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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캐내야 할 할복의 진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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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캐내야 할 할복의 진상은?

<일본의 오늘(4·끝)> 방위성과 미시마 유키오 자살터의 풍경

미시마 유키오. 일본 소설가. 1925년 도쿄 출생. 도쿄대 법학부 졸. 대표작 <가면의 고백>(1949), <금각사>(1956). 1960년 <우국(憂國)>을 발표할 무렵부터 급진적인 민족주의에 심취. 1970년 11월 25일 그가 주재하는 '다테(방패)의 회' 회원 4명을 이끌고 육상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에 난입해 총감을 감금하고 막료 8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후 다음과 같이 외치며 할복자살.

"지금 일본의 얼을 유지하는 것은 자위대뿐이다.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피와 문화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들은 사무라이들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헌법(제9조)을 왜 지키고 있단 말인가. 나를 따를 사람은 없는가."

도쿄대가 주최한 '한중일 저널리스트들과의 대화' 참가자들은 지난달 30일 도쿄 이치가야에 있는 일본 방위성을 방문했다. 구(舊) 방위청은 지난 1월 9일 방위성으로 승격되었다. 이를 두고 많은 이들은 '일본 우익의 숙원이 이뤄졌다'고 평했다.

방위성 방문의 하이라이트는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터 참관이었다. 미시마는 원래의 위치에서 다소 자리를 이동해 복원됐지만 1937년 육군사관학교 본부로 건립된 건물 2층에서 할복했다.
▲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었던 이치가야 기념관. 미시마 유키오는 이곳 2층 발코니에서 연설한 뒤 안으로 들어가 할복했다.(좌) 도쿄전범재판이 열렸던 이치가야 기념관 대강당 (우) ⓒ프레시안

지금은 이치가야 기념관이란 이름으로 방위성 견학객들을 맞고 있지만 이 건물은 2차대전 직후부터 1959년까지 미 극동군 사령부 등으로 미군에 의해 사용됐다. 건물의 중심인 대강당에서는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전범재판)이 열리기도 했다.

미시마는 군국주의 일본의 영광과 오욕이 뒤범벅된 이 건물이 반환된 지 11년 후인 1970년, 군국주의의 부활을 외치며 피를 뿌린 것이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오늘 일본은 두 달 전 떼어낸 방위청의 나무현판을 미시마가 할복한 바로 그 방에 전시해 두었다. 묘한 상징이었다.
▲ 방위성 승격으로 내려진 방위청 현판이 미시마의 자살터에 보관되어 있다. ⓒ프레시안

자살 장소는 그저 조그만 방에 불과했다. 사건 당시 일본도(刀)에 긁힌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특별한 감흥이 올 리 만무했다. 인상적인 것은 '방위성 방위사무관'이란 명함을 건네 준 이노우에 야스후미 씨의 설명.

그는 진짜 일본도를 넣었다 뺐다 하면서 능숙한 몸짓으로 미시마의 자살 장면을 재연했다. 조금 전 1층 대강당에서 극동군사재판 장면이 담긴 영상물을 보여줄 때의 담담한 표정이 아니었다. 마치 스스로 미시마가 된 듯 비장하고 때론 섬뜩했다.

물론 할복 재연 자체도 '끔찍하다'는 것 외에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이노우에 씨의 다음과 같은 말이 없었다면 자살터 방문은 그저 '할복을 하는 사무라이 정신이란 무엇일까?' 정도의 유치한 물음만 던져주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나는 미시마와 함께 사건 현장에 있었던 다테회의 나머지 3명과 아직도 친분을 갖고 있다.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20년 정도가 지나면 관련자들이 밝힐 것이다."

의아했다. 조금 전까지 미시마를 비롯한 다테회 4명이 서 있던 장소며, 막료 8명이 뛰어 들어온 위치며, 사건의 배경까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재연했던 이가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니. 극우 사상에 심취한 미시마가 일본의 재무장을 촉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20년 정도'라면 우선 생존자 3인의 자연수명이 다할 때쯤이라는 말일 것이다. 죽기 전 그들은 자서전이나 언론 인터뷰 따위를 통해 왜 그 일을 했으며 미시마의 당시 심경은 어떤 것이었는지 등을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도 본인들의 입으로 확인한다는 사실 외에 새로운 게 있을 리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노우에 씨의 '20년 정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일본이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정상국가' 건설을 완수하며, 국방비 세계 4위에 걸맞은 재무장을 끝내고, 나아가 그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의제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상황이 되는 시한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사건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일본의 일반인들, 나아가 정부까지도 공식적으로 미시마의 할복을 '영웅의 거사'로 치켜세울 수 있을 것이다. 다 알려진 일이지만, 그 의미와 배경을 쉬쉬하고 비공식화했던 태도를 버리고 떳떳하게 역사적 의의를 조명할 것이다. 그것이 이노우에 씨의 '진상'이었다.

미시마의 '할복 연설'을 들었던 1000여명의 자위대원들은 그에게 야유와 멸시를 보냈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군사대국 일본의 부활을 외치는 극우주의자들이 다시금 양지에 당당히 나서게 된 계기가 됐다. 지금부터 20년 후, 즉 할복사건 57년 후 일본은 재무장이 완료된 국가로 국제사회에 당당히 나서게 될 수 있지 않을까.
▲ 육상자위대 홍보센터에 전시된 자위대 전차들(왼쪽)과 홍보센터에서 시뮬레이션을 즐기고 있는 아이들(오늘쪽) ⓒ프레시안

1998년부터 10년의 공사를 거쳐 2000년에 입주가 완료된 방위청 단지는 미시마가 꿈꾸던 '군사대국 일본'을 목표로 준비된 것임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위성 부지는 도쿄돔 야구장의 5배에 해당하는 크기이고 직원 수는 이전하기 전의 두 배인 1만 명이나 된다.

특히 방위성에 가서 이치가야 기념관을 돌아보는 견학과 이날 오전 있었던 육상자위대 홍보센터 방문은 일본의 군사화에는 매우 용의주도한 대국민 홍보가 병행됨을 확인하게 해줬다.

일본 정부는 일찍부터 자위대와 방위 문제에 대한 여론조사를 정기적으로 시행해왔다. 1977년부터는 국가에 대한 봉사와 애국심에 대한 호소가 본격화됐고 방위에 대한 국민교육도 시작했다.

1978년부터는 유아들를 상대로 매년 여름방학에 각지의 자위대 시설에서 여러 행사를 하고 있다. 초·중학생들에게는 자위대의 기지 등을 공개하고 수십종의 홍보비디오를 대여해준다.

이렇게 영유아까지를 상대로 홍보를 해온 지 30년이 됐으니 오늘날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자위대는 친근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날도 자위대 홍보센터에는 유치원생들이 단체로 들어와 신나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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