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복(가명·남) 씨는 평생 강원도 삼척시에서 살았다. 선거 때마다 새누리당에 표를 던졌고 '핵 문제'가 생기기 전만 해도 당연히 대선 때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뽑을 것으로 생각했다. 최 씨는 지금도 '노조'라는 집단이 탐탁지 않다. "강원도는 원래 보수니까 여기에도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많긴 하지만 전국공무원노조 사람도 있고, 전국금속노조 사람도 있고. 우리 단체에 별사람 다 모였지"라고 최 씨는 말했다.
최 씨가 말하는 '우리 단체'란 '삼척핵발전소반대 투쟁위원회'(이하 투쟁위원회)다. 보수단체 회원들과 함께 종북단체규탄 시위를 벌이려 상경까지 했던 최 씨다. 이랬던 그가 이번 대선에서 박 후보에게 표를 줄지 말지 고민하는 이유가 바로 '핵발전소'다.
▲투쟁위원회 사무실 ⓒ프레시안(남빛나라) |
핵발전소 들어오면 경제발전?…"울진을 봐라"
원자력발전소 유치와 관련한 김대수(71) 강원 삼척시장 주민소환 투표일을 하루 앞둔 10월 30일 아침 10시. 투쟁위원회 사무실에는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민소환투표는 삼척시 유권자 중 3분의 1 이상이 투표에 참여해 2분의 1 이상이 시장 소환에 찬성해야 효력이 발생한다. 투표율이 3분의 1 미만이면 투표함을 아예 열지 못한다.
김대수 시장 소환에 찬성하는 입장에선 한 표가 아쉬운 상황. 김대수삼척시장 주민소환투표운동본부 김용하 대표는 "다들 삼척에서 평생을 살았다"고 했다.
김 대표는 "애향심에 하는 자원봉사"라고 거듭 말했다. 실제로 이들에게 주어지는 활동비는 전혀 없었다. 김 대표는 명예퇴직한 전직 교사다. 그는 "(원전 유치를 하면 삼척시에) 조 단위로 돈이 들어온다니까 다들 혹했다가 후쿠시마 사태를 보고 정신 차렸다"고 말했다.
후쿠시마뿐 아니라 경상북도 울진군 역시 이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운 듯했다. 한 자원봉사자는 "울진에 원전이 생긴 뒤 (잘 안 팔릴까 봐) 농산품을 울진산(産)이라고 밝히지도 못하는 판"이라며 "은행들이 울진에 있는 아파트로는 주택담보대출도 잘 해주지 않을 정도로 울진의 경제가 어려운데 핵발전소가 들어오면 지역 경제가 발전한다니 무슨 소리냐"고 지적했다.
막무가내식 서명서로 원전 유치 추진…"찬성률 96.9%가 말이 되느냐"
최상복 씨는 "이 좁은 바닥에서 다들 평생 살았으니 원전 유치 반대파나 찬성파나 서로 다 아는 사이"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 손바닥만 한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찬반논란이었다. 논란은 김대수 삼척시장이 지난 2010년 6월 2일 시장으로 당선된 이후 시작됐다.
당선 초기부터 '20조 원 규모 세계 최대 제2원자력 연구단지'를 조성하겠다고 주장해온 김 시장의 뜻대로 삼척시에 '천지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설 계획이 발표된 것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지방자치단체 유치 신청과 부지선정위원회 평가를 거쳐 지난해 12월 삼척과 영덕을 신규 원전 후보지로 선정했고 이어 지식경제부가 지난 9월 14일 경북 영덕군 영덕읍 일대와 강원 삼척시 근덕면 일대를 신규 원전 예정구역으로 지정한다고 고시했다.
지난해 3월 9일에 발표된 서명서만 보면 삼척 시민 거의 전부가 원전 유치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방자치단체 유치 신청의 근거가 된 이 서명서에는 삼척 시민의 96.9%가 원전 유치에 찬성한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지난해 3월 11일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고, 즉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다. 삼척 사람들에게는 이웃 나라의 재앙이 남의 일이 아니었다.
최경민 투쟁위원회 조직실장은 서명서에 대해 이야기하자 헛웃음을 지으며 "그게 가능하기나 한 수치냐"며 "서명을 받았다는 통장 등의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그냥 자기가 혼자 다 작성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이어 최 실장은 이렇듯 허술한 서명서 작성 과정 자체가 "현 시장의 독단적 핵시설 유치"를 보여준다며 "경상남도 남해는 화력발전소를 건설한다고 주민투표를 했는데 삼척시는 민주적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원전 유치 찬성 측 "서명서 신뢰성 있고 원전이 위험하다는 근거 없어"
최 실장의 말대로 경남 남해군에선 남해석탄화력발전소 유치 여부를 놓고 지난 17일 주민투표가 이뤄졌다. 투표 참가 유권자 중 과반인 51.1%가 반대표를 던져 화력발전소 유치는 전면 백지화됐다.
이와 달리 삼척에서는 시민들의 의견을 묻는 민주적 절차가 없었다는 문제가 제기돼왔다. 이에 대한 삼척원자력발전소 유치협의회 정재욱 대표의 생각을 묻자 정 대표는 "우리가 그 당시 찬성 서명을 받았을 때는 후쿠시마 사태 전이라 (96.9%의 찬성률이) 가능했다"고 밝혔다.
정 대표는 "86개 사회단체를 주축으로 (서명서 작성이) 이뤄졌는데 삼척 내 시민단체가 거의 전부 서명서 작성에 참여했다고 보면 된다"며 "원전이 들어온다고 건강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본다. 방사선 피해를 너무 지나치게 염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원전이 유치되면 삼척의 경제가 부흥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건설경기가 부양된다"며 "또 특별지원금이나 일반지원금이 삼척시로 들어오면 삼척이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밝혔다.
▲한 자원봉사자가 유세차를 타고 아파트 단지를 돌며 주민투표에 참여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프레시안(남빛나라) |
"자영업자들은 다 원전에 찬성할 것" VS "반대자가 받는 탄압 너무 심해서 말 못해"
원전을 유치하면 삼척시의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진 사람은 정 대표뿐만이 아니었다.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겨우 한 대 허락받은" 유세차가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는 동안 단지 내 한 슈퍼의 주인은 "가게를 하는 사람들은 다 원전 유치에 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물건 살 때 큰 농협만 가서 죽겠다. 일단 원전이 유치되면 사람이 많아져서 장사가 잘되지 않겠느냐"고 기대감을 보였다.
반면 이정미(가명·여) 씨는 정 대표가 이야기한 '시민단체의 참여'에 대해 반박했다. 이 씨는 고등학생 아들을 둔 전업주부로 삼척여고동문회를 통해 원전유치 반대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이 씨는 "시민단체라는 것에 요식업체협회 같은 단체가 포함되는데, 그런 단체는 공무원이 한번 나와서 위생조사니 뭐니 하면 다 망한다. 그래서 협회의 높은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협회 회원들이 다 원전에 찬성한다고 이름을 써낸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 씨는 "원전 유치에 반대할 경우 받는 탄압이 너무 심해 대놓고 반대한다고 말을 못 한다"며 "지인의 남편이 공무원인데 군대 간 아들이 이번 주민투표에 투표하려고 부재자 신고를 했다. 그랬더니 통장 등이 전화를 걸어 '투표에 참여하겠다는 거냐'고 따졌다고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7월 9일 삼척시가 김대수 시장 명의로 이·통·반장 및 사회단체장 등에게 발송한 '존경하는 이·통·반장 및 사회단체장님께'란 제목의 서한문에서 원전유치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지역의 암적인 존재'로 표현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된 바 있다.
"원전산업 자체가 이미 망한 사업"
원전 유치에 찬성하는 사람이 주로 내세우는 "경제발전"이란 말에 김혜정 에너지기후위원회 위원장은 "핵산업은 이미 세상에서 완전히 망하고 몰락한 산업"이라고 단언했다. 발전과는 오히려 정반대라는 것.
김 위원장은 "후쿠시마 사태 이후 프랑스는 2025년까지 원전 24기를 폐쇄하기로 했으며 독일은 2022년까지 모든 원전을 폐쇄하기로 했다"며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신규원전건설을 중단했다"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은 전 세계에서 나 홀로 원전확대 정책을 펴고 있는 한국 정부가 "미친 놀음"을 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편 이광우 투쟁위원회 기획홍보실장은 "주민투표 투표율이 33.3%를 넘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설령 그에 못 미친다 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고시 해제를 위한 투쟁을 지속해서 전개할 것"이라고 의지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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