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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 쓰기 어려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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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 쓰기 어려운 시대'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36> 4.3사태와 나크바

모함마드 씨, 귀국 후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폭력과 억압, 불안이 일상화 되어 있는 그 곳이라 이렇게 안부를 묻는 것이 여기서처럼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님을 실감합니다.

이번에 당신이 보낸 글은 그냥 입 다물고 있기에는 너무 감동적이어서 이렇게 몇 자 답글을 써 봅니다.

모함마드 씨, 2년 전 우리 두 사람은 잠깐일망정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주에서 열린 4.3항쟁(혹은 4.3사태) 기념 문학 강연회에 강연자로서 함께 참여했을 때였지요. 전국에서 꽤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는데, 강연이 끝난 뒤에는 그들을 따라 4.3 수난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북촌 마을을 찾아가 평화와 상생을 기원하면서 동백나무 한 그루를 심기도 했습니다.

날씨는 심술 궂어 심은 나무가 제대로 살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바람이 여간 거세지 않았습니다. 제주 특유의 맵찬 강풍에 육지에서 온 문인들은 사뭇 놀라 몸을 옴추렸는데, 눈부시게 흰 거품을 말갈기처럼 날리면서 잇따라 달려오는 파도들, 그리고 파도의 그 지독하게 시퍼렇던 색깔이 생각납니다. 단 이틀 동안에 무자비한 학살로 500여 명이 사라져 무남촌(無男村)으로 변해 버렸던 북촌의 원한과 분노가 그 독한 푸른빛을 뿜으며 하얗게 들끓는 듯 했습니다. 그 바닷가로 가면서 나는 팔레스타인의 슬픔과 분노가 북촌의 그것과 같은 것이어서 당신의 은빛 머리칼이 짙푸른 파도의 머리에서 들끓는 눈부시게 흰 포말의 색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모함마드 씨, 한국 현대사의 최대 참사인 제주 4.3사태 발생했던 1948년은 당신네도 역시 대참사를 겪은 해였습니다. 그 날 당신의 강연에서 나는 나크바(Nakba, 대참사)란 단어를 처음 들었죠. 저항하는 수천 명의 민중이 희생된 채 팔레스타인 땅이 신생국 이스라엘의 식민지로 전락한 1948년의 나크바 이래, 당신네는 지금까지 60년 가까운 세월을 비참한 연옥의 생활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 날 강연에서 당신과 나는 마치 사전에 교감이 있었던 것처럼 똑같이 문학과 '기억'의 문제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당신은 "시는 시드는 것, 사라지는 것, 죽어가는 것들을 기억하는 것이다"라고, 즉 당신의 문학은 '기억의 문학'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시드는 것, 사라지는 것, 죽어가는 것들'의 중심에는 팔레스타인 민중이 놓여 있겠죠.

당신의 '기억의 문학'은 나의 식대로 말한다면 '기억 투쟁의 문학'입니다. 나는 내 몫의 강연에서 '기억 투쟁'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1948년의 제주 참사는 역대 독재 정권에 의해 철저히 금기의 영역으로 묶인 채 반세기 넘도록 망각을 강요당해 왔습니다. 생존자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그 참사에 대한 기억을 강제로 지우려는 권력의 만행을 나는 '기억의 타살 행위'라고 부르고, 그 공포정치 속에서 참사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산다는 게 너무 두려워 스스로 그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자포자기를 나는 '기억의 자살 행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문학은 기억의 타살, 자살을 거부하고, 참사의 진실·진상을 망각에서 구해내는 '기억 투쟁의 문학'이어야 했습니다.

모함마드 씨, 당신이 한때 문학의 사회적 의무에 대해 회의했듯이 나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붕괴의 대참사를 겪은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작가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서정만을 노래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곧 깨닫게 되었죠.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다"라고 했을 때, 그 시는 서정시를 뜻합니다. 브레히트의 시 <서정시 쓰기 힘든 시대>에서 시인의 펜대를 움직이게 한 것은 사과꽃의 아름다움 같은 서정이 아니라 화가(히틀러)의 언행과 같은 정치적인 것입니다.

모함마드 씨, 자기 땅에서 추방되어 해외에 떠도는 이산 동포들의 고향땅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감동적으로 묘사된 당신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원래 이산 유대인을 뜻했던 이 단어가 지금은 종족에 관계없이 일반적인 이산 난민을 지칭하는 말이 되어 있지만,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 민족의 수난과 관계있는 이 단어를 사용하기 꺼려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수난과 이산을 경험했던 유대 민족이 오늘날에는 도리어 점령자·압제자로 군림하면서, 팔레스타인 땅에 수많은 죽음과 난민· 이산민을 발생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글에서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는데, 그는 '갓산 카나파니'입니다. 민주화투쟁으로 들끓던 1980년대에 한국의 저항적 작가들이라면 대개 읽어 보았을 그의 소설 <불볕 속의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그 소설도 자기 땅에서 강제로 뿌리 뽑혀 추방당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던 듯한데, 그 작가 역시 죽어서도 고향에 못 돌아가고 객지에 묻혀 있으니 팔레스타인이 처한 가혹한 운명이 아프게 내 가슴을 칩니다.

좋은 글을 읽게 해 준 데 감사를 드리며, 여전한 건필을 기원합니다.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www.palbridge.org' 기획ㆍ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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