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 쪽으로 넘어가려다 이스라엘 군인의 총에 한 소년이 사살되었다. 그 소년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라고 했다. 그때 나도 열다섯이었다.
그해 5월, 옷가방 하나 손에 들고 상경한 나는 남산시립도서관 옆 측백나무 울타리 밑에서 날 지난 신문을 덮고 첫날밤을 보냈다. 새벽녘 잠에서 깬 건 아주 강렬한 불빛이 내 안면을 쏘아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서였다. 하지만 나는 방범대원이 내리비추는 손전등 불빛 때문에 똑바로 눈을 뜰 수 없었다. 취직도 하기 전 독안에 든 한 마리 쥐로 전락해버린 나는 무섭고 두려웠다. 도망가자.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잡히면 끝장이다. 왼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 나는 밤이슬에 젖은 촉촉한 흙을 오른손으로 한 줌 움켜쥐었다. 그런 다음 종주먹을 날리듯 한 줌 흙을 방범대원의 얼굴을 향해 뿌린 뒤 냅다 뛰었다.
측백나무 울타리 밑을 간신히 빠져나와 남산 순환도로로 도주하던 나는 호루라기를 불며 뒤쫓아 오는 두 명의 방범대원을 따돌릴 요량으로 숲속으로 길을 바꿨다. 불빛 한 점 도와주지 않는 캄캄한 숲속을 헤쳐 가느라 나무끌텅에 발등이 찍히고, 나뭇가지에 얼굴을 찔렸다. 그때마다 내 입에서는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잔뜩 겁에 질린 사슴마냥 얼마쯤 내달렸을까. 온몸이 쑤시고 욱신거렸다. 그제야 한숨 돌린 나는 남산 숲에서 빠져나와 가로등이 없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반시간 넘게 실골목을 타고 내려오자 거대한 골리앗 건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서울에서 가장 높다는 대우빌딩이었다. 그곳에 몸을 숨긴 나는 건너편 서울역 광장에 세워진 시계탑을 올려다보았다. 새벽 3시 20분. 통금이 해제되어 서울역으로 건너가려면 사십 분은 더 기다려야 했다.
2005년 12월, 도문에 도착해 두만강변을 거닐던 나는 그곳에서 앵벌이 소년을 만났다. 나이를 묻자 행색이 초췌한 소년은 열다섯 살이라고 했다. 나는 그 소년에게 밥을 사주고 싶었다. 하나 앵벌이 그 소년도 그날 새벽 두 명의 방범대원에게 쫓기던 나처럼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20위안이 없으면 10위안만 달라던 소년이 다급하고 초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오래 있다 중국 공안한테 발각되면 끝장입니다."
한국으로 돈 벌러 간 엄마에게서 소식이 끊기자 아버지마저 집을 나간 지 꽤 되었다는 소년으로부터 '공안'이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내 마음은 바빠졌다. 이걸 어쩌나. 잡히면 안 되는데, 잡히면 안 되는데…. 자, 여깄다. 어서 가거라. 어서 이곳을 피해 멀리멀리 도망가거라. 도망가는 그곳이 지구 끝이더라도 절대 뒤돌아보지 말거라. 잡히면 죽는다. 잡히면 끝장이다. 팔레스타인이라는 나라에서는 죽은 자도 검문소를 통과해야 비로소 죽음의 거처에 닿을 수 있다고 하더라.
그리고 며칠 뒤 북경으로 간 나는 베이징발 울란바토르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무사할까, 그 소년은. 이 한밤에 그 사내는 두만강을 무사히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을 경비하는 순사가 왔다 갔다, 오르며 내리며 분주히 하는데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무사히 국경을 넘었을까? 국경을 넘어가는 국제열차 차창 밖으로 이름조차 물어보지 못한 앵벌이 소년과 파인 김동환의 시 <국경의 밤>에 등장하는 사내가 부자간처럼 겹쳤다.
울란바토르에 도착한 지 나흘째로 접어드는 날, 나는 탄광이 있다는 날라이흐 마을로 향했다.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또 그곳에서 두 소년을 만났다. 9-13시까지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14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는 막장을 오르내리며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술드몽크와 바이샤의 나이는 만으로 열다섯 살. 무엇보다도 나는 두 소년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이 몹시 고통스러웠다.
"탄광 일이 힘들지만 어쩔 수 없어요. 아버지는 여섯 살 때 돌아가시고, 엄마와 누나, 형하고 사는데 형과 내가 벌지 않으면 우리 집이 많이 힘들 거예요."
"잠은 수업시간에 자요. 안 자려고 하는데도 졸음을 이겨낼 수가 없어요. 술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게 제 꿈이에요."
영하 30도를 밑도는 허허벌판 난장막장에서 만난 두 소년과 헤어져 울란바토르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승용차에 타고 있던 나는 눈을 감은 채 중3 딸의 얼굴을 떠올렸다. 용서해다오, 딸아. 나의 아들들아, 용서해다오. 너무 많은 세상의 아비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너희들을 난장막장으로, 국경으로 내몰고 있구나.
며칠 전이었다. 나는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로 일자리를 찾아 국경을 넘으려던 세 명의 소년 중 한 소년이 이스라엘 군인의 총에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군 소식통은 셋 중 한 명이 "멈춰서!"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아 사살하였다고 했고, 다른 두 명의 소년은 체포되어 팔레스타인 쪽으로 회송되었다고 했다. 어른의 말이었는지, 아니면 열다섯 살 소년의 말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소설가 아다니아 쉬블리의 글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가자 지구 안에는 일자리 같은 건 없고, 날아다니는 총알뿐이에요."
설마? 아닐 거야. 소설의 한 구절이거나 장난감 총 놀이를 묘사한 동화일 거야. 어떻게 매일같이 총알이 날아다니는 나라가 있겠어. 그러나 어제 나는, 그 소년이 사살된 나라의 앰뷸런스는 죽음보다 늦게 도착한다는 한국 시인 박후기의 시 <소녀들>을 접하고 말았다. 상상이 아닌 현실의 시를. 더는 끔찍해서 읽을 수 없는 시를!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www.palbridge.org'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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