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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원 난장에서 새미놀이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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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원 난장에서 새미놀이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2/28] 예인 인생 50년 맞는 '사물놀이 한울림'의 김덕수 예술감독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광대이자.. 꽹과리, 장고, 북, 징 등 4개의 타악기로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린 민간 문화대사, 바로 국악인 김덕수 예술감독입니다. 김덕수 감독은 사물놀이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을 뜻하는 '사물노리안(Samulnorian)이란 신조어까지 탄생시켰는데요. 남사당패의 마지막 신화이자 사물놀이의 창시자로.. 우리 민족의 신명과 에너지를 세계에 알려 온 김덕수 감독이 올해로 예인인생 50년을 맞았습니다. 특히 김덕수 감독은 '참다운 전통이란 끊임없이 시대를 호흡하며 새로운 생명력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사물놀이 한울림의 김덕수 예술감독을 초대해.. 예인인생 50년을 맞는 감회와 우리 전통 문화의 멋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우리 시대 최고의 광대, 국악인 김덕수 감독입니다! 김덕수 예술 감독은 1952년 대전 출생으로.. 6살 때인 1957년 아버지에 의해 조치원 난장에서 남사당패에 입문해 전통예인의 길을 걷게 됐고.. 이후 한국민속가무예술단과 리틀엔젤스에서 활동을 했고 78년 처음으로 사물놀이공연을 시작한 이후 국내는 물론 일본, 미국 등 해외순회공연을 하며 사물놀이를 한국의 대표문화 코드로 세계에 알렸습니다. 93년 사단법인 한울림 예술단을 발족해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1998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우선 축하드립니다. 데뷔 50주년이라는 게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소감이 어떠세요?

김덕수 : 개인적으로는 1957년, 2007년..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한 느낌이 드네요.

박인규 : 계속 똑같은 일을 하셔서 그런가요?

김덕수 : 항상 우리 풍물, 사물놀이 그 신명에 세계 어디를 가든지 간에 그런 한마음 한마당을 항상 이루고 있어서 그런지 정지된 듯한 느낌입니다. 언제 50년이 지났는지 실감이 안 가는데요

박인규 : 실감이 안 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즐겁다는 말일 수도 있을 테고. 다음달에 데뷔 50주년 기념공연을 한다고 들었어요. 요새 바쁘시겠어요.

김덕수 : 이미 제가 45살에 남사당패에 입문한 이후 50년 동안 해온 것을 총정리하는 해로, 시실은 지난 연말에 불란서 파리의 태양극단에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거기서는 주제를.. 가는 곳마다 다른데요, 하여간 전승. 우리 아버님이 저에게 물려줬듯이 이젠 제가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그리고 그때는 전통연희극으로 흥보가를 만들어서, 그래서 연말연시는 불란서 파리에 있었구요. 돌아와서 다시 일본 한 3개 도시에서 공연하고 왔고. 그리고 다음달에 세종문화회관에서 3월 11,12,13일, 3일 동안. 내용은 50년 동안 제가 해왔던, 학습하고 그 속에서 즐거웠던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우리 연예계를 보면 아역스타라고 해서 안성기씨나 하춘화씨 같은 분들도 일찌감치 연예계 생활을 시작하셨지만 김덕수 감독도 굉장히 일찍 시작하신 것 같아요. 5살이면 코흘리개 땐데 기억나세요?

김덕수 : 분명한 건 아버지께서 57년 추석 명절 차례 지내러 오셨다가 저를 깨끗이 목욕시키고 옷 갈아입히시더니 제 손목을 잡고 간 데가, 충청도죠... 대전하고 천안 사이 조치원이라는 자그마한 도시인데, 거기에 난장. 난장판이라고 했죠.

박인규 : 난장이라는 건 뭘 말하는 건가요?

김덕수 : 축제의 장이죠. 요즘으로 치면 추석이벤트라고 할까. 아무튼 조치원 의용소방대라는... 그 시절에 소방대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의용소방대를 만드는 권리기금을 마련하는 난장축제를 우리 아버님 세대의 남사당패와 그 동네 유지들이 기획한, 추석 다음날이었습니다. 57년. 그래서 안 잊어먹고 있습니다.

박인규 : 그 당시면 무동, 이런 걸 하셨나보죠?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김덕수 : 무동은 저보다 큰 형들이 한 거구요. 옛날 영화 같은 데 요즘에도 가끔 보실지 모르겠는데 무동은 무동인데 아주 작은 어린이. 새미라고 합니다. 의상은 승복 같은 걸.. 고깔을 쓰고. 사미승에서 유래된 용어 같아요. 그래서 매이 역할은 그 나이밖에 할 수가 없어요. 커도 작아도 안 되고. 저는 5살 때 바로 그 새미로

박인규 : 어떤 인터뷰를 보니까 그 당시 어머니께서는 상당히 말리셨다는데 해보니까 좋으셨나요?

김덕수 : 어머님만이 아니고 저는 9남매 중 차남, 6째로 태어났는데요 그 9남매 중 아버님께서 저를 지명하신 거죠.

박인규 : 뭔가 재능이 있다고 보신 거군요?

김덕수 : 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하여간 고추만 달고 나오면 자기 분신으로 만드시기로 작정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님 친구 분들한테 말씀을 들어봐도 이미 제가 5살 되기 전부터도 얘기가 있으셨고. 그러니까 아버님에 의해서 운명이랄까요 숙명이랄까. 모든 가족이 다 반대했습니다. 왜냐 하면 그거 하면 밥 빌어먹는 직업이었으니까요.

박인규 : 그 당시만 해도

김덕수 : 지금도 나아진 것 같지만 지금도 크게 대우받는 직업은 아니죠.

박인규 : 7살 때 무슨 대통령상을 받았다고 하던데...

김덕수 : 그 시절에는 대한민국이 참 어려울 때 아닙니까. 그래도 해방되던 해부터 팔도의 풍물의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이승만 대통령 생신 날 전국 농악경연대회를 했습니다. 거기에 저는 충청남도 대표로 올라와서 7살 때 영광스럽게도 이 대통령의 상을 받게 됩니다.

박인규 : 장구를 잘 치셔서 그런 겁니까?

김덕수 : 그때는 저는 쇠도 치고 복도 치고 장구도 치고 열두발도 돌리고, 모든 걸 다 하는 나이가 벌써 됐을 땝니다.

박인규 : 아주 신동이셨군요

김덕수 : 다들 제 이름 앞에 천재소년이란 말을 붙여 주셨죠.

박인규 : 김덕수 하면 역시 사물놀이인데, 김덕수 사물놀이패. 사물놀이라는 게 사실 생긴 지가 얼마 안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덕수 감독이 만든 거라고 봐야 되나요? 말씀을 좀 해주시죠 어떻게 이게 생겨난 건지...

김덕수 : 물론 제가 앞에 서있는 리더이긴 했지만 7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 사회배경을 잘 보시면 감이 잡히는 어르신들이 계실 거예요. 이미 그때만 해도 거리나 마당에서 풍물을 치면 유치장에 가둬 놨습니다. 집시법, 도로교통법 위반 이런 거 포함해서. 그래서 실제로 정치적인, 반정부운동 제일 앞잡이가 또 우리 꾕과리, 징, 장구, 북이었잖아요. 그런저런 사회배경 때문에 사실 나라 전체에... 풍장 친다고 했어요 충청도에서는. 경상도 쪽에서는 매구 친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진짜 사회 속에서 거의 사라졌을 땝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 코흘리개 때부터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를 순방했었고, 그래서 그 나이 와서 사실 생각하게 된 게 있었죠. 우리 존재라는 게, 남사당의 후예라는 게 이 시대에 과연 무슨 역할을 해야 되느냐...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즈음에 바로 지금도 비원 옆에 가시면 공간사라고 있죠. 거기 공간사랑이 있었고 소극장에서 소위 문화운동 같은 게 시작됐을 땝니다. 거기에서 우리 민속학자 심우성씨라든지 강준혁 선생님, 또 부산대학교 채희완 선생, 중앙대 최태현 선생, 이런 분들과 함께 우리가 음악작업을 하던 민속악기 시나위의 정기공연, 공간사랑에서는 첫 번째 공간전통음악의 밤이었습니다. 그 속의 한 프로그램으로 웃다리 풍물가락을 치게 되는 게 사물놀이의 첫 창단 아닌 창단공연이 된 셈이죠. 그때 첫 연주자는 먼저 간 김용배 친구하고 최태현 선배님, 지금 중앙대 국악대학에 계십니다. 그분하고, 채희완 교수와 같이 계신데 부산대학교 이종대 교수. 피리 하셨던 그 분이 저희 학교 선배신데 이렇게 네 명이 첫 연주를 했습니다. 사물놀이도 내년이 벌써 30주년이에요.

박인규 : 아 따지면 그렇네요. 원래는 사실 농악, 풍물의 일종으로 바깥에서 치는 건데 그 중에서 타악기 네 개를 가지고 쳐보자. 그래서 사물놀이라는 게 78년 6월에 첫 공연을..

김덕수 :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꾕과리, 징, 장구, 북... 하면, 물론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다 농사를 지었으니까 그럴 수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탈춤판이라든지 무속.. 우리 같은 남사당 전문 '쟁이'들이 전문 연희를 한다든지.. 사실 태평소 빼면 부는 악기는 꾕과리, 징, 장구를 빼면 우리 서민들 속에는 소리나는 악기는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가지 악기로 이뤄지는 모든 행위. 짓거리, 그래서 놀이 자를 붙인 거죠.

박인규 : 사실 저도 그 공연을 가서 봤습니다.

김덕수 : 아주 감사드리고, 만나 뵙게 돼서...

박인규 :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요, 어떻습니까.. 지금은 워낙 사물놀이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서 심지어 사물노리안이란 말까지 생겼다던데, 이 말은 어떻게 생긴 거예요?

김덕수 : 저희들이 만든 말은 아니구요, 동호인들이 각국에 생기기 시작했고, 국내보다 해외 쪽에 먼저 생겼습니다. 그래서 대개 언론 쪽에서 기사를 쓰면서 그러한 표현을 사물노리안이란 말을 쓰기 시작했죠. 그걸 받아서 국내에서도 그랬구요. 지금 30년 정도 전에 시작했지만 이미 한 25년 전에 제일 먼저 사물놀이를 전공으로 가르친, 영국의 더럼종합대학 음악대학 안에서 이미 84,85년 경에 사물놀이 전공을 뽑기 시작했고 지금은 굉장히 많은 대학에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람이 아닙니다. 백인 흑인들이 징, 장구, 북을 배워서 비싼 가격의 레슨비를 받고 선생을 하시는 분들도 많구요. 30년 동안 저희들의 꿈이었던, 다시 한 번 세계에 꾕과리, 징, 장구, 북소리를 울려 보자는 것을 조금 어떠한 성취를 한 것 같습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우리의 전통문화이면서도 세계성을 획득했다.

김덕수 : 네.

박인규 : 김덕수 감독께서는 사물놀이의 정신이랄까 멋을 난장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데뷔하신 것도 조치원 난장이었고. 사물놀이의 맛이랄까 진수를 어떻게 말로 표현한다면...

김덕수 : 우선은 잘 아시지만, 가장 우리적인 소리라는 거죠. 울림. 우리 자연의, 한국사람이 꼭 반도에서만 산 건 아니라는 거 다들 알고 계시잖아요. 먼 대륙에서 이동해 왔고, 그런 오랜 우리 생활문화 속에서 우리의 소리화 된 거죠. 어디서 언제 시작됐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분명한 건 그 가락의 구조가 우리 한글, 우리말과 같다는 겁니다. 어느 나라 민족의 장단이든 사실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그게 가장 큰, 꾕과리, 징, 장구, 북이 갖고 있는 매력이라고 저는 보고 있고.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신, 철학이랄까요. 누가 뭐라고 하든 그 정신, 철학은 역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롭게 하고 더불어 사는 대동의 정신. 한마음으로 상생의 정신, 바로 단군할아버지의 홍익인간정신, 대동의 정신, 상생의 정신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박인규 : 78년에 처음 사물놀이 공연을 하신 이후로 무수하게 외국에 나갔다 오셨는데 그동안 공연횟수를 대략 셀 수가 있을까요?

김덕수 : 이미 대충 숫자를 파악한 게, 몇 년 전에 4500회를 돌파했습니다. 공식적인 포스터, 팜플렛, 초청을 받은 공연이. 요즘에는 제가 대학에 근무하면서 공연횟수가 좀 적어졌지만 저는 존재가 공연을 하는 연희자니까요. 지금도 최하 1년에 100회는 합니다. 그 전에는 평균 많을 때는 1년에 200회 정도 했었어요.

박인규 : 사물놀이는 이미 세계인의 음악이 된 건 사실인데 최근에 보면 크로스오버라고 해서 재즈하고도 같이 하고, 그걸 보면서 우리나라의 비빔밥문화가 굉장히 우수하다고도 하는데, 우리 사물놀이가 서양음악하고도 잘 어울립니까?

김덕수 : 우선 주체가 리듬이기 때문에, 잘 아시지만 전 세계에 지금 보편대중화 된 음악이 다 어느 민족의 리듬을 갖다가 새롭게 옷입혀 놓은 겁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 좋아하는 힙합, 재즈, 레게, 다 그렇잖아요. 저는 코흘릴 때부터 외국에 다니면서 현장에서 이미 많은 크로스오버 아닌 퓨전을 했어요. 저 어렸을 때 낭랑악극단에도 있었거든요. 거기서 저 드럼 쳤어요. 아까 말씀하신 하춘화씨, 혜은이씨 이때 다 같이 다녔어요. 거기 어린이들의 그룹사운드가 있었는데 저는 이미 그때 드럼을 치면서 상모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리듬, 장단악기기 때문에 굉장히 큰 에너지를... 상대가 어떤 음악장르를 하든 우리가 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즐거운 음악이 계속 창출됐죠. 그래서 저는 사물놀이 초기 훨씬 이전에 그런 걸 했구요. 이미 그 전에 뮤지컬적인 형태를 빌어서 춘향전, 심청전, 해외에서도 했구요. 음악적인 걸 집중해서 사물놀이 이후 크로스오버로 낸 게 음반도 한 10장 가까이 됩니다.

박인규 : 아드님은 힙합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아드님이 택하신 겁니까? 잘 어울립니까 힙합하고도?

김덕수 : 그녀석이 저처럼 우리 것을 해주길 바랐는데 어찌 됐든 중학교 고등학교까지는 사물놀이를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흑인의 맛에.. 그래서 힙합을 하는데 이제는 직업 힙합꾼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더라구요.

박인규 : 같은 힙합이라고 해도 사물놀이적 힙합, 한국적 힙합, 이런 게 나오지 않을까요? 어려서부터 그런 걸 했으니까...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김덕수 : 절대적으로 나와야지요. 나오길 바라구요. 그리고 대개 힙합이라는 게 장단을 덩덕쿵더덕 이렇게만 치는 게 아니라 덩덩덕쿵더덩... 이거 가사가 어울리면 힙합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아주 옛날부터 판소리니 이런 거 이전에도 동해안과 서해안, 내륙 쪽이 달라요. 훨씬 힙합보다 재밌는, 우리 것이라서가 아니구요. 그걸 하면 한국의, 코리언힙합이 되는 거죠.

박인규 : 한 번 기대해 보겠습니다. 한국적 틐색을 지닌 힙합이 나올 수 있을지. 여기서 잠깐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연주곡 '소리'를 들어보겠습니다. --------

박인규 : 네, 김덕수 감독님의 '소리'를 들어보셨는데요, 저는 김덕수 감독님이 장구만 잘 치시는 줄 알았더니 소리도 아주 구수하고 좋네요.

김덕수 : 막걸리 먹고 힘들었던 목소리였습니다.

박인규 : 원래 우리 소리는 약간 취기가 들어가야.. 6살 때 처음 조치원 난장 가실 때 어머니께서 그야말로 밥 굶는다고 하셨다는데 지금 50년 지나면서 전통예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나 대접, 많이 좋아졌나요? 어떻습니까?

김덕수 : 거꾸로 나빠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들 좋아졌다고들 느끼고 계시겠죠. 왜냐면 전통예술이란 게 생활 속에 있어야 되는데 우선 가장 어려워진 게 생활 속에서 떠나버렸다는 거죠. 전 국민이 아까 같은 소리에 일할 때도 사람이 죽었을 때도, 시집 장가갈 때도 이 소리뿐이었어요. 그러니까 대우 받던 시절이었죠. 지금처럼 이렇게, 방송채널만 몇백 개가 있는 것 같더라구요. 그때 어째됐든 전국적으로 생활 속에 가장 많이 있던 게 이거였는데 이게 언젠가 생활 속에서 완전히 떨어져서. 결혼식도 15분이면 끝났거든요. 전국적으로 불려다녔던 거예요. 우리 국민들이 요즘 착각하고 있는데, 공연 하면 꼭 카네기홀에나 가서 하고, 예술의 전당 같은 데 가서 해야지 공연인 줄 아는 거죠. 아니거든요. 잔칫집에서 상가에서도 하고. 그게 진짜 살아있는 공연이죠. 삶 속에서.. 그게 없어졌기 때문에 우리 전통문화가 우리 생활 속에서 사라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박인규 : 그렇지만 98년도인가요? 한국예술종합학교라는 데가 사실은 기존 예술대학과는 다르게 실기 위주로 하자는 취지로 생겼고. 거기에 전통예술원이 생긴 것. 그래서 전통연희과가 생긴 건 어쨌든 다시 생활 속으로 복원하기 위한 노력으로 봐야 되지 않을까요?

김덕수 : 그 실기 면에서, 우리들 세계에서는 사건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이조 500년, 그리고 이조 이후 해방 이후, 한국전쟁 이후 한 600년 가까이 우리 생활 속에서 사실은 제일 뿌리가 깊은, 우리들의 것이었죠. 그런데 이조 500년에서는 이조 양반문화 때문에 천시당하고.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전쟁 이후로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박 대통령의 새마을사업.. 허례허식, 퇴폐풍조 해서 잔치니 뭐니 싹 없어졌고. 그 후 정치적으로 그런 일이 있은 후에는 더 꾕과리, 징, 장구, 북 우리 신명만 내면 노이로제 걸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정치 하시는 분들, 기업 하시는 분들 아직도 그렇죠. 그래서 그 속에서 결국은 많은 전문 '쟁이'들, 예인들이 떠나버린 겁니다. 그리고 학습하는 데서도 없어졌구요. 피만 우리 피지 듣고 보고 생활 속에서 자라나질 못했기 때문에 거꾸로 청년들이 우리 소리를 들으면 이질적으로 들린다는 거죠 문제는. 그런 와중에 그래도 실기 위주의 대학이 생겼고 거기에 탈춤, 풍물, 무당의 무속, 남사당 같은... 남사당이 작년에 왕의 남자 때문에 많은 국민들에게 알려졌다구요. 바로 그 남사당패 같은 전문적인 집단인데, 그런 연희들... 이걸 대학과정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건 엄청난 일이죠. 그 속에서 학사, 석사, 박사도 나오고.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그건 아주 좋아졌는데 사실 삶의 판이 바뀌어야 되거든요.

박인규 : 그렇지만 최근에 보면 웬만한 고등학교 같은 데 가보면 사물놀이패 만들어서 고등학생들이 많이 놀던데, 그런 건 그래도 우리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김덕수 : 굉장히 많아진 겁니다 그게. 어머님들, 주부님들, 그리고 각 지역마다 있는 동사무소 단위, 그리고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 대학이 좀 약해졌죠. 대학이 과거에 비해 굉장히 약해졌습니다.

박인규 : 70년대에는 사실 대학에서 우리 문화를 살리기 위한 움직임이 많았는데

김덕수 : 예. 대학이 좀 약해졌고 그 이외에는 직장에서도 많이들 하시는 것 같고. 문제는 신명의 문제죠. 우리가 마당의 땅을 박차고, 아까 말씀하셨듯이 막걸리 한 잔 먹고 노는 이런 신명이 대단히 약해졌다는 거죠.

박인규 : 김덕수 감독께서는 전문적인 예인들이 많이 나오는 것보다는 그런 전통연희를 일반 생활속에서 하는 것이 참 중요한데..

김덕수 : 생확 속에 돼야 그 속에서 진짜 '쟁이'가 나오거든요. 그리고 그 쟁이들은 많은 국민들이 즐기고 생활화해 줘야지 또 가르치고 공연을 해도 많이 와 주실 거구요.

박인규 : 김덕수 감독님처럼 아주 장구에 제재를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그러면 김덕수 감독님께서는 전문예인으로서 하시고 싶은 일도 있을 것 같고, 전통예술을 일반 삶에 뿌리내리는 일도 하고 싶으실 것 같은데, 그런 측면에서 앞으로 하시고 싶은 일이 어떤 건지 마지막으로 말씀해 주시죠.

김덕수 : 여지껏 저는 해왔습니다. 공연에 제 시간의 반을 투자했다면, 제 시간의 반은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전통의 계승이랄까요 교육프로그램에 저의 모든 걸 투자했고. 국내외로요. 그래서 저의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뭘 저는 이루고 싶으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서양의 선교사들께서 우리나라에 좋은 서양문화를 갖다 줘서 우리 생활이 풍요롭게 된 것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것이 진짜 좋은 거라면 그 좋은 에너지를, 그 기운, 신명을 세계인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전 세계 음악교실에, 전 세계의 놀이판에 우리의 신명나는 꾕과리, 징, 장구의 가락과 소리와 춤을 가르칠 수 있게 하는, 그 작업을 저는 죽을 때까지 해야 된다고 믿고 열심히 하고 있고. 거기 걸맞게 이제는 21세기 디지털 시대인데, 그 전에는 태평소 날라리만 필요했거든요. 이제는 전 세계 좋은 악기가 우리나라에도 다 들어왔으니까... 색소폰, 태평소, 트롬본, 모든 브라스 악기.. 이미 그건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이게 세계화 된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프로그램 개발이죠. 지금까지도 해왔고 앞으로 그것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박인규 : 보통 데뷔 50주년 하면 인생을 마감하시는 나이가 되시는데, 김덕수 감독님은 아마 데뷔 70년 80년까지 하실 것 같아요. 전통문화를 생활화하기도 하고 세계화 하는 데도 앞으로도 하실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김덕수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데뷔50년을 맞는 사물놀이 한울림의 김덕수 예술감독을 초대해.. 예인인생 50년이 주는 감회와 우리 전통 문화 발전의 멋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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