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헐리는 동대문구장…전화위복 계기 삼아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헐리는 동대문구장…전화위복 계기 삼아야"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3/26] 야구해설위원 박노준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한국 야구의 산실이자 고교야구의 메카였던 동대문야구장이 오는 11월에 철거됩니다. 최근 서울시와 대한야구협회, 한국 야구위원회가 이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는데요. 아마 지금 4,50대 중년들 가운데 동대문구장에 얽힌 추억 갖고 계신 분들 많을 겁니다. 그 당시 고교야구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경기를 보려는 관중은 물론 냉차행상과 암표상들로 동대문구장 앞이 북새통을 이뤘는데요. 이런 추억의 장소인 동대문구장이 철거된다는 소식에 아마 많은 분들이 서운해 하실 겁니다.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1980년대 한국 고교야구의 전설이자, 선린상고의 야구천재로 최고의 인기를 모았던 박노준 해설위원을 초대해 동대문 야구장에 얽힌 추억과 고교야구를 비롯한 우리나라 야구계의 현실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야구인 박노준 해설위원입니다! 박노준 위원은 선린상고 시절 한국 고교야구의 최고 선수로 평가받았고 고려대를 졸업한 후 두산 베어스의 전신인 OB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기아를 거쳐 쌍방울에서 12년간 프로 선수생활을 했고 1994년 골든글러브상을 탔습니다. 97년 은퇴 후 아시아 야구연맹 순회코치를 역임 했고 현재 세계야구연맹 기술위원을 비롯해 대한야구협회 이사, 한국야구위원회 규칙위원을 맡고 있고 야구 해설위원, 미국 메이저리그의 뉴욕 메츠 팀 라운드 로딩 코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박노준 :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인규 : 저도 만나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11월에 동대문 야구구장을 철거하기로 했어요. 동대문 야구장을 거쳐간 선수가 부지기수로 많겠지만 박노준 위원이야말로 그곳에서 야구 인생의 절정을 누리셨는데 많이 섭섭하실 것 같습니다.

박노준 : 그렇습니다. 사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야구인들, 옛날에 고교야구를 사랑하고 성원해 주신 분들 모두가 굉장히 서운해 하고 있어요.

박인규 : 연말인가요? 프로야구 8개 구간 선수들이 모두 모여서 동대문 야구구장을 철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집회도 가졌는데, 결국 철거가 결정됐어요. 야구선수들의 바람, 팬들까지도... 그 바람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양이죠?

박노준 : 그렇습니다. 사실 야구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을 없앤다는 생각에 처음엔 좀 그랬어요. 그런 와중에도 야구협회와 KBO, 서울시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현실적 방안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그래서, 1년에 보통 700~800경기를 소화하면서 많은 역할을 했던 동대문 구장인데 이 야구장을 없애 버리면 나머지 아마추어들은 어디서 해야 되느냐, 이렇게 접근을 하게 되니까 서울시에서도 이해하고 공감을 하고, 축구장은 굉장히 많았지만 야구장이 절대부족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서울시에서도 7개의 야구장을 각지에, 공터 같은 곳을 확보해서 지어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서로 또 양해각서를 교환하게 됐습니다.

박인규 : 야구장 하나를 없애고 7개를 지어 준다는 건 숫자로는 굉장히 이득인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동대문 야구장에 얽힌 추억 같은 걸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너무 아쉬울 것 같아요.

박노준 : 그렇죠. 공원화해서 그곳을 꾸민다고 하는데 그 옆에 자그맣게, 야구의 메카, 성지였다는 걸 표시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박인규 : 동대문구장은 공원이 되는군요. 그래도 최소한 여기가 추억이 서린 동대문 야구장이라는 표시는 남아있을 것 같고, 동대문 야구장이 만들어진 게 언제입니까?

박노준 : 1958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초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라이트시설을 해줘서 야간에, 박인규 선생님도 라이트경기시설 야구를 보러 가셨다고 하셨는데, 미국에는 양키 스타디움, 일본에는 고락 구엔이 있어요. 우리도 동대문구장이 계속 존속이 되면서 거기다 새로 야구장을 다시 짓는다든지 했으면 좋겠는데 현실적으로는 사실 그쪽에 교통이나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외곽으로 돌리는 방안을 검토해서 이번에 성사가 됐습니다.

박인규 : 70년대만 해도 동대문 야구장이 약간은 외곽이었는데 지금은 중심이 됐으니까. 좀 전에 말씀하실 때 동대문 야구장에서 1년에 700~800경기를 하셨다고 하셨는데, 그럼 아마추어 경기는 거기서 다 한건가요

박노준 : 그렇죠. 계속 해왔고 요즘에도 지금 서울시 춘계 고교리그전을 하고 있습니다.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때로는 프로 2군경기도 했고, 그 중에서 특히... 고교야구의 4대 메이저 대회죠,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배기, 황금사자기... 항상 할 때마다 성동원두가 아주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왔습니다.

박인규 : 성동원두 말씀을 들으니까, 예전에 중계하시는 아나운서 분이 항상 성동원두라는 말로 시작했는데... 박노준 위원은 79년부터 81년까지 고교야구선수로 활동하셨죠.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굉장히 두각을 나타내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인가요? 부산상고와 결승을 했는데 15대 1로 이겼다고...

박노준 : 그렇습니다. 79년이죠. 당시 대통령배 결승전은 부산상고... 윤학길이라는 아주 대형선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고교야구 선수들은 1학년고 3학년은 신체사이즈부터 차이가 나죠. 한창 클 때니까. 그런데 어리고 작은 선수가 1번을 치면서 때로는 마운드에 있기도 하고 외야에 있다가 다시 올라와서 던지고 휘젓고 다니니까 굉장히 귀여워했죠. 그래서 여러 선배 선수들을 제치고 상을 받은 것 같고, 저 하나 잘했다기보다는, 사실 그때 전력상 많이 밀렸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탄탄한 팀웍으로 다득점을 하면서 경기를 이긴 것 같습니다.

박인규 : 그 당시 윤학길 선수는 몇학년이었어요?

박노준 : 3학년이었죠.

박인규 : 와.. 그럼 윤학길 선수 입장에서는 정말 치욕의 날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겠네요.

박노준 : 그때 당시 전문가들도 10대 0으로 전부 다 부산상고가 일방적으로 우승을 한다고 했어요. 저희도 사실 준우승만 해도 대만족이라고 하면서 경기에 임했던 기억이 납니다.

박인규 : 제가 기억하기로는 박노준, 김건우, 두 분이 쌍두마차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이외에도 두 선수가 굉장히 많은 활약도 하셨고, 동대문구장을 생각하시면 박노준 선수 입장에서는 이 경기는 정말 못 잊겠다... 하는 게임이 있을 것 같아요.

▲ ⓒ프레시안

박노준 :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81년도 고3때인데요, 당시 메이저 대회인 봉황배기 결승전에서, 8월 26일이었습니다. 날짜도 잊어버리질 못하겠어요. 경복고와의 대결인데, 저희가 청룡기에서 경복고한테 졌습니다, 결승에서. 그래서 저희가 설욕을 하려고 마음 단단히 먹고 들어갔는데 1회에 제가 3점째 들어오면서 홈에서 슬라이딩을 했는데, 그만 발목이 꺾이게 됐습니다. 인대가 끊어지고 발목이 세 동강이 나고, 그 전날 비가 와서 경기가 하루 연기가 됐어요. 그런데 그라운드가 흙이었으면 먼지 나고, 마른 흙이었으면 미끄러졌을 텐데 비가 와서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파이크가 박혀 버렸어요. 왼쪽 발목에, 몸이 앞으로 밀려 나가면서 큰 부상을 당한 것이 기억에 남고. 두 번째는 고2땝니다. 당시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지금 삼성의 감독인 선동렬 감독이 이끄는 광주일고와 결승에서 맞붙었는데 제가 홈런을 때리면서 3안타를 때리고 마운트에서도 호투를 하면서 우승했던 기억이 가장 오래 남고 있고.

박인규 : 그 홈런을 선동렬 선수로부터 빼앗은 겁니까?

박노준 : 그랬었죠.

박인규 : 선동렬 선수가 거의 불세출의 투수라는 말을 듣는 분인데, 선동렬 선수도 거의 못 잊겠는데요? 혹시 그 뒤에도 그 게임에 관해서 서로 말씀을 나눠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박노준 : 네. 왜냐 하면 아시다시피 황금사자기는 동아일보, 대통령배는 중앙일보, 봉황배기는 한국일보. 이런 식으로 메이저 신문사에서 주최를 합니다. 그래서 그때만 되면 항상 신문사에서 다뤄 주죠. 그렇기 때문에, 자꾸 회자돼서 인터뷰때 자꾸 밝혀지는 것 같습니다.

박인규 : 최고의 명승부다, 이렇게 해서. 선린상고 선수 시절에 언론에서 별명을 독일병정이라고 했어요. 왜 그랬어요?

박노준 : 그때 사실 집중하기 위해서 모자를 눌러썼던 것이 기자들이 볼 때, 기자들 옛날에 1차, 2차대전 할 때 모자를 눌러쓴 걸 보고 그런 쪽에서 따와서 닉네임을 붙여준 것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팀에서 부르는 닉네임은 여우였습니다.

박인규 : 전혀 다른데 왜 또 여우가 됐죠?

박노준 : 야구를 한 가지... 투수면 투수, 타자면 타자만 잘하는 게 아니라 베이스러닝이라든지, 여우 같이 플레이한다고 해서 붙여준 것 같습니다.

박인규 : 김재박 감독이 여시라고 했던 것 같은데 거의 그 이상으로 맞먹는...

박노준 : 김재박 감독도 참 야구를 알고, 아주 영리하게 했죠..

박인규 : 제가 처음 야구장에 간 게 군산상고하고 경남고등학교인가 부산고등학교인가.. 해서 5대 4로 이겨서, 역전을 한, 72년 10월인가로 기억하는데, 제가 운동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혼자서 야구장 가서 봤던 기억이 나는데, 저 같은 사람도 그때 가서 봤던 걸 보면 고교야구가 굉장히 인기가 좋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당시에 왜 그렇게 고교야구가 인기가 있었을까.. 생각해 보셨어요?

박노준 : 제가 볼 때는, 고교야구선수들이 그냥 순수하게, 모교의 명예를 위해 머리를 모두 깎고. 그리고 대회 끝나고 나면 모든 선수들의 유니폼이 흙먼지로 가득찼어요. 굉장히 더러웠죠, 아주 슬라이딩도 많이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 선생님도 군산상고 경기를 보셨다고 하셨는데, 군산상고를 나오지 않더라도 전라남도나 북도, 그쪽이 고향이거나 출신인 분들이 가서 열심히 응원했던 그런 지역연고가 강하지 않았는가.

박인규 : 말하자면 향우회 모임 같이...

박노준 : 네. 그런 것이 굉장히 심했고. 또 성원을 많이 해줬고. 그것이 프로야구로 이어져서 초창기 프로야구가 흥행했던, 현재까지 오게 된 토대가 됐던 것 같습니다.

박인규 : 고교야구 열기가 프로야구로 가면서 상대적으로 고교야구는 좀 떨어졌군요.
박노준 위원은 야구를 언제부터 왜 하시게 된 겁니까

박노준 : 초등학교 4학년 때 몸이 사실 상당히 약했어요. 그래서 3개월만 하기로 약속하고 운동을 했는데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고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어서 열심히 했더니 기량이 올라와서 나중에 그만 둔다고 할 때는 당시 감독님이 말리셨어요. 더 해야 된다, 잘한다.

박인규 : 너 같은 실력에...

박노준 : 그래서 하게 됐고. 그때 했던 것이 지금까지 영원한 job이 되고 말았습니다.

박인규 : 고교야구선수 중에서 아마 제가 기억하기로도 박노준 선수만큼의 인기를 누린, 단순히 인기가 아니죠. 실력이 있으니까 그랬는데, 사실 고교야구 때의 성적에 비하면 프로에 와서는 상대적으로 좀 아쉽다고 보시는 분들이 많은데.... 부상 때문에 그런가요? 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세요?

박노준 : 사실 매스컴에 알려진 것보다는 기량이 올라왔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맴스컴에 부응하기 위해서 노력을 끊임없이 했어요. 거기 맞추기 위해서. 그래서 좀 과장되게 매스컴을 타서 유명해진 것도 없지 않아 있었고.

박인규 : 본인의 실력이 어떻게 보면 고등학교 때 과장된 거다.

박노준 : 예.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리고 프로에 와서는 사실 운동선수는 야구뿐 아니라 좀 유연해야 됩니다. 유연하면 부상을 당하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몸이 딱딱한 편이었기 때문에 슬라이딩할 때도 그랬고 공을 던질 때도, 때리고 뛸 때도 그랬고. 그래서 공만 맞아도 부러지고 슬라이딩 잘못 해서 늘어나고 끊어지고, 이런 잔부상을 굉장히 많이 당했습니다. 그래서 현역 12년 하는 동안 풀타임을 뛴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부상이 많았던 게 아쉬웠고 힘들었죠 그런 점이. 그래서 개인적으로 볼 때는 프로야구선수로서의 자질이 많이 부족했어요.

박인규 : 그건 겸손의 말씀이신 것 같고. 야구선수로서 10대, 20대, 30대 초반까지 보내신 건데, 야구선수로서 돌아보면 후회는 없다. 아니면 이건 좀 아쉽다. 그런 건 없습니까

박노준 : 사실 야구를 통해서 많은 인생공부를 제대로 했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똑같거든요. 그 안에서 최고의 자리도 올라가 봤고 벤치에서 야구장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인생공부도 했고. 그래서 그때 그렇게 현역을 하면서 배운 것을 토대로 사회생활 하면서 굉장히 많이 도움이 됐어요. 그렇게 엘리트, 정상에서만 계속 달려오기보다는 가끔 벤치에 앉아서 2군의 설움도 맛보면서 성장한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

박인규 : 쓴맛, 단맛을 보면서 인생을 배웠다. 상당히 긍정적으로 사시는 것 같습니다.
97년에 프로야구선수 생활을 떠나시고 지금은 야구해설가, 코치, 야구행정가로 활동하고 계신데, 우선 해설가로 아직도 많은 야구팬들과 만나고 계세요. 야구선수 하는 것과 해설하는 것과 많이 다르죠?

박노준 : 많이 다르죠. 올해 이제 경인방송에서 2000년도 메이저리그부터 해서 올해 8년차 하고 있는데, 선수들을 지도할 때는, 먼저 상대하거나 지도하려면 존경을 받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기술을 전수하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저도 사실, 우리 선배 코치들.. 많이 꾸지람도 듣고 꿀밤도 맞아 가면서 배웠는데 요즘 선수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은 대화를 해야 되고, 코치가 일방통행은 절대 안됩니다. 이론으로 무장하고 이해를 시켜야지 그렇지 않으면 퇴출입니다. 그렇게 참 어려운 입장이고, 반면 해설도 역시 공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10분의 1만 중계자료를 쓰더라도 열흘 다 중계를 해야 됩니다. 언제 유사이에 어떠한 플레이가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세 시간 안에. 그래서 자료를 준비하는 게 굉장히 어려워요. 그리고, 해설에 있어서 철학까지 논하기는 좀 그렇지만 굳이 말하자면 긍정적으로 해설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현역때부터 했어요.

박인규 : 칭찬하는 쪽으로

박노준 : 네. 왜냐 하면, 야구라는 것은 실수 안 하기 경기입니다. 실수를 하게끔 돼 있어요 야구 경기가. 지름 7센티의 공을 방망이로 때리게 되면, 아주 총알같은 속력으로 오기 때문에... 실수를 하게 돼 있는데 중계를 하는 분들이 그걸 부정적으로 묘사했을 경우 가족들이 다 보고 있어요. 그럴 경우 선수도 잊어버리고 경기 나갈 수 있고 매번 하는 거라 잊어버릴 수 있지만 가족들에게는 큰 상처가 되거든요. 그래서 참, 이왕 같은 말을 하더라도 긍정적으로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부터 가졌는데, 아무튼 해설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아무래도 선수생활을 해보셨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사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는데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또 하나, 코치를 하시는데 아까는 발음이 좀 어려워서 소개하다 더듬었는데요, 뉴욕 메츠의 라운드 로딩 코치라고... 야구 해설 하시면서 코치를 하실 수 있는 건가요? 라운드 로딩 코치라는 게 어떤 거예요?

박노준 : 97년에 제가 은퇴를 하고 뉴욕 메츠와 연을 맺었습니다. 당시, 지금 지바 롯데에 있는 보비 밸런타인 감독이죠.

박인규 : 이승엽 선수 데려갔던

박노준 : 예. 그 감독이 당시 메이저 감독이었고. 그리고 지금 뉴욕 메츠의 제너럴 매니저라고, 오마르 미나야라고...

박인규 : 제너럴 매니저는 구단주입니까?

▲ ⓒ프레시안

박노준 :
구단주는 아니고 단장인데요, 사장보다 더 실권이 있는 자립니다 미국에서는. 제너럴 매니저가 스카트나 돈을 집행 다 하고, 코칭스태프 조합도 다 하고. 그분이 지금도 있어요. 그래서 그런 연으로 인해서 거기서 돈을 받으면서 코치 생활을 했던 것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구요.

박인규 : 지금도 가서 코치를 하시는 겁니까?

박노준 : 네. 그렇습니다. 라운드 로딩 코치라고 해서 메이저리그부터 마이너리그, 루키까지... 메이저리그는 7, 8명 되지만 트리플레이에서 루키까지는 감독, 매니저죠. 투수코치, 타격코치, 트레이너, 이 네 명이 4인 1조로 코칭스태프가 구성돼 있어요. 그 상황에서 라운드 로딩코치라는 건 피칭 코치, 히팅 코치, 베이스러닝 코치, 디펜스 코치.. 이 코치들이 한 15명에서 20명 정도가 30개 구단에 다 있습니다. 예를 들면 뉴욕 메츠... 메이저리그에 타격이 안 맞는다. 그러면 타격 코치들이 다 거기 올라와서 방망이가 잘 맞도록 서포트해주고 도와주고. 또 트리플레이에서 투수진이 계속 상대팀하고 게임할 때 얻어맞는다, 망가졌다, 이럴 경우 투수 코치들이 다 가서 다시 또 잡아주고, 이런 시스템으로 운용하고 거기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라운드 로딩 코치입니다.

박인규 : 뉴욕 메츠에 계시다니까... 지금 한국 야구팬들은 박찬호 선수 걱정이 많거든요. 갈 때는 뭔가 다시 한 번 부활하길 바랬는데 지금 시범경기에서 너무 못하고 있다... 어떻게 보세요?

박노준 : 사실 아직 몸이 덜 된 상태고, 이때쯤이면 타자들이 좀 힘을 발휘할 땝니다. 아직까지는. 투수들의 몸이 덜 된 상태여서. 그래서 현재 시범경기 때는 성적도 성적이지만 테스트하는 기간입니다. 투수들도 올해는 이 변화구를 새로 개발했을 경우 테스트하는 것. 그리고 직구도 어느 정도 스피드가 불었나.. 해서 직구 위주로 던질 때도 있고. 탐색전이죠. 그렇기 때문에 점수를 많이 줬다든지 많이 맞았다든지 이런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고는 하죠. 그렇다고 해도 박찬호 선수가 지금 사실 시범경기에서 내용은 괜찮아요. 안으로 들여다 보면, 겉으로 드러난 것이 많이 맞는다, 점수를 많이 줬다는데 아직까지는 좀 더 기다려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박인규 : 프로야구선수를 하시다가 해설도 하시고, 야구의 본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 가서 코치 생활도 7, 8년 하신 거 아닙니까. 아무래도 우리 야구하고 비교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밖에서 보시니까 우리 야구 발전을 위해서 부족하달지, 고쳐야 될 것 같은 게 생각나시는 게 있습니까?

박노준 : 미국하고 우리나라는 인프라 차원에서 굉장히 차이가 많죠. 야구장부터 해서 차이가 많은데 지난해 미국은 메이저리그가 7600만명 입장, 마이너리그만 해도 5600만 명이 입장했어요. 우리나라는 330만 명. 504경기에...

박인규 : 30배...

박노준 : 네.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야구장도 많이 만들어야겠고, 야구인구가 많이 늘어날 수 있도록 초등학교부터 그렇게 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학부형들도 자녀를 야구를 시켰을 경우 정말 낙타 바늘구멍 같은 프로야구, 될 수 있느냐... 이런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내 아들도 프로에 갈 수 있다. 그리고 대학도 얼마든지 갈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사실 삼각형.. 피라미드형이거든요. 밑에는 많지만 올라갈수록 문이 좁아지는. 그러나 정사각형, 밑에 들어가는 문도 넓고 나오는 문도 넓을 수 있도록, 야구를 하면 나중에 취직도 잘 되고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그런 것을 좀 우리 야구인들이 장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봅니다.

박인규 : 정사각형 말씀을 하셨는데, 일각에서는... 예를 들면 축구로 치면 국민들이 A매치만 재밌어하고 야구로 치면 프로야구만 보고, 그래서 뭔가 고교야구나 실업야구 부분에 대한 투자도 중요하지 않느냐. 이번에 동대문 야구장을 철거하는 대신 야구장을 7개를 만들면 그런 아마추어 야구 발전에 도움이 될까요

박노준 : 그 점을 저희들이 서울시에 강력하게 얘기했던 겁니다. 야구를 하고 싶은데, 사회인 야구가 공식적으로 결성된 것이 3천 개가 넘고 비공식적으로 5천 개가 넘습니다. 그런데 야구장이 있는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빌려서 하고 있거든요. 야구를 하고 싶어도 야구장이 없어서 못하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강력하게 얘기했고, 그래서 서울시에서 오세훈 시장이 7개의 야구장을 지어주는 것으로 합의가 됐던 겁니다.

박인규 :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동대문 야구장이 없어지는 건 아쉽지만 7개 야구장이 생기는 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박노준 : 야구인들 입장에서는 실리를 챙긴 거죠. 고마운 일입니다.

박인규 : 지금 선수로서 은퇴하신 지는 10년이 되셨고 해설가나 코치로 활동하시는데, 요즘 선수들이 야구하는 태도랄지, 일부에서는 좀 심하게 얘기하면 돈만 밝힌다. 외국에만 나가려고 한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는 것 같은데, 요즘 후배들의 야구하는 태도를 어떻게 보세요

박노준 : 사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나간다, 남겠다, 돈 많이 달라, 이런 것은 인정해야 됩니다. 이제 프로야구도 26년차가 됐구요. 그러나 지금 현실적으로 해외로 무조건 나간다고 다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현실을 이제 알았어요. 그래서 국내 프로야구 팀으로 입단하는 선수도 많이 생겼고, 옛날 같이 무조건 나가지 않고. 연봉협상에서도 선수들이 FA가 생기면서 굉장히 인건비가, 연봉이 올라갔습니다. 메이저리그가 132년, 일본이 72년이거든요. 우리가 26년차에 FA를 하고 있는데 사실 메이저리그나 일본야구가 26년차에서 이렇게 연봉을 많이 받지를 않았습니다. 반대로 말씀드리면 우리는 좀 많이 받는 편이라는 얘긴데, 이런 점을 좀 8개 구단, KBO, 선수협회가 머리를 맞대고... 얼마 전에 공청회, 포럼을 했습니다만 시즌 마치고 본격적으로 논의가 돼서 서로 좀 양보하면서 해야지 야구발전도 되고 야구인도 많이 생기고 구단도 좀 허리띠 졸라 매 가면서 경영을 해서 적자폭을 좀 줄여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보죠.

박인규 : 야구 발전 전체를 보자. 하긴, 최근에 언론 보도를 보니까 톱스타 배우들이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서 출연료를 깎았다는 얘기도 있더라구요.

박노준 : 아주 굉장히 좋은 생각이죠. 저희 프로 야구선수들도 이번 겨울에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인규 : 박노준 위원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인생을 살고 계신데 그래도 야구와 관련해서 아쉬운 것도 있고 해보고 싶은 것도 있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아직 야구인생이 많이 남으셨는데 야구인생에서 내가 꼭 이걸 해보고 싶다, 이런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박노준 : 직업군인이 별 다는 게 소원 아니겠습니까? 야구인은 감독입니다. 장관은 자리가 많지만 프로야구 감독은 딱 8개 밖에 없습니다. 저도 야구를 해왔고, 또 지도자 준비도 충실히 해왔고. 또 언젠가는 구단에서 콜이 오면 감독을 해보는 것이 꿈이구요. 야구감독도 하고, 또 틈틈이 계속해서 야구를 통해서 제가 이만큼 성장하고 컸고 알려졌기 때문에 야구 쪽에서 다시 또 봉사할 수 있는, 헌신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이만수 선수인가요? 미국에서 코치 하다가 SK인가에서 코치 하시는 것 같은데.. 그분도 잘 되시고. 혹시 박노준 선수가 국내 프로야구 감독이 돼서 우승까지 할 수 있으면 더욱 더... 그런 날이 오길 기대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노준 : 감사합니다.

박인규 :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1980년대 한국 고교야구의 전설이자, 선린상고 시절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았던 박노준 해설위원과 말씀 나눠 봤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97.3MHz)에서 방송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