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성명, 그마저도 없는 한나라당
그런데 청와대 앞에서 문성현 당 대표가 15일 째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민주노동당을 제외하고 국회에서 나오는 한미 FTA 관련 성명에는 일종의 요령이 생긴 것 같다.
대체로 "한미 FTA는 철저히 경제적 실리를 따져 국익에 부합하는 협상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공자 말씀'을 앞세운 뒤에 "국익에 부합하지 않을 때에는 협상을 중단해야 한다"거나 "국회 비준을 장담할 수 없다"는 식의 '역시 당연한' 엄포를 놓는다. 협상 초기에는 꽤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던 "한미FTA 체결 시한에 쫓기지 말고"라는 문구는 이제는 누구나 쓰는 '상투어'가 됐다.
간혹 한미 FTA를 전략적 포지션으로 설정한 이들이 "현 기조대로 미국 시한인 3월 말까지 협상을 타결할 생각이라면 나를 밟고 가야 할 것(김근태)"라거나 "현재 상태로의 한미FTA라면 반드시 막아야 한다(천정배)"라는 식의 비교적 선명한 발언을 내놓지만 그 외에는 거의 대동소이하다.
물론 이마저도 내지 않는 '한미FTA 나몰라라 당' 한나라당에 비하면 이들의 '선언적' 발언은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나라당은 3월 고위급 회담이 시작되고 '누구나 한마디씩 하는' 시기가 되어서도 대변인 브리핑 등에서 '원론적인 찬성'이라는 한미 FTA 협상 초기의 입장을 되풀이한 것 외에 뚜렷한 정책성명 하나 내놓지 못했다.
한나라당이 이 문제와 관련해 했던 기억에 남는 일이란 지난 2월 한미 FTA 문건 유출 관련 공방에 열을 올린 것과 3월 초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적 실익이 없다면 한미 FTA 협상을 체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진의가 무엇이냐"며 오히려 몰아붙였던 것뿐이다. 요즘은 협상 내용보다는 한미 FTA 반대 입장을 정한 구(舊) 여권의 대선주자들에 대해 "정략적으로 이용 말라"고 반박하는 게 일이다.
'애매한 마지노선?'
21일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 41명이 한미FTA 협상에서 얻어내야 할 5가지와 지켜야 할 5가지를 명시한 성명을 내놨다. 그간 "협상이 국익에 부합하도록 최대한 지원하고 비준 여부는 협상 결과가 나온 이후에 결정한다"는 식의 비판적 찬성 입장에 비하면 한발 나아간 셈이다.
이들은 총 10개의 마지노선에 대해 "한미 FTA 최종 협상에 반영해야 할 최소한의 요구"라며 "이 요구사항이 어떻게 협정문에 반영되느냐에 따라 국회 비준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서명에 참여한 41명의 명단에는 당 한미FTA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송영길 의원 등 평소 한미 FTA 협상 추진에 적극적인 의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다 보니 이들이 내놓은 총 10가지 마지노선도 애매한 구석이 적지 않다는 지적을 받았다. 가령 '한미 FTA 협상에서 얻어내야 할 5가지'에 포함되어 있는 "무역구제에서 주요 비관세 장벽 완화를 통해 기업에 실질적 혜택"이 그렇다.
한신대 이해영 교수에 따르면 "미국의 대표적인 비관세 장벽은 '무역구제 관련법'인데 우리 측은 애초 15개항 정도의 개선 요구를 제시했지만 금세 5개 정도로 주저앉았고 이 과정에서 핵심 조항인 제로잉(Zeroing, 수출가격이 국내가격보다 낮은 경우에만 덤핑마진에 산입하고 수출가격이 국내가격보다 높은 경우는 마이너스로 계산하지 않고 제로(0)로 간주해 덤핑관세율을 높이는 것)조항을 포기해 나머지 요구를 미국이 다 수용하더라도 실익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이미 "기업이 실질적 혜택을 얻을 수 있는 수준의 비관세 장벽의 완화"는 물 건너갔다는 이야기다. 이 교수는 "무역 구제 각 조항 가운데 제로잉이 차지하는 비율이 86%"라는 미국측 연구결과를 제시하며 "우리의 수출 손실 연 15억 달러 가운데 약 13억 달러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들은 "미국의 자동차 관세의 조기 철폐를 통해 세계 최대시장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밝히면서도 '조기 철폐'의 기준이 언제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미국은 15년 뒤 관세 철폐안을 내놓고 10년을 마지노선으로 삼고 있다. 그럼 10년 뒤 철폐는 '조기 철폐'인가?
이들의 성명에는 미국 측이 끈질기게 요구해온 '배기량 기준 자동차 세제'를 개편·폐지하는 문제에 대한 지적도 없다. 최근 정부가 자동차세와 특별소비세를 대폭 개편하겠다고 밝히면서 "미국과 상관없이 우리 업계와 소비자도 세제개편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해명하는 데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셈이다.
'한미 FTA에서 지켜야 할 5가지' 중에도 "의약 분야에서 국민의 접근권과 소비자 보호규정의 확보"라는 대목도 모호하다.
정태인 교수의 주장대로 "한국정부가 사실상 의약품 특허기간을 3년 이상 연장시키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 들였고, 재심위원회 등을 통해 미국 다국적 기업이 약값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면 이는 "의약 분야에서 국민의 접근권과 소비자 보호규정을 확보"한 것인가, 아닌가?
물론 비교적 분명한 마지노선을 제시한 대목이 없는 게 아니다. △한반도 평화와 북미관계 진전을 개성공단 원산지 인정 문제에 반영 △투자자-국가소송(ISD)에서 조세, 부동산 정책 등 정부의 정당한 규제권한 제외 △통신,방송 등 국가의 기초적 서비스에 대한 공공성 훼손불가-통신 등 기간 산업 외국인 지분제한 49% 유지 △금융서비스 시장 교란 방지장치(일시 세이프가드) 확보 등이 그렇다.
이는 유일하게 이들의 향후 행동을 구속할 수 있는 대목일 게다. 남은 것은 이것이 지켜지지 못하고 넘어온 비준안에 이들 41명이 정말로 거부 결정을 할지 지켜볼 일이다.
이날 성명에 서명한 의원 : 강기정, 강길부, 강혜숙, 김교흥, 김동철, 김명자, 김선미, 김성곤, 김영춘, 김재윤, 김종률, 김진표, 김혁규, 문병호, 문석호, 박영선, 박찬석, 배기선, 백원우, 서혜석, 선병렬, 신 명, 신학용, 송영길, 오영식, 오제세, 원혜영, 윤호중, 이경숙, 이기우, 이상민, 이시종, 이화영, 임종석, 장향숙, 조정식, 정장선, 지병문, 최재성, 한광원, 한병도, 홍재형 의원 등 4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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