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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인들이 원하는 건 '구호'가 아니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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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라크인들이 원하는 건 '구호'가 아니라 '평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3/20] 평화운동가 임영신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20일 오늘은 이라크전쟁이 발발한 지 만 4년이 되는 날입니다. 미국은 개전 40일 만에 전쟁 종료를 선언했지만 이라크인들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처형됐고 새 정부가 출범했지만 이라크 국민들은 반미 저항세력들의 테러와 저항세력들의 무력투쟁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온갖 생활고 속에 슬픔과 절망의 4년을 보냈습니다.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지난 2003년 이라크에서 반전평화팀으로 활동한 평화운동가 임영신씨를 초대해 아직도 유혈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현재 이라크의 상황은 어떤지....또 분쟁지역을 찾아다니며 발견한 진정한 평화의 의미는 무엇인지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평화운동가 임영신씨입니다.

임영신씨는 1970년 서울 출생으로 94년부터 참여연대와 녹색연합 협력간사로 일했고 2000년부터 2년간 아름다운 재단의 모금팀장으로 활동했으며 2005년 성공회대 NGO대학원에서 비정부기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03년 이후 이라크 평화팀의 일원으로 이라크를 세 차례 방문해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한국에 알렸습니다. 이후 베트남, 인도, 스리랑카 등 아시아 20개국을 찾아다니며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평화를 향한 여정을 담은 책 '평화는 나의 여행'이 있습니다.

박인규 : 임영신씨께서는 꼭 4년 전 이라크전이 일어날 당시에 이라크에 계셨기 때문에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 올해로 4년이 됐습니다. 많이 궁금하시지 않으세요?

임영신 : 엊그제 사실은 제가 이라크에 있을 때 같이 활동했던 스와드씨하고 전화통화를 했어요. 사적인 내용으로 전화통화를 했는데 2달 후에 딸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다, 축하한다고 메시지를 전했더니 결혼식을 하지만 사실 친척을 아무도 부를 수 없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릴아나 요르단으로 나가 있어서 친척을 부를 수도 없고 치안 때문에 사람들이 잔치에 오갈 수도 없어서 조용한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다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는데, 전화통화 중에 전화가 두 번이나 끊겼어요. 미군 정찰기가 지나갈 때마다 이라크 전역의 통신 전체가 다 끊어지는 상황이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박인규 : 이라크 정부 측에서 말하자면 방어를 위해서

임영신 : 예. 치안 때문인 것 같구요...

박인규 : 지난 주말에는 서울에서도 이라크 침공 4년을 맞아서 전 세계적으로 반전시위가 있었는데, 참가하셨습니까?

임영신 : 예. 저도 참여했고 한국에 들어와 있는 여러 아시아 활동가들과 같이 참여했습니다. 미국에서도 2만 명 이상 모여서 집회를 했다고 하고. 보통 한 이슈가 4년 정도 되면 죽기 마련인데 점령의 유혈사태가 더 불거지면서 오히려 수그러지려거 하던 반전운동의 불길들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박인규 : 아까 스와드씨라는 분 말씀을 하셨지만, 통계를 보니까 이라크 인구가 한 2500만 명인데 200만 명이 주변 국가로 피난가고, 국내에서도 피난 간 사람이 200만 명.... 거의 15~16%가 난민이 됐다구요.

임영신 : 녜. 실제 제가 2003년에 요르단에서 이라크로 들어갈 때 UNHCR 난민캠프를 지난 적이 있었는데, 5만 명 규모의 캠프를 설치했는데 그 당시는 200명. 의료진이 200명인데 난민이 200명 밖에 없었거든요. 오히려 4년이 지난 상황에서 그런 거주지를 잃은 난민들이 400만 명 정도 발생했고 실제로 네 명 중 한 명이 가족의 살해나 친척의 납치를 경험하고, 세 명 중 한 명이 친척이 해외로 이주된... 이라크에서는 피부로 느낀다고 해요. 저희도 평화도서관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가 스와드씨가 현장에서 조사하면서 난민이 된 사람들의 생계문제, 이런 것들이 정부에서 충분한 보조가 되지 않고 미군도 돌보지 않기 때문에 굉장한 사각지대에 있다고 해서 지금 현재 조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 ⓒ프레시안

박인규 :
네 명 중 한 명이라면 거의 모든 가족이 목숨을 잃거나 해외로 나갔거나 그랬단 얘기네요.
2003년도 3월 20일에 이라크전이 시작됐는데, 그 당시 임영신씨께서는 휴먼실드라고 합니까? 인간방패라고 해서 전쟁을 막기 위해 이라크로 들어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들어가셨어요?

임영신 : 그때 저는 사실 피스보트라는 세계일주하는 평화여행을 준비중이었는데, 성공회대에서 평화를 공부하는 모임에서 한 친구가 '이라크, 바그다드로 10만 명의 인간방패 모이기로'.. 이런 기사를 가져왔구요, 넬슨 만델라 부인도 참여하기로 결정했었고, 이미 만여 명이 넘는 세계의 활동가들이 모여 있다는 기사를 보게 됐어요. 그때 이미 한국의 시민운동에서는 99년 시애틀의 경험이 있었고 WTO나 여러 문제로 5만 명 이상 모여서 국제적인 사안들에 대해서 대응하는 세계적인 운동의 흐름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 개인에게는 굉장히 현실적인 전쟁을 막는 전략이라고 생각되구요. 또 그것을 위해서 저희가 단순히 가방싸서 가는 것으로 막을 수 있다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한 번 시도해 볼 수 있는 좋은 방법 아니겠냐는 생각으로 10만 명 중 한 명으로 이라크에 간 것 뿐이에요.

박인규 : 실제로는 몇 명이나 됐나요?

임영신 : 실제로는 만 명을 넘어서지 못했구요. 이라크에 휴먼실드로 들어간 사람들을 사담 후세인 정부가 패스포트를 압류하고 숙소들을 통제하면서 이라크 정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거기서 정당한 전쟁 논쟁이 일어나면서 휴먼실드가 가치 있는 평화운동이냐, 아니면 후세인의 전략에 말리는 거냐, 이런 논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나가고... 끝까지 남은 사람들은 천 명 미만이었죠.

박인규 : 뜻은 숭고했지만 사실 전쟁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임영신씨는 그 당시에 아이가 둘이나 있는 엄마였는데, 폭격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가시기로 용기를 내셨는지....

임영신 :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아이가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베트남전이 저희 아버지 세대였는데, 가끔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저희 아버지 세대는 뭘 했을까, 지식인들을 뭘 했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아이들 앞에서 나중에 이라크전, 파병... 이런 것들이 아이들에겐 역사고 저희들한테는 미래인데요. 나중에 아이들이 물어볼 때 내가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그 물음 앞에서 정직하게 실천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고민을 했고 그때 이미 저뿐만 아니라 다양한, 노동자였던 분이나 배상현씨처럼 미용재료상을 하는 친구나, 저 말고도 다양한 친구들이 참여하고 있었죠.

박인규 : 그 당시에는 휴먼실드로 나섰지만 전쟁을 막지 못했고 전쟁 이틀 전에 나오신 걸로 압니다. 그 뒤로도 두 번을 들어가셨는데 말하자면 미국 측 입장에서는 끝난 다음이었어요. 그때 보시니까 이라크 사정이 어떻던가요?

임영신 : 긴급구호팀으로 합류하면서 폭격 이틀 전에 이라크에서 나오고 바그다드 폭격이 종료된 며칠 후에 다시 들어가서 5월 1일 종전선언일까지 반전평화팀이랑 같이 긴급구호 때문에 현장조사를 하러 다녔는데, 제가 놀랐던 건 그때 잠깐 요르단에 나와 있을 때 봤던 CNN이나 BBC 뉴스에서는, 그때 보여줬던 풍경들은 이라크인들이 서로 약탈하고 물건들을 가져가고 사회를 마비시키는 거였는데 제가 이라크 국경을 넘어 바그다드에 딱 도착해서 본 풍경은 약탈해서 수레에다 가구 몇 개를 싣고 나오는 이라크 사람 옆에 미군 탱크가 서 있었고, 그러나 그 사람들이 치안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또 저희가 병원에 뭐가 필요한지 조사하러 다녔는데, 그 병원들마다 미군탱크가 서 있지만 그 병원에 수많은 사람들이 두개골이 분쇄돼서 총상을 입고 우는데 그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에서 이라크 의사들이 목숨 걸고 일하고 있는데, 미군들은 수수방관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거죠. 심지어 병원에 전기가 없어서 사람들이 감염이 되고 수술을 집도하지 못하는데 적십자 사무실에 갔더니 에어컨을 돌리면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고. 제가 이라크에 가서 본, 특히 종전 전의 상황은... 이라크에 가서 배운 제일 큰 게 있다면 말해지는, 보도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는 게 뭔지, 그리고 그것은 왜 말해지지 않는지. 그런 진실들에 대해서 크게, 가까이서 전쟁을 본경험이 저한테는 참 충격적이고 저를 많이 변화시킨 것 같아요.

박인규 : 저도 언론인입니다만 전쟁의 최초의 희생자는 진실이라고 하더라구요. 그 당시 들은 얘기 같은데, 예를 들어 미국의 CNN 같은 경우는 이라크 폭격 장면을 무슨 영화 보여주듯이 보여주지만 알자지라는 다친 사람들을 보여줬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과 어린이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많은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구요... 상황이 어떻습니까?

임영신 : 이미 보도된 바 있지만, 당시 한국보건의료연대가 이라크에서 바그다드 폭격 직후 설문조사를 했어요. 어린이들에 대한 조사를 했는데 충격적이었던 건, 그 아이들의 90% 이상이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에 답했거든요. 저는, 여자와 아이, 민간인들이 많이 희생되고 이런 것들은 현대전의 피할 수 없는 양상인데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죽어가는 아이들이나 희생자지만, 아이들이... 아까 제가 어떤 통계를 말씀드렸는데, 네 명 중 한 명이 가족이 살해당하는 걸 목격한 거죠. 그 중엔 아이들도 있구요. 그 아이들은 이미 미래가 정해져 있는 거죠. 복수하고 싶고, 합법적 출구나 정치적 공간을 찾지 못할 때 그 아이들의 증오가 사적인 복수나 다른 형태의 증오로 사회 안에서 계속 자라나고 있는 것이 이라크의 제일 무서운 재앙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죠. 이라크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이나 동티모르나 어디서든 저희들이 보고 있는...

박인규 : 폭력으로 당한 것을 폭력으로 갚으려고 하는

임영신 : 그게 이미 제일 큰 희생인 거죠. 미래나 꿈이나 자신들의 정상적인 삶의 호흡기를 다 제거당한 거니까

박인규 : 이라크 평화팀은 2003년도에는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하신 걸로 아는데 지금도 활동하고 계십니까?

임영신 : 이라크 평화팀은 사실 참여연대나 환경연합 같은 조직이 아니라, 가고 싶은 사람들이 혼자는 못 가잖아요. 그리고 가면 후방에서 지원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만들어졌던 한시적인 개인들의 네트워크였구요. 그래서 현장활동이 끝난 후 해산됐구요 그 이후 다양한 형태로, 박기봉씨는 어린이와 평화 프로젝트로, 오수연씨는 프레시안이 진행하는 팔레스타인 문인들과의 교류, 힌상진씨 같은 경우 레바논이나 시리아 쪽에서 리포팅하는 형태, 그리고 저 같은 경우 이라크평화네트워크, 지금은 피스메이커스, 이런 형태로 개인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평화교육, 평화행동을 계속 진행해 나가고 있구요. 아마 또 우리가 함께 대응해야 될 다른 어떤 사안이 생긴다면 동일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런 형태의 운동들은 다시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박인규 : 팀으로서의 평화팀은 해산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계속 이라크 문제로 고민하고 활동하신다. 아까도 스와드씨 말씀하셨지만 지금도 이라크에 있는 지인들과 연락하십니까?

임영신 : 네. 이메일로도 연락하고, 통화도 가끔 하고, 저 같은 경우 이라크를 지원하는 평화도서관 프로젝트를 스와드씨랑 같이 진행하고 있었는데요

박인규 : 지금 4년이 지났는데, 결혼식을 전부다 외국으로 나가서 하객을 부를 수도 없다고 하셨고. 한 마디로 말하긴 어렵겠지만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임영신 : 실제로 저희가 이라크에 스와드씨랑 있었을 때 사르드 시티나 시아파 지역... 스와드씨는 수니파구요 쿠르드 피가 섞인 사람인데, 남부 바스라부터 북부 아르빌 등 안 다닌 데가 없었구요. 만난 사람 중에는 쿠르드, 시아, 수니, 가르지 않고 바벨에 갔을 때는 시아쪽 성직자들과도 만나고 인터뷰도 하고 다 했거든요. 사드르 시티 같은 데서는 같이 자기도 하고 그쪽 모스크에 다 들어가고 자유롭게 활동했었는데, 지금은 저 같은 외국인 말고 스와드씨 같은 토박이도 시아 지역에 들어갈 수 없구요.

박인규 : 말하자면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

임영신 : 네, 담보할 수 없고, 전에는 불야성이었던 이라크에서 저녁 7시 넘으면 아무도 다닐 수가 없구요. 제가 아는 한 아이는 중학생 나이인데 6개월 동안 집 밖에 나오지 못한, 보안 때문에 감금생활을 했고. 실제 월급은 300불까지 올랐지만 사람들 사는 수준은 사담 시절보다 훨씬 더 못하다고 민생을 토로하고 있죠.

박인규 : 오죽하면 후세인이 그립다는 말도 나온다고...

임영신 : 예. 그 시절엔 적어도 치안은 보장됐다는 얘길 하는 거죠.

박인규 : 물론 이라크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한 건 평화겠죠. 워낙 갈등이 심했으니까.
그것 말고 외국에 있는 우리들이 이라크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면 뭘 할 수 있을까요

▲ ⓒ프레시안

임영신 :
저는, 저희가 구호를... 지금은 사실 이라크가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기사가 나와 있는데, 그 이유는 이라크 정부가 치안문제 때문에, 이라크가 아직도 식량배급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잖아요. 12가지 품목. 그런데 지금 6가지 품목 밖에 제대로 전달이 안 되고, 12가지 중 절반만 배급이 되고 있고, 또 이라크가 식량수출국이었잖아요. 그런데 모든 주요 무역도로들이 치안보장이 안 되면서 이렇게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고, 활동하던 NGO들이 전부 다 빠져나간 상황이었거든요. 실제 2003년에 저희가 긴급구호 활동을 할 때도 병원에 가서 무슨 약품이 필요하냐고 물어보면, 심지어는 우리는 약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우리가 안전하게 병원을 오갈 수 있는, 의사든 환자든... 치안이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그 다음은 전기, 통신이 복구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도 이라크에서는 바그다드에 네 시간 정도밖에 전기가 안 들어오고 저녁이 되면 전기가 나가고, 통화를 하다가 끊기고. 대중교통수단이나 석유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제일 중요한 것은 저희가 들어왔을 때도 저널리스트로, 프레스카드를 발급받아서 다녔는데 모든 개인이나 활동가나 언론인들의 움직임이 미군이나 이라크 보안국의 통제를 받게 되고, 저희가 팔루자 조사를 할 때도 굉장한 통제와 압박에 시달렸는데, 실제로 이라크에 있는 다르자마이 같은 유명한 독립언론인들도 시리아로 다 빠져나간 것으로 들었거든요.

박인규 : 그 정도로 치안이 더 악화됐다.

임영신 : 치안의 악화, 또 하나는 진실의 학살인데요, 작년 10월에 렌싯에서 65만 명이 죽었다고 추산했구요, 저희나 미국에 있는 평화운동가들이 이라크 희생자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들을 했는데 실제로 그들을 정확하게 세기 위해 노력했던 세 그룹... 의사, NGO, 언론인들이 차례로 다 살해를 당하고 있고, 그런 진실 문제에 대한 보장들을 미군이나 이라크 정부에서 책임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게 길게 보면 더 큰 문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박인규 : 연초엔가요? 미군이 3천 명 전사자라고 크게 보도된 걸 봤는데, 이라크 사람들이 죽은 건 사실 몇 명인지도 모르는 군요. 그런데 65만 명이 넘는다...

임영신 : 예. 렌싯의 통계에 의하면...

박인규 : 지난 달 체니 부통령이 아프간 바그람 공군기지에 갔을때 테러가 있어서 우리 윤장호 하사가 숨졌습니다. 그 전에는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숨졌고. 꼭 숨져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나라 이라크에도 가 있고 아프간에도 가 있고 앞으로 레바논에도 보낼지 모른다는 얘길 하는데 반대하시겠지만, 평화운동가 입장에서는 당연히 반대하시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보십니까?

임영신 : 엊그제도 아프간에서 돌아온 분쟁지역 전문PD 강경란씨와 통화를 했는데, 아프간 남부 같은 경우는 이미 국제 NGO들이 다 철수한 상황입니다. 치안이 너무 안 좋아져서. 외국 언론인이랑 움직인 사람도 살해를 당하는 정도로 이라크 못지않게 아프간... 저희가 많이 귀 기울이지 않고 있어서 그렇지 아프간의 치안 상황 역시 극도로 악화되고, 윤장호 장병을 통해서 보지만 이라크에서도 사실 자살폭탄테러가 무고한 시민들을 겨냥한 것 같지만, 통계에 의하면 80% 이상이 연합군을 겨냥한 것이었지 무고한 시민들을 겨냥하고 있지 않잖아요.

박인규 : 무분별한 테러는 아니다.

임영신 : 정확하게 통계가 2003년부터 2007년 초까지 나온 걸 보면 80% 이상이 연합군을 겨냥하고 있고 아프간에서도 마찬가진데, 그 겨냥되고 있는 표적 안에 한국군이 파병하게 되는 거죠. 아프간이든 이라크든. 그래서 저는 제가 평화운동가로서 얘기하고 싶은 건, 그것이 국익이 되든 되지 않든 우리의 돈을, 이익을 위해서 남의 생명을 죽이는 일에 적어도 한 국가가 참여하지는 말아야 되지 않냐는 얘길 하고 싶구요. 제가 레바논에 갔던 적이 있는데 여기서는 잘 못 느끼지만, 작년 사태를 통해서 많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헤즈볼라의 무장투쟁이 격렬하게 살아 있고 오히려 이라크보다 훨씬 더 극심한 대치로 갈 것이기 때문에 군인의 희생은 불보듯 뻔한 일 아닐까 생각해요.

박인규 : 미국 부시행정부가 테러와의 전쟁, 테러를 없애겠다고 시작한 전쟁이 테러를 오히려 훨씬 더 늘여 놓은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지 참 갑갑하네요.
살아오신 경로를 보니까, 참여연대, 녹색연합, 아름다운 재단.. 이른바 시민운동이라는 분야에서 활동하셨는데, 2003년부터 평화운동가로 변신하셨어요. 어떤 경로, 계기가 있었습니까

임영신 : 제가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단체가 아름다운 재단인데요, 특별한 계기라면 제가 아름다운 재단 일을 하고... 안국동에서 10년을 보냈는데 어느 날 제 수첩을 보니까 수첩에 있는 사람들 이름이 이륹바 기자, 교수, 변호사... 저는 나름대로 뭔가 어려운 현장을 돕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민운동을 시작했는데 제 수첩에는 정말.... 제가 사는 곳이 안산인데 안산 사람들은 잘 만날 수 없는 사람들만 제가 만나면서 살고 있더라구요. 그때 제가 10년차쯤 됐는데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운동은 뭔가. 아름다운 재단, 참여연대가 없어져도, 녹색연합이 없어져도 내가 계속 이 일을 할 것인가. 단체에 의존하지 않는 나 개인운동가로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구요.

그때 마침 대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개인의 운동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이라크 문제를 통해서 평화운동을 접하게 됐구요. 이라크에 가서 굉장히 귀한 기회를 많이 갖게 됐는데, 캐시 켈리라든가 여러 평화운동가들을 만났는데, 사실 우리는 2003년 이라크에 가기 전까지 이라크가 어딨는지 지도에서 찾지도 못했거든요. 그런데 그 분들은 91년 걸프전 이후 계속 이라크를 여행하면서 경제제재 기간에도 그 참상을 알리기도 하고, 평화의 증인으로서 안쪽에 들어가서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죽어 가는 사람의 눈으로 그것들을 기록하고 알리고 여행하는 일들을 계속 해오셨더라구요.

박인규 : 주로 외국에 나가서 평화운동을 하시는데, 이런 질문이 나올 것 같아요. 우리나라 자체가 남북한 간의 화해가 안 이뤄졌다. 또 최근에는 역사 문제, 동북공정 문제로도 중국하고. 교과서 문제로 일본과.... 우리 자체도 분쟁상태인데 외국까지 신경쓸 겨를이 있느냐, 이런 식의 질문을 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아요.

임영신 : 북한은 가기가 어려워서.. 비폭력 직접행동의 원칙을 갖고 하는데, 현지에 갈 수 있는 곳을 가능하면 가려고 하고. 왜냐 하면 사람이 만나면 관계를 맺게 되고, 관계를 맺게 되면 책임을 지려고 하고 연대로 나아가잖아요. 실제로 저는 여행을 통해서 평화운동을 하고 있는데 제가 레바논에 들어갔다 오면 이스라엘에 못 들어가잖아요. 이라크 도장이 있으면 미국 비자가 안 나오잖아요. 여행이라는 게 어느 지역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 한 개인의 실존적 연대에 대한 결단이 되구요.

이번에 제가 4월에 중국, 티벳, 네팔을 가게 되는데 간디학교 친구들과 같이 연변부터 티벳을 지나 네팔로 가게 되거든요. 그러면 친구들이 동북공정과 서북공정이 뭔지를 티벳을 통해서 서북공정의 결과인 티벳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들어오고 있는 동북공정에 대해서 감각을 통해서, 기류에서 아이들이 깨닫게 될 텐데요, 한반도의 평화 문제가 북핵사태가 터지면서 일반 시민들도 다 감지하는 것처럼 우리 손 안에 우리 평화가 결정될 수 없고 평화 문제를 6자회담을 통해서 풀어가는 것처럼, 이 전쟁도 막기를 원한다면 저희도 역시 전 세계에.. 2003년에 1300만이 거리로 나왔던 그 전 세계의 반전운동과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연대는 여기서 저희가 공문과 서류 보내서 한국을 지지해 주십시오 하는 게 아니라,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콜롬비아에서, 스리랑카에서 현장에서 같이 어깨를 맞대고 땀흘리면서 만나 가는 활동의 연대를 통해서... 그것이 저희들이 북한 문제가 터졌을 때, 우리들이 이쪽에서 요청할 때 그 사람들이 마음을 움직여서 목숨을 걸고 올 수 있는 긴 안목의 한반도 평화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우리만의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보기보다는 세계인의 입장이랄까, 인종을 초월해서 역지사지의 입장으로 평화운동을 전개해야 우리 문제도 풀 수 있다는 얘기겠네요. 조금 전에 간디학교라고 말씀하셨는데, 대안학교죠? 나이가 어린 학생들로 알고 있는데, 잘 알아 듣던가요? 데리고 다니면서 같이 공부하면....

임영신 : 교실에서 수업하면 서로 잘 귀 기울이지 않지만 여행을 하면 아이들이 궁금한 게 많이 생기잖아요. 저는 민다나오 아이들이랑 작년에 한 달 같이 갔었는데요 평화수업의 일환으로 한달 같이 했는데, 민다나오는 오래된 분쟁지역이기도 하지만 그곳에 살아 있는 평화운동은, 아이들에게 평화를 어떻게 가르치냐면, 분쟁의 주요 주체인 세 사람... 원주민과 가톨릭, 무슬림의 눈으로 민다나오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듣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청소년들에게 60, 70 넘은 할아버지들이 정부군에 의해서 민다나오를 치기 이전에 민다나오의 무슬림들이 가톨릭 사람들을 어떻게 맞이했는지.. 이런 사실들을 치유적 사실로서의 역사라는 수업을 통해서 가르쳐 줘요.

자신들의 정체성을 무슬림과 가톨릭의 분쟁이 아니라 다국적 기업과 필리핀 중앙정부에 의한 민다나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 그런 다양한 관점에서 보게 해주고.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이미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사례를 경험한 사람들이 총을 드는 대신 평화를 선택해서 자기 아이들에게 트라우마가 있는 아이들은 치유해 주고 여러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전쟁도 선택할 수 있고 평화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행동이다. 이것을 현장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데요, 간디친구들과 그런 분들을 만나고 왔어요.

박인규 : 평화는 나의 여행이라는 책을 보니까 신영복 선생의 글이, 평화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평화가 바로 길입니다. 그런 말씀도 하셨는데. 어떻습니까.. 평화운동가로서의 길을 나선 지가 이제 4년쯤 되셨는데 앞으로의 계획 같은 걸 간단히 말씀해 주시죠.

임영신 : 많은 계획은 없구요 그냥 올해 들어서면서 했던 생각은 혼자 여행하지 말고 좀 더 여럿이 함께 여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희가 '이라크나우'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했는데 제일 클릭수가 높았던 게 이라크로 가는 길이었어요. 다른 지역들은 정보가 많아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다니는데, 오히려 민다나오나 분쟁지역 같은 경우는 어려워서, 평화여행의 작은 길잡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박인규 : 말씀 듣고 보니까 우리만의 평화는 없겠다는 느낌이 드네요. 전 세계가 평화로워야 우리도 평화로울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작지만 많은 역할을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오늘은 평화운동가 임영신씨와 함께했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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