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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줍기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37> '예술'과 '팔레스타인 예술'

작년 말, 스페인 카스티예 라만차에 있는 작은 도시 쿠엔카는 '팔레스타인: 땅, 추방, 그리고 창조성'이라는 이름으로 문화 행사를 열었다. 행사에서는 문학 낭독회, 음악회, 영화 상영, 전시회 등 광범위하고 다양한 활동이 벌어졌다.

개회식에서, 지역 정치인들을 필두로 주최 측의 연설이 이어진 후, 팔레스타인 예술가 '타이시르 밧지니'1)가 <불가능한 여행>이라는 행위예술을 실연했다. 한 무더기의 모래를 작가가 삽으로 떠서 다른 지점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 일이 끝나자마자 작가는 모래를 원래 있던 자리로 도로 옮기기 시작하고, 다시 반복한다.

- 결국 그의 일은 끝이 없는 시지프스의 과업이다.

하지만 밧지니를 쓰러뜨린 것은 바위가 아니라 모래였다. 이 행위를 통해 밧지니는 시지프스를 그리스 신화로부터 작가 자신의 현실로 끌어온다.
▲ 타이시르 밧지니의 <불가능한 여행>. 때로 예술은 수확 끝난 벌판이다. 누구나 스스로 찾아낸 것밖에 얻을 수가 없다.

-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와 프랑스의 파리를 오가는 불가능하고 숨 돌릴 틈조차 없는 여행으로.

그리스 왕과 팔레스타인 예술가를 연결짓는 것은 똑같은 부조리이다. 그들이 애써 이루어낸 성과는 반드시 파괴되어 버리리라는 하나의 저주. 사실 파괴당하리라는 예언은 건설해내려는 모든 시도들을 수반한다. 그 둘은 앞뒤로 나란히 있다.

모래 무더기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또 저쪽에서 이쪽으로 옮겨지면서, 작업은 점차 시지프스의 비유로부터 모래시계로 변해간다. 두 지점을 왕복하는 모래더미가 이 '불가능한 여행'의 기간을 재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부조리는 시간이라는 관념 자체에 얽혀들어, 시간을 곧게 뻗어가는 일직선이 아니라 무한히 반복하는 원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접한 공연장에서 두 번째 행위예술인 '주마나 압부드'의 <숨을 멈추고>가 동시에 벌어졌다. 이 공연에서 예술가는 얼굴을 철가면에 묻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숨을 참는다. 질식하기 바로 직전에야 그는 얼굴을 들어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다시 얼굴을 철가면에 묻는다.

밧지니의 작업이 삶의 부조리한 순환을 그렸다면, 압부드의 작업은 이 순환을 죽음이라는 직선에 갖다댄다. 이 진솔한 두 작업은 삶의 순환성 대 죽음의 직선성이라는 모순적인 주제들을 다룬다. 이들은 '끝'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연속성을 회복시키고, 끝이 연속성을 얻기 위한 전제조건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비슷하다. 왜냐하면 순환이 끝나는 순간이 바로 다시 시작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직선보다는 삶의 순환이 우위이다.

이제 문제는 팔레스타인 상황이 이 두 작품에 얼마나 그려졌는가이다. 또는 이 두 예술가의 '팔레스타인다움'이 작업에 어느 정도로 드러났는가?
▲ 주마나 압부드의 <숨을 멈추고>. 정말로 그럴까? 팔레스타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 똑같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구분될 만한 독특함 따위는 없는 걸까?

이런 질문은 그냥 해보는 게 아니다. 예루살렘의 '알 마말 현대 예술 재단'의 감독이자 쿠엔카에서 실연된 밧지니와 압부드의 작업의 큐레이터인 '잭 퍼세키안'이 쓴 논문 <팔레스타인 예술에 대한 재고>로 촉발되어, 행사에 참가했던 작가들 사이에 벌어졌던 긴 논쟁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논문의 주요 주장 중 하나는, 팔레스타인 예술로부터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만이 아니라 국가주의와 국가적 이해를 잘라내고 팔레스타인 예술가들이 '팔레스타인 예술'이 아닌 '예술' 창작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많은 쟁점이 도출된 이 논의에는 모리드 바르구티, 마흐무드 아부 하쉬하쉬, 롤라 할라와니, 라에나 타하, 칼리드 라바, 후아드 아스푸르, 다나 에라캇 그리고 나 자신도 참여했다. 잭 퍼세키안의 주안점, 즉 예술은 모든 감각을 열어두어 무한한 방식들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견해에는 이들 대부분이 동의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주된 의문을 제기했다. 국가주의적이고 정치적인 주제들을 버리라는 이런 요구 또한 예술 창작 과정과는 별개일 수 있을까? 예술가들에게 다른 건 말고 어떤 일정한 주제들을 다루라고 강요해도 될까?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요구가 팔레스타인 예술은 가능한 한 '팔레스타인적'이어야 한다는 이전의 요구 - 팔레스타인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호기심에 답해야 한다든가 하는 실용적 이유로, 또는 책임감 같은 도덕적 근거로, 또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기록하여 외부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절실함 때문에 - 를 뒤집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이 두 요구는 하나는 팔레스타인적인 주제를 버리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그 주제에 천착하라고 하여 명백히 상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원리는 같다. 외부로부터 예술가들의 선택과 창작 과정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

어찌 보면 이 둘은, 물론 정도 차이는 있지만, 예컨대 상업적인 회사들이 예술가들에게 자기에게 이득을 가져올 만한 주제들을 다루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노동자 계급이 생산에 임할 에너지를 재충전하게끔 예술을 지속적인 오락으로 만들려는 자본주의의 노력과 비슷하기도 하다. 또는 간단한 예로 예술에 선전을 주입하려는 전체주의 정권들의 시도라든가. 이 모두가 완전히 자율적이고 자유로워야 할 창작 과정에 영향을 끼치려는 외부 압력의 다양한 위장 방식이다.

결국, 팔레스타인 예술가가 어느 날 카메라 앞에서 제 신발을 꿀꺽 삼키든지 또는 카메라로 라말라를 침공한 이스라엘 군대를 찍든지, 예술가 자신의 선택이어야 한다. 외부적인 요구에 뜯어 맞추어서는 안 된다. 주제가 뭐고 유파가 무엇인지를 떠나, 밧지니와 압부드의 두 작품에 대한 평가는 작가가 그 작품에서 보는 이가 자신만의 해석과 개인적이고 생생한 경험들을 집어넣을 공간을 창조했는가 아닌가, 이것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예술 작품이 특정 컨텍스트 - 이 경우에는 팔레스타인 - 에 한정되지 말아야 한다거나 될 수 없다는 증거로서, 잭 퍼세키안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비평에 대한 '모나 하텀'의 응답을 인용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작가(모나 하텀)가 팔레스타인 상황을 어느 누구보다 잘 표현했다'고 평했는데, 하텀은 팔레스타인인으로서 망명과 추방을 겪어야만 했던 사이드가 팔레스타인 이슈와 별로 관계없는 자기 작품에서 딱히 팔레스타인 이슈를 읽어냈다고 반박했다.

사이드가 하텀의 작품을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맥락 안에서 해석 또는 '읽어냈다'는 건 분명하다. 하텀이 사이드의 평가를 그 자신의 맥락으로 읽은 것처럼 말이다. 사이드는 언술이란 것이 맥락이나 역사성과 상관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없고, 인간이 어떤 맥락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절대적 진실을 진술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의 책 <오리엔탈리즘>이 멋지게 규명해냈다. 하텀과 잭 퍼세키안은 사이드의 말을 부정적으로 - 하텀의 작품을 한정지으려는 시도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긍정적으로 - 팔레스타인 상황 자체의 의미는 다중적이라서 형식도 내용도 단일화될 수 없다는 예시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실은 '예술의 보편성'이라는 잭 퍼세키안의 주장이야말로 칸트주의 인식론과 탐미주의, 또는 현대 글로벌리즘에서 연원한 서구 현대 예술 담론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볼 수도 있다.

더구나 '팔레스타인 예술을 재고'하기 위한 그 논문은 말 그대로 '국기에 휩싸였거나' 또는 '그 색깔로 범벅인' 작품들을 주로 언급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만약에 그런 작품들이 '문제적'이라고 여겨진다면 그 '팔레스타인다움' 때문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술적으로도 성취한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판도는 단순하지 않을 뿐더러 점점 더 복잡해진다. 쿠엔카의 행사에서 여러 팔레스타인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팔레스타인 예술가들 사이의 논의는 더욱 다채로워졌다. 다큐멘터리나 다큐드라마인 그 영화들은 대개 2000년 '2차 인티파다' 이후, 특히 2002년 봄 이스라엘이 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촌과 마을, 도시들을 재침공했던 기간 중에 제작되었다.

여기서 잠시 쿠엔카로 돌아가 보자. 두 거대한 산맥 사이에 조용하고 평온하게 펼쳐진 스페인의 중세적인 작은 도시. 우리가 호텔에서 영화 상영관으로 걸어갈 때면 친절한 주민들이, 몇몇과는 우리가 운 좋게 친해지기도 했는데, 반갑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

상영관에는 빨간 좌석이 있고 어찌나 푹신한지 거기 앉으면 아주 파묻혀 버려, 멀리 있는 스크린 말고는 옆 사람도 쳐다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돌연 스크린에 팔레스타인에서 온 영상들이 줄달음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군인들, 총격, 폭발, 상처, 공포, 돌을 던지는 젊은이들, 장례식, 상점이 박살나고 건물은 무너진 거리, 어두운 골목…. 눈에 익은 장면들이 그 작은 도시 쿠엔카에서 갑자기 재연되었다.

순간 그 영상들은 그로부터 며칠동안 도망쳐 나온 우리를 쫓아온 과거의 망령처럼 보였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쿠엔카의 마법에 홀려 있던 우리는 과거로 도로 질질 끌려갔다.

아니다,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내게 그 영상들은 내가 살아 왔던 과거의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스크린 위에서 줄달음치는 그 영상들은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낯선 삶 같기만 했다. 마치 처음 보는 장면들 같았다. 스크린에 떠서 그 영상들이 자기들만의 현실을 만들어내어, 실제의 현실에서 내가 느꼈던 것과는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등장인물들이 매우 슬픈 일을 겪을 때마다 울었다. 실제로 내가 그 일들을 겪어 왔고, 그러면서도 결코 울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도무지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모든 영화를 보고 싶었으며 그 모두를 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내 마음의 뒷구멍으로 슬금슬금 예전의 소망이 기어들었다. 팔레스타인에서 내 삶을 방해했던 그 바램.-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

한 단편 영화의 중간쯤에 나는 갈증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잠깐이라도 스크린을 떠나면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더 버티다가는 내 영혼이 몸을 떠날 것 같았다. 나는 나가서 물을 마시고 돌아와서 영화를 계속 보았으며, 영화는 이어졌다. 단편 영화치고는 꽤 길었다. 나는 몸을 기울여 옆 사람에게 내가 나간 사이에 무슨 내용이 나왔느냐고 물었는데, 그 사이에 이전 영화가 끝나고 새 영화가 시작된 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문득 나는 스크린이 내게 사기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영화들은 마치 같은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하나의 영화 같았다.-같은 군인들, 같은 젊은이들, 같은 여자들과 아이들. 심지어 다 같은 제작팀이 만들고 찍고 편집한 영화 같기까지 했다. 누군가는 실제로 팔레스타인의 현실이 불행히도 수십 년 동안 똑같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팔레스타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 똑같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구분될 만한 독특함 따위는 없는 것일까?

마침내 나는 상영관에서 나가 세 번째 영화가 끝난 후 진작 나가버린 다른 예술가들을 따르기로 했다. 그들을 상영관 밖으로 몰아낸 것은 지루함이나 치욕스러움이 아니었다. 그 영화들이 묘사하는 현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나간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뒤늦게 깨달았던 스크린의 사기를 벌써 알아챈 것뿐이었다.

그들은 상영관 건물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경쟁적인 뉴스 보도에 영화를 찍는 카메라의 미학과 선택까지 감염되었다며 다들 분개했다. '장면이 될 만한 것만 찍는다'는 이런 태도를 잭 퍼세키안 역시 그의 논문에서 비판했다. 무엇보다도, 삶으로 향한 길을 찾아내는 능력은 근사한 장면으로 찍을 수가 없다. 그거야말로 가장 장면이 안 되고, 사진발도 안 받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수확 끝난 벌판을 훑어 남은 밀 이삭을 줍듯, 생명을 찾아 샅샅이 뒤지는 숨은 능력 말이다. 이것이 압부드가 정확한 순간에 얼굴을 들어 새 숨을 들이쉬는 능력이며, 밧지니가 모래더미를 옮기고 또 옮겨서 여행을 계속하는 능력이다. 때로 예술은 수확 끝난 벌판이다. 누구나 스스로 찾아낸 것밖에 얻을 수가 없다.

옮긴이 주

1) 타이시르 밧지니 :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25회 아다니아 쉬블리의 '시간을 넘어'라는 글에 이 예술가의 사진이 실려 있다.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www.palbridge.org' 기획.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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