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정파의 지도부는 통제권을 상실한 채 "협상 체결 후 평가해보자"는 원론적인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단식농성도 천정배 따로, 김근태 따로
한미 FTA 협상를 반대하는 측에서도 미묘한 주도권 싸움이 엿보였다. 27일 오전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두 개의 한미 FTA 관련 모임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귀빈식당 제1실에서는 김근태 전 당 의장과 신기남, 우원식, 지병문, 홍미영 의원 등 한미 FTA 협상에 비판적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우리당 한미FTA체결에 따른 대응방안 논의를 위한 의원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 전 의장은 "한미 FTA 협상은 짜여진 시간표를 따라 질주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참상이고, 재앙"이라며 "한미 FTA 협상을 두고 국론이 양분되어 있고 이대로 묵과한다면 파국적 상황이 올 수 있음을 심각하게 인정해야 한다"며 협상 중단을 요구했다.
김 전 의장은 간담회 뒤 단식농성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간담회에 참석한 채수찬 의원은 "국회의사당에 들어오는데 천정배, 임종인 의원이 양쪽에 농성하는 것을 보니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며 "극단적인 반대 표시는 수용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같은 시각, 귀빈식당 제3실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한미FTA 협상에 따른 국회 대응 방안 논의를 위한 정당·원내단체 연석회의'는 아예 무산됐다.
이 연석회의는 천정배 의원이 주도하는 민생정치모임이 각당에 제안한 것으로 한미 FTA 협상 반대에 입장을 같이 하는 열린우리당 의원 일부와 통합신당모임 소속 의원, 민주노동당 의원 등이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민노당을 제외한 다른 교섭단체 소속 의원들이 일체 응하지 않았다.
연석회의 무산 뒤 정성호 의원은 "각 정당이 공식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한다 해도 한미FTA 협상에 문제의식을 가진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참여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무산됐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정 의원은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겨냥해 "당 지도부가 사실상 찬성 입장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은 것 아니냐"며 "혹여 소수 정파의 제안이라고 격이 맞지 않는다고 참여하지 않는 행태라면 매우 유감스럽다"고 비판했다.
천정배 의원, 김근태 전 의장의 단식농성 장소도 국회 본청 출입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뉘었다. 천 의원은 전날부터 출입문 밖 왼쪽에 천막을 치고 농성장을 차린 반면 김 전 의장은 출입문 안쪽 본회의장 앞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무소속 임종인 의원은 천 의원의 반대편인 출입문 앞 오른쪽에 별도의 천막을 쳤다.
전날 천 의원의 단식 전 김 전 의장과 천 의원은 비공개 오찬을 함께했고, 이날도 김 의장이 천 의원의 단식농성을 격려 방문하는 등 외형적으로는 마치 '반(反)한미FTA' 연대라도 형성한 듯 보였으나, 양측의 참모들은 저마다 두 사람의 단식은 별개라는 말을 강조했다.
이러다 보니 한나라당은 이들의 단식을 "정치 쇼"로 규정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이주영 의원은 "한마디로 한미 FTA를 이용해 주도권 잡기를 하겠다는 것"이라며 "대표적인 범여권 주자로 홀로서기 위해 한미 FTA를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통제권 상실한 열린우리당 지도부
구여권의 정파 가운데 원내 교섭단체(20명) 규모 이상이 되는 열린우리당과 통합신당모임의 내부 혼란도 점입가경이다. 무엇보다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유보적인 태도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재성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한미FTA 협상을 둘러싸고 (국회가) 찬반논란에 휩싸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열린우리당은 '선평가, 후판단'이라는 원칙에 변함이 없다"며 기존의 입장을 재차 밝혔다.
최 대변인은 "전문가들을 통해서 이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면밀하게 분석하고 판단한 뒤 국회 비준에 대해 판단할 것"이라며 "국익 우선의 원칙에 따를 것"이라고만 밝혔다.
당 지도부도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정세균 당의장, 장영달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는 이날 오전 당 한미FTA특위를 열어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에게 '협상에서 지켜야 할 5가지, 얻어야 할 5가지' 성명을 전달했으나 이 자리에서 채수찬 의원은 "42명의 의원이 서명한 성명을 마치 당의 의견으로 전달하는 것은 문제"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채 의원은 "당 내에서도 무조건 찬성, 반대 등 스펙트럼이 넒은데 특정 수준을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당 지도부가 전달하는 것에 반대한다"며 "당이 국민의 공감대를 얻으려면 의원들의 공감대도 얻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이에 대해 정세균 당 의장은 "성명 작성을 내가 지시했다"며 "전체 의원이 결의한 바는 없지만 정당의 대표인만큼 다수가 공감할 만한 상황에서 국민들의 관심을 표명하는 유연성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무마하려 했다.
임종석 의원도 "협상 막바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하는 것"이라며 "대체적으로 협상에 반영해야 하는 내용들이며 얼마나 반영됐는지는 나중에 평가하면 될 것"이라고 거들었다.
반면 송영길 당 한미FTA특위 위원장은 "이것은 최소공약수"라며 "당의 의견이 아니라 협상 과정에서 여러가지 안 중의 하나로 참고하라는 것"이라고 말해 당 지도부 내에서도 이날 성명에 대한 인식의 차가 있음을 드러냈다.
조배숙 "내가 비준거부 앞장설 것"…강봉균 "개방 않고 선진국 되나"
통합신당모임도 사정은 마찬가지. 양형일 대변인은 민주노동당 등의 한미 FTA 국정조사 요구와 관련해 "협상이 최종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정조사를 제의한 것은 성급한 감이 적지 않다"며 "국회를 우선 열어 한미 FTA 특위와 상임위별로 쟁점사항을 논의하거나 최종 협상결과를 보고 국회에서 비준 여부를 결정할 때 논의해도 늦지 않다"고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소속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확연한 찬반론을 밝히는 등 한미 FTA 문제는 지도부의 통제권 밖의 문제가 된지 오래다.
국회 문광위원장인 조배숙 의원은 이날 오전 개인 성명을 내고 "졸속으로 진행되고 있는 협상을 즉각 중단하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인 성명을 통해 "미국의 국내법 절차에 불과한 무역촉진권한(TPA) 완료 시한에 맞춰 무리하게 타결을 서두르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는 일이 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조 의원은 "국가 제소권 인정으로 국가정책주권과 나아가 헌법이 위협받을 수 있고 후속 입법과정에서 국내법과 제도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는 지경에 이르고 있는 등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아 보인다"며 "이는 국민을 볼모로 도박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이에 따라 그는 "고위급 회담을 통해 협상이 타결된다 하더라도 국회는 결코 비준동의를 하지 않을 것이고 이를 위해 내가 앞장 서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반면 강봉균 의원은 이날 한미 FTA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을 향해 "개방하지 않고 선진국을 만들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라"고 반격했다.
강 의원은 이날 오전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한국 선진화포럼 주최 '인기영합적 경제정책을 넘어서'라는 주제의 토론회에 참석해 이같이 말하고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정치인들이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FTA를 확대해야 하는 이유는 선진국이 되려면 대안이 없기 때문"이라며 "한미 FTA를 반대하는 세력은 매일 TV에 나오지만, 찬성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돼 있는 것도 문제"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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