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초순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의 '성공적인' 미국 방문이 있었다. 북미 사이에 많은 대화가 오고가서 북핵 2.13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는 듯했다.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동결된 북한 계좌 해제가 발표되던 3월 19일까지만 해도 낙관적인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해제된 북한자금의 대북송금이 지연되고 제6차 6자회담이 결렬되면서 2.13합의 이행은 지금 잠시 주춤거리고 있다.
한국정부의 고위관계자들은 기술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송금이 지연되고 있지만 곧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도 대니얼 글레이저 재무부 차관보를 베이징에 보내는 등 송금지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관련국들의 이런 움직임을 볼 때 BDA 송금을 지연시킨 기술적인 문제는 곧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제6차 6자회담이 결렬된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기술적인' 문제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송금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던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한 이유 그 자체다. 그것은 바로 BDA가 불법자금을 세탁했다는 사실이다. BDA의 돈을 북한의 은행으로 송금하기로 한 기관은 중국은행(BOC)이다. 중국은행은 송금을 해도 불이익이 없을 것이라는 미국정부의 보증에도 불구하고 불법세탁 때문에 혹시나 피해를 입을까 우려해 송금을 거부했다.
지난 18개월 동안 6자회담의 진전을 가로막았던 BDA 문제는 러시아 등 제3국을 통해 북한의 은행으로 송금이 이루어지면서 마무리될 것이다. 그러나 BDA의 불법세탁문제는 북한의 위조지폐 유통 혐의와 관련해 언제 어떤 식으로건 다시 등장할지 모른다.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시민사회, 박수만 칠 것인가?
송금 지연 같은 어이없는 일로 6자회담이 결렬된 것을 두고 세계협상사에 남을 일이라고 냉소를 보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2.13합의 이행과정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2.13합의에 숨어 있는 걸림돌이 한두 개가 아니기 때문이다.(☞관련기사 "'2.13합의' 이행 앞에 놓인 7가지 걸림돌" )
2.13합의 이후 많은 전문가들이 정세의 큰 변화를 전망하고 있지만, BDA 송금지연에서 알 수 있듯이 예측하지 못한 복병들이 등장해 발목을 잡는 상황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조지 부시 미 행정부의 정책 추진력은 약화되고, 최악의 경우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전환이 용두사미가 되어버리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이 글에서 화두로 삼고 있는 2.13합의에 대한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참여는 이같은 상황을 예방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2008년까지 대북정책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일각에서 우려하는 최악의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합의 이행 앞에 놓인 걸림돌을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2.13합의에서 약속한 바와 같이 4월 14일까지 60일간의 초기조치가 마무리되고 6자 외무장관회담이 열리게 되면, 한반도 정세는 급물결을 타면서 탈냉전과 평화구축을 위한 본궤도에 오르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시민사회도 그 역할을 찾아야 한다. 지금까지 안보와 관련된 국제정치 무대에서의 주요 행위자는 항상 정부였다. 6자회담 진행과정에서도 부시 행정부를 비롯한 6개국 정부가 주요 행위자가 됨으로써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시민사회는 정세변화를 지켜볼 뿐이었다. 좋은 결과에 대해서는 박수를 치고, 나쁜 결과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한정된 역할만을 하고 있다.
꿈틀거리는 '53년 체제'
그러나 현재 한반도와 동북아 질서에서는 새로운 '판짜기'가 시작되고 있다. 정전협정이 만들어낸 한반도의 '53년 체제'에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는 우리가 앞으로 어떤 '판'에서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하게 해줄 것이다. "냉전과 대결의 '판'이냐, 평화와 공존의 '판'이냐"와 같이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다. 또 이같은 변화를 누가 이끄느냐에 따라 머지않은 미래에 만들어질 새 무대의 주인공이 누가 되느냐도 결정될 것이다.
현재 6자회담의 진전과정에서 남북관계는 보조적인 역할로 국한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 한반도 문제가 국제화될수록 당사자인 우리의 몫과 역할이 줄어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새롭게 만들어지는 신질서를 강대국의 논리가 주도하게 될 것이고, 시민사회의 참여는 여전히 제약될 것이다.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었던 구한말과 해방정국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 정세변화에 시민사회가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가지는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어진다.
한국전쟁 이후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시민사회는 결과를 가지고 심판하는 역할을 뛰어넘어 방향을 미리 제시하고, 긍정적인 요인들을 촉진시키고, 부정적인 요인들은 완화하고, 아울러 합의된 성과를 지켜내는 사회적 힘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이에 시민사회의 활동방향으로 몇 가지를 꼽아본다.
첫째, 한반도 평화체제를 공론화하는 것이다.
2.13합의의 이행과정에서 '53년 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 남-북-미-중이 참여하는 4자 평화포럼을 통해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가 논의되는 것과 발맞추어 우리 사회 내부에서 평화체제에 대한 공론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아울러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내용, 그리고 그 둘의 상호관계에 대한 토론도 활발히 진행해야 한다.
평화협정 체결뿐만 아니라 남북한 사이에도 군사적 신뢰구축과 군축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해야 한다. 이미 1991년에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대규모 부대이동과 군사연습의 통보와 통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문제, 군(軍) 인사교류와 정보교환, 대량살살무기와 공격능력 제거를 위한 단계적 군축 등에 합의한 바 있다.
교회선언과 '부시에게 보내는 편지'
한반도 평화체제를 공론화하기 위해서는 학술적인 논의도 필요하고, 대중운동도 필요하다. 현시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대표성, 전문성, 기동성을 가진 각계인사들의 느슨한 네트워크이다. 정세변화의 본질에 대해 긴밀하게 협의하고, 필요한 시점에 여론조성을 위한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1년에 세계사적인 탈냉전의 물결 속에서 만들어진 '한반도 통일을 위한 평화군축협의회'(평화군축협의회)가 모델이 될 수 있다. 각계인사 200여 명이 '한반도 통일을 위한 평화군축선언'을 하고, 그 이후 '평화군축협의회'를 결성해 탈냉전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국면에서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둘째, 정세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정책역량을 확보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여론형성을 주도해나갈 수 있는 역량이다. 무엇보다 이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게 필요하다. 앞으로의 정세는 한반도 비핵화를 고리로 종전선언과 평화체제, 북미관계 정상화, 남북관계 진전, 동북아 다자안전보장체제 마련 등 상당히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사안이 맞물리면서 전개될 것이다.
시민사회는 이런 여러 사안에 대한 정책대안과 상호관련성, 이행순서 등을 연구·개발해야 한다. 이렇게 생산한 정책을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형식으로 정부와 국민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정책의 수준은 높고, 형식은 세련되며, 시기는 적절해야 한다.
1988년 2월 있었던 '한국교회평화통일선언'(교회선언)과 2001년 5월에 있었던 '부시 대통령에게 드리는 글'(대 부시 편지)을 발표한 것은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 '교회선언'은 한국사회에서 통일논의를 촉발시키고 그 방향을 제시했다. '대 부시편지'는 당시 미국 조야에서도 큰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셋째, 국제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와 한반도 문제의 다자적 접근은 현정세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에 비춰볼 때 국제연대 강화를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전환이 결실을 맺을 수 있게 국제사회와 연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미 상원 외교위원장을 북한에 보내자
2.13합의를 이행하는 데 있어서 특히 비중이 큰 곳은 미국 의회다. 테러지원국가 지정 해제와 적성국교역법에서 북한을 제외하는 문제를 비롯해 미국의 대북지원에 이르기까지 의회가 다뤄야 할 사안이 많다.
미국 의회가 이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북미관계 개선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 가령 한국의 시민단체들이 미국 의회를 방문해 전·현직 상원 외교위원장(공화당 리처드 루가 의원, 민주당 조지프 바이든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미국 의회 대표단의 방북을 건의해 실제로 이행된다면, 미 의회도 북핵문제 해결의 한 주역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다.
2차 북핵위기가 조성된 이후인 2003년 한국의 시민단체와 정치권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방미단'을 구성해 미국 의회와 조야에 한반도 평화에 대한 한국 시민단체들의 의사를 전달한 사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6자회담' 같은 것도 추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몽골 등의 시민단체들이 참여해 5월말 몽골에서 열리는 '무력갈등예방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쉽(GPPAC) 동북아지역회의'를 민간 차원의 6자회담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간 6자회담을 추진하면서 국회 차원의 6자회담과 결합시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는 4자 정상회담, 6자 정상회담, 남북미 정상회담 등 각종 정상회담에 대한 추측만 무성하다. 다양한 국제연대는 여러 형태의 주변국 정상회담 가운데 한반도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회담을 개최하는 여건을 만드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통일논의 활성화가 준비 없는 통일을 예방
넷째, 남북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지금 한반도 문제는 6자회담이라는 다자논의 속에서 풀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당사자로서 남과 북의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남북한의 노력이 부족한 채 한반도 문제가 국제화되면, 주변국가들이 지나치게 개입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북핵문제는 한반도 문제의 전부가 아니다. 남북 사이에도 고유한 영역이 있다. 개성공단 본단지 분양을 서두르고, 회복될 기미가 보이는 금강산 관광도 더욱 활성화시키며, 철도·도로 연결에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 남북 사이의 군사대화도 활성화해 군사적 대결을 완화해야하며,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도 계속해야 한다.
아울러 2000년 6.15공동선언을 실천하기 위해 합의사항들에 대한 세부적인 이행방안을 심도 있게 토론해야 한다. 특히 6.15선언 2항에 따른 통일논의도 활성화해 통일의 발전경로에 대한 국민적인 합의기반을 튼튼히 해야 한다. 통일논의를 활성화해야 준비없는 통일을 예방할 수 있다. 통일논의 활성화는 현재 진행중인 모든 현안들을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모아내게 될 것이다.
올해 6.15 통일대축전은 남북 정부의 지원 속에 평양에서 열린다. 6.15 행사의 성공적인 개최도 남북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다.
요코다 메구미 유골의 진실은?
다섯째, 2.13합의의 쟁점사안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일본 정부에 요코다 메구미 유골사건에 대해 공정한 진상조사를 요구할 수 있다. 북한은 자신들이 납치해 사망한 메구미의 유골을 2004년에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일본정부는 이 유골이 가짜라고 발표해, 일본인 납치문제가 악화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는 6자회담에서도 쟁점이 되어 2.13합의의 원만한 이행을 가로막고 있다.
메구미의 유골이 가짜라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 북한은 부인하고 있다. 또 일본정부가 유골이 가짜라고 밝힌 것에 대해 세계적인 과학잡지 <네이처>는 2005년 3월 17일자 사설에서 "일본 정치인들은 정치를 위해 과학을 희생시키지 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2004년 메구미의 유골을 전달받은 일본정부는 3개의 기관에 감정을 요구했다. 2개의 기관은 감정불가 판정을 내렸고, 다른 한 기관은 "확정적이 아니다", "샘플이 오염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로 인정했다. 일본정부는 이를 가지고 감정결과 DNA가 다르다고 발표했다. (최재천, <한국외교의 새로운 도전과 희망>, 335~336)
이러한 의문이 있기 때문에 북한과 일본이 인정하는 공정한 3국 감정기관에 재조사를 의뢰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여야의 대선후보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도록 요구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중 있는 정치인들이 나선다면 일본 여론에 대한 호소력이 그만큼 클 것이기 때문이다.
1999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 100주년 기념 평화회의'에 참가한 비정부단체(NGO)들은 '신외교(New Diplomacy)'라는 개념을 주창했다. 정부만 외교의 주체가 될 때 지구촌의 평화를 이룰 수 없으므로 민간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였다. 반대로 정부 차원에서는 정부 정책의 대국민 홍보를 강조하는 '퍼블릭 디플로머시(Public Diplimacy)'가 강조되기도 한다. 두 개념 모두는 외교에서 민간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한반도 정세가 바뀌는 상황에서 시민사회가 외교, 안보, 통일 분야에서도 능동적인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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