는 대신 시아파가 정권을 잡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폴 브레머 이라크 최고 행정관을 압박했다.

반면 무크타다는 미군 점령을 처음부터 반대했다. 시아파가 일부 참여한 '이라크 통치 위원회'를 "미국의 볼모"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당시 메흐디 민병대는 이름뿐인 군대였다. 2003년 10월 사드르 시티 중심에서 열린 무크타다 진영의 시위에 모인 숫자는 3000여 명에 불과했다. 브레머 행정관이 무크타다를 체포해야 할 필요성을 두고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점점 유명세를 타는 무크타다에 반해 브레머가 이끄는 연합군 과도행정청은 날로 인심을 잃었다. 치안, 재건, 민주적 선거 등 내세웠던 공약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데다가 미국의 침공 이후 이라크인 70%가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나날이 연합군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실망이 커져가는 상황에서 무크타다 진영과 과도 행정청 간의 우발적 충돌이 메흐디 민병대의 세 확장을 추동했다.

무크타다가 연설 중 "9.11은 기적과 같은 신의 축복"이라고 말한 것을 시아파 주간지 '알 하우자'가 보도했고 이를 본 브레머가 '알 하우자'의 폐간을 명령한 것이다. 이에 격분한 시아파 청년들이 며칠 만에 무크타다 진영의 거점인 사드르 시티와 이라크 남부 일대로 몰려들었고 메흐디 민병대에 자원입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성장한 무크타다는 시아파를 대표하는 정치 세력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무크타다가 주도하는 통일이라크연합(UIA)은 2005년 1월과 11월 두 번의 총선에서 개가를 올려 의회 275석 중 32석을 차지했다. 총리 임명시 '비토권'을 확보한 것이다. 보건부, 교통부 등 6개 장관 자리도 무크타다 지지 세력에게 돌아갔다.

2006년이 되자 메흐디 민병대는 그 세력권을 바그다드 내 모든 시아파 거주지로 확장했다. 메흐디 민병대를 지지하지 않았던 시아파 주민들도 자신들을 자살 폭탄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줄 군대가 생긴다는 것에 감사하며 메흐디 민병대를 이웃으로 맞았다. 무크타다 진영이 진정한 시아파의 중심이 된 것이다.

美, 이라크 안정 원한다면 무크타다와 손잡아야

이처럼 무크타다는 미국이 권력을 넘겨주려 하는 다른 어떤 세력보다 정통성을 인정받는 세력이다.

미국이 진정 이라크 안정화를 꿈꾼다면 '민족주의 종교 지도자'인 무크타다는 배제와 소외의 대상이 아닌 협력의 대상으로 바라봐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라크 주둔 미군들 사이에서도 수백만 시아파 사이에서 숭배를 받는 종교 지도자와 맞서 싸우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인가에 대한 회의론이 적잖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행정부는 무크타다를 배제하고 제거하려고만 들고 있다. 이라크 주둔 미군은 무크타다를 이라크 안정의 최대 위협으로 지목하며 생포 혹은 사살을 명령했고 지난 2월 무크타다 최측근 두 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무크타다가 몇 주째 종적을 감춘 것도 신변의 위협을 느낀 탓이다.

시아파 대중이 더 이상 다른 세력에 정권을 내 줄 수 없다는 절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대변하는 무크타다를 이런 식으로 궁지로 몰아넣는 것은 무크타다를 이란에 의존토록 할 뿐이다.

부시 대통령은 2003년 이후 계속된 실패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알 수 없다. 지난 4년 간 부시 대통령은 이슬람 수니파와의 싸움을 해 왔다. 무크타다와 충돌은 부시 대통령이 시아파와의 '새로운 싸움'에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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