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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본질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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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개혁의 본질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2/20] '조광조 연구가' 성균관대 이상성 교수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우리 사회에서 '개혁'이 화두로 떠오를 때마다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 바로 조선조의 정암 조광조입니다. 그동안 조광조의 개혁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나왔습니다만.. 주로 '실패한 개혁가', '성급한 이상주의자'라는 얘기가 뒤따랐는데요.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조광조를 연구해 온 성균관대 이상성 교수는.. 조광조의 개혁은 절대 실패한 게 아니며.. 이제는 그의 개혁의 방향과 정당성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그의 삶과 사상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개혁'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고 말하는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이상성 교수를 초대해.. 오늘날에도 조광조의 개혁이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무엇인지.. 또, 그의 개혁노력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바는 무엇인지..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조광조 연구가 이상성 교수입니다! 이상성 교수는 1958년 경남 고성 출생으로.. 88년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저서로는 <정암 조광조의 도학사상>이 있으며 2000년부터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최근에 '조광조 연구'라는 책을 내셨죠? 최근에 소설가 최인호 선생을 모셨는데 그분이 '유림'이라는 여섯 권짜리 책을 내셨어요. 그 중 첫 권이 조광조에 대한 얘기더라구요. 그러고 보면 요즘에 조광조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많다는 느낌이 들고, 특히 조광조라는 분은 한 500년 전에 돌아가신 분인데 책이 나오고 나니까, 이상성 교수님의 책에 대해서 언론에서도 상당히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아요. 단순히 학문적 관심 이상이란 느낌이 드는데 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이상성 : 조광조는 500년 전 인물이긴 하지만 워낙 유명하고 그래서 제 책에도 주목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박인규 : 단순히 유명하다는 것 가지고는 아닌 것 같은데. 개혁이라는 말이 사실 YS때부터 나온 것 같은데.. 조광조의 개혁에 대한 관심 같은 게 맞물려진 게 아닐까요?

이상성 : 그렇습니다. 조광조 하면 개혁, 개혁 하면 조광조라고 할 정도로 조광조는 역사 속에서 아주 개혁의 상징처럼 알려져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책을 보면 큰 제목은 '조광조 연구'고 작은 제목이 '한국 도학의 태산북두 조광조'라고 돼 있습니다. 우선 태산북두라는 건 잘은 모르지만 대단한 분이라는 뜻 같은데 정확하게 무슨 뜻입니까?

이상성 : 태산은 시조의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할 때 태산.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가장 높은 산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던 것이고. 북두는 북두칠성. 아주 별 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별,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마음으로 존경하고 존중하는 인물의 상징으로서 쓴 말인데, 그 말은 제가 쓴 건 아니고 율곡이이가 경연일기에서 조광조를 평가할 때, 당시 조선조 사림의 영수고 조선조 도학의 태두, 태산북두다.. 라고 한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제 생각에는 조광조를 참 적절히 평가한 것으로 판단했고, 그래서 책의 부제로 달았습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후세의 사표, 지침이 될 만한 인물이라는 뜻이 되겠군요?

이상성 : 진리의 사표, 선비정신의 가장 표준 같은 인물이다. 이런 표현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박인규 : 보통 조광조, 율곡, 퇴계.. 하면 유학자, 성리학자라는 말을 쓰는데, 그런 말을 안 쓰시고 도학이란 말을 쓰셨어요. 도학과 성리학, 도학과 유학은 차이가 있는 겁니까?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이상성 : 도학과 성리학은... 조선조에는 주자학, 성리학, 신유학, 정주학, 이렇게 같이 섞어 쓰던 표현입니다. 그런데 학문적으로는 가각 명칭들이 약간 다릅니다. 성리학은 이론 중심의 유학을 말할 때 특히 쓰는 표현이고, 도학은 성리학적 이론 체계를 현실에 직접 몸으로 실천하는, 배운 그대로 옮기는, 그래서 사회문제를 개혁하고자 할 때 직접 나서서 실천한다는 측면에서 주목하는 표현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박인규 : 유학이나 성리학의 사상을 현실에 적용해서 현실을 유학적 이상에 맞게 바꾸기 위한 실천적 학문이다. 조광조는 사실 한 4년 정도 개혁정치를 하다가 기묘사화로 38세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조광조가 하려고 했던 개혁정치의 핵심이 뭡니까?

이상성 : 한 마디로 잘못된 정치의 본질.. 정도를 회복하고, 정치가 근본적으로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그래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가야 한다. 그런 점이 조광조 개혁의 아주 근본지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정치의 본질은 사람다움을 회복하는 거다. 그런 뜻입니까?

이상성 : 예. 그렇습니다.

박인규 : 하지만 조광조는 이른바 위훈삭제라고 해서 역대 반정공신들을 가짜 공이다. 그래서 76명인가요.... 그러다가 결국 반격을 당해서 귀향 가서 죽게 되는데, 그래서 너무 성급한 거 아니냐. 그의 개혁은 실패했다는 평가들이 주류인 것 같아요 아직까지. 동의하십니까?

이상성 : 저는 개인적으로 재고해야 되고 재조명해야 될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상당히 문제 있는 잘못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왜 그렇죠?

이상성 : 조광조는 언뜻 외형적으로 보면, 조광조는 개혁을 하다가 4년 만에 사화를 당해서, 반격을 당해서 귀향을 가서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나니 언뜻 실패한 것으로 볼 소지도 충분히 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그렇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판단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평가는 조광조 개혁의 본질을 너무 외형적으로만 초점을 맞추고 죽음 그 자체로 끝났다는 것으로 보고, 조광조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했던 정신, 사상적 기반이 된, 추구하고자 했던 개혁의 방향과 내용과 질과 성격을 조광조 입장에서 또는 당대의 여러 가지 정치,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보지 못한 단편적인 접근이라고 보고. 무엇보다도 그런 입장은 당시의 개혁세력들, 신진사림들을 사화로 몰아가던 훈구세력의 논리를 거의 그대로 밟고 있다는 측면에서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봅니다.

박인규 : 조광조가 실패해서 죽임을 당했으므로, 그의 개혁노력도 다 쓸데없다. 그런 생각이 있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 그가 하고자 했던 문제의식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겠다. 그런 말씀이신가요?

이상성 : 그렇습니다. 문제의식과 근본정신, 추구하고자 했던 세계, 그리고 그로써 달라진 세상의 모습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이번에 쓰신 책을 보면 퇴계나 율곡의 조광조에 대한 아쉬움을 말한 부분, 후대가 너무 그 부분만 강조했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렇다면 퇴계나 율곡이 조광조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부분이 많이 있는 모양이죠?

이상성 : 그렇습니다. 퇴계는 조광조의 삶에 대해서 세 가지로 불행하다고 얘기했습니다. 첫째, 너무 학문이 완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벼슬에 나갔고. 둘째는 벼슬에 나가더라도 뜻이 맞지 않으면 물러서야 되는데 퇴계 자신의 호처럼. 그러지 못했고. 셋째, 귀향 가서 사약을 받고 불행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렇게 평가했어요. 그런 평가로 인해서 일반적으로, 아... 퇴계도 조광조를 실패했다고 본다고 하는데, 그리고 율곡도 경연일기나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정암 조광조가 천자는 아주 뛰어나지만

박인규 : 천자라는 건 천품, 타고난 자질...

이상성 : 예. 천품은 그렇지만 벼슬길에 나가서 실시하고자 했던 개혁의 구현 과정이 조금 완급을 조절하지 못한 면은 있다. 그런 평가를 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퇴계율곡에 의해서 조광조가 정당한 평가를 받고, 사실 퇴계율곡 만큼 조광조를 마음으로 존경한 사람이 없을 정도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 퇴계는 행장에서, 내가 조광조에게 직접 배우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 영향 받은 바가 매우 크다고 했고, 율곡은.. 특히 학자들 중에서 율곡이 사실 정암 조광조를 가장 올바르고 정당하게 평가해서 사후 조광조의 위상을 되찾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율곡은 파주에 은병정사를 지어 놓고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조광조의 흉상을 제작해 놓고 존숭할 정도로 마음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의 표현들의 내면을 보지 못하고 외형적인 표현 그 자체에만 집중해서 그런 평가를 내리는 것은 퇴율이 정암 조광조를 보는 관점 자체를 바르게 인식한 거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박인규 : 결과적으로 실패하긴 했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를 볼 것이 아니라 조광조가 지향하고자 했던 바를 정당히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신데, 조광조라는 분이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신분문제 등에서 자유주의적이라고 해야 됩니까? 개방적이라고.. 예를 들면 갖바치와 만나시기도 하고, 당시에 성행했던 첩을 두지고 않았다던데, 실제로 갖바치하고의 이야기는 실화입니까

이상성 : 그렇습니다. 조광조는 지금 말씀하신 대로 상당히 개방적이고 선진적이고 신분제도 자체 같은 데서도 굉장히 앞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광조가 당시로선 생각할 수 없는 신분구분이 있던 시대인데, 그런 귀족층인 선비가 갖바치에게 찾아가서... 갖바치가 식견이 높고 세상 보는 안목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고 배우겠단 생각을 갖고 직접 가서 그분과 같이 잠을 자며 세상을 다스리고 경영하는 이치를 배웁니다. 그런 측면에서 조광조는 신분차별을 철폐해야 된다는 주장을 사실상 사상가들 중에서 거의 처음으로 합니다. 그런 것은 프랑스 혁명... 서구보다도 약 200년 이상 앞서는 아주 선진적이고 개방적인 자세입니다. 이후에 율곡 같은 이가 조광조의 신분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것의 영향을 받아서 간곡하게 주장을 선조에게 개진하는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놀랍고 선진적인 태도입니다.

박인규 : 부부관계에서도 굉장히.. 첩을 안 두고 금슬이 좋았다던데...

이상성 : 예. 조광조는 당시 선비들에게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첩을 두지도 않았고, 또 사실 조광조가 굉장히 직선적이고 과격한 개혁적 조치들만 단행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벼슬길에 나가서 여러 가지 개인적인 문제, 부부관계 문제로 고민해 오는 사람들에게 매우 인간적인 판결이나 조정을 해주는 사례들로부터...

박인규 : 한 가지 사례 같은 게 있을까요?

이상성 : 그 당시 부부문제로 조광조에게 고민을 의뢰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광조는 부부문제야 말로 인간관계 중 가장 근본이 되는 거라고 전제한 뒤에, 부부문제는 우선 해결의 주체가 당사자여야 한다. 다른 사람이 개입해서는 안 되는, 풀기 어려운.... 그래서 무엇보다도 부부문제의 본질을 부부 당사자로 옮기는....

박인규 : 남편과 아내가 서로 노력해라, 부모님이나 이런 문제가 아니고.

이상성 : 네. 사회적, 일반적 시각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부부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이런 입장에서 조절해 주고 한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박인규 : 이 책을 보면 조광조의 개혁이 어쨌든 실패를 했는데 실해한 건 조광조가 아니라 중종이라는 주장을 하셨어요. 그건 어떤 의미입니까?

이상성 : 조광조의 개혁에 대해서.... 저는 오히려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한 게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중종이 실패했다고 보는데, 그것은 참 조광조라는 우리 역사상 드물게 보는 인물을 임금이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물을 처음에는 차서를 불문하고 10년 이상 걸리는 초고속 승진을 시키다가 하루아침에 다시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배제하는, 그래서 죽음으로 몰아가는 역할을 중종이 하는데, 조광조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개혁에 대해서 조금도 하늘에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결과적으로 중종은 상당히 말년이 구차스러울 정도로 선비들을 일망타진한 부분. 기묘사화로 인해서 225명의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데, 그런 일들로 중종은 말년에 아주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랄한 비판과 비난을 받게 됩니다. 숙종은, 같은 임금이지만 내가 조광조 시대에 태어나지 못한 걸 매우 애석하게 생각한다고 할 정도로 그런 인재가 있었음을 인정했는데 오히려 중종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조광조가 벼슬길에 나간 지 4년 만에 세상이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조광조가 벼슬길에서 나올 때 한양 백성들이 나와서 우리 상전 오신다고 길바닥에 전부 엎드려 인사를 할 정도로 참 세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런 드물게 오는 개혁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중종은 그렇게 사화를 묵인, 종용함으로써 끝이 나고 말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중종이 실패자라고 보고 싶습니다.

박인규 : 조광조의 삶. 특히 개혁시도와 실패, 좌절에서 혹시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이 있을까요?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이상성 : 정치적 얘깁니다만, 조광조가 오늘 우리사회 개혁을 보면 분명 지적할 것이 몇 가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 하나가, 근래 우리나라의 위정자들도 평등과 복지를 주장하지만 조광조의 입장에서 접근하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추구하는 평등은 하향평등인 것 같아요. 그런데 조광조는 융평을 통해서 상향평등을 주장했습니다.

박인규 : 융평이란 어떤 거죠?

이상성 : 융평이란 높이 끌어올려서 평등을 지향하는, 그런 측면에서 아주 대조적인 평등입니다. 그런 상향평등의 복지사회를 조광조는 태화지역, 지치의 경지라고 했고, 비근한 예로는 요순시대와 같은 시대가 그런 시대라고 얘기했습니다. 다음으로 조광조가 개혁의 본질을 말한다면 그 길 자체가 정도인가, 올바른 길인가의 여부를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조광조가 당시 그렇게 개혁을 과단하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정도를 걷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었고 용기가 있었고, 다른 생각이나 개인적 영달이나 욕심을 생각한 계획이 아니라 정도로 가는 개혁이었기 때문에 개혁의 본질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걸 조광조는 지적할 것 같습니다.

박인규 : 바른 길을 택해서 모든 사람들을 같이 높이는 개혁이 돼야 한다. 좀 전에 조광조의 개혁이 자기가 확신하는 옳은 길을 따라가면서 나아지는 길을 추구했다고 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요즘 정치하시는 분들이 민생, 개혁 얘기도 많이 하시는데 조광조를 연구하시는 학자 입장에서 봤을 때 요즘의 개혁이라는 것이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까?

이상성 : 방향적인 측면에서 조광조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할 것 같습니다. 보통 개혁 하면 바꾸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조광조가 정치 일선에서 4년간 실시한 개혁은 전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개혁이었습니다. 그 당시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잘못된 부분을 잡는 것. 그것은 공자가 논어에서 '정자정야'라... 정치란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라는 말과도 통할 수 있는 부분인데, 소격서를 혁파한다든지 위훈을 삭제한다든지, 과거제도를 문장실력만 뽐내는 제도에서 현실로 인재들을 끌어내기 위해서 추천과 시험을 병행해야 한다든지, 이런 계획들은 그 당시 모두 문제 있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 개혁은 모두 하나같이 무엇을 새롭게 하려고 하고 새롭게 만들려고 하는데 사실 그 당시 조광조의 개혁은 모두 잘못되고 뒤틀린 것들을 제 위치로 하는 측면에서 오늘날 개혁을 하는 방향에서 개혁의 본질적 접근을 시사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개혁이란 새로움을 쫓아가는 게 아니라 틀린 걸 바로잡고 근본을 찾는 것이다. 한국철학 공부를 시작하신 게 80년대 중반인데, 요즘 와서는 전통의 재발견이라고 할까요? 우리 선인들의 정신을 찾기 위한 작업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유학, 성리학 하면 케케묵은 것, 아무 쓸 데 없는 것..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 우리 사회에서 과거 조광조가 됐건 이퇴계가 됐건 그런 과거 우리 선인들의 활동에 대한 관심들을 보면 많이 달라졌죠?

이상성 :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당시 유학이나 한국철학, 특히 제가 전공하는 도학 이런 것은 학문풍토로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한 마디로 상품성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던 풍조가 있었습니다. 사회과학적인 영향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버린다고 해서 가치 없는 것은 아니고, 현대사회는 이익사회고 이윤추구가 최고의 가치로 여겨집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익만으로 안되는 게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 다시 전통, 한국사상, 한국철학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는 것은 참 긍정적인, 좋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말씀하시면서 현대가 이익사회긴 하지만 이익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선인들의 삶과 사상에서 보면 우리가 과연 이 시대에 다시 배워야 할 게 어떤 겁니까?

이상성 : 조선시대, 조선조 사회는 조광조가 살았던 시대 같은 경우 물질적으로 보면 지금보다 확실피 풍요롭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조선조 사람들이 오늘날 사람들보다 정신적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살았을까, 그런 측면에서는 다른 견해가 있을 겁니다. 저도 그런 점에는 동의합니다. 물질적으로 현대가 많이 풍요로워졌지만 과거에 비해서 정신적으로는 훨씬 부족하고 사람의 가치, 인간에 대한 존중... 이런 것은 과거 그런 시대가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정겹고 따사로움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조광조 연구를 10년째 해오시면서 책을 두 권이나 내셨는데, 물론 조광조 연구가 끝난 건 아니시겠죠? 앞으로의 계획을 마지막으로 말씀해 주시죠.

이상성 : 저는 조광조 문집. 정암 선생 문집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것이 일부 또는 전부가 번역돼 있긴 한데 오래되고 해서 오늘날 사람들이 보기에는 적절치 않습니다. 부족한 면이 있어서 그것을 새롭게 개념... 주석을 달 필요가 있으면 달아서 역주 정암집을.

박인규 : 일반 사람들이 정암 선생의 문집을 쉽게 볼 수 있도록 책을 번역해서 내신다는 거군요?

이상성 : 예. 2007년 정해년에 준비를.

박인규 : 분량이 많습니까? 일찍 돌아가셔서 많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상성 : 퇴계나 율곡처럼 전문적인 작업을 못하셨기 때문에, 현실에서 정치를 펴시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전문저술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알성시책이라든지 조광조의 사유체계를 알 수 있는 글들, 특히 왕조실록 같은 데는 조광조의 말이 그대로 기록돼 있어서 후세에 문집이 잘 정리돼 있는 편입니다.

박인규 : 올해에는 정암집 역주를 준비하시고 그 다음에 또 계획이 있으십니까?

이상성 : 조광조 연구의 마무리 측면에서, 제가 부족하지만 능력이 된다면 조광조 평전을 써보고 싶습니다. 한 5년 안에..

박인규 : 정치를 인간다움의 회복이라고 봤던 조광조의 개혁은 미완으로 끝났지만 50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우리가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상성 교수님의 조광조 연구도 계속 깊이있게 나아가시기를 빌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 이상성 교수를 초대해.. 조광조의 개혁과 오늘의 개혁에 관해 말씀 나눠봤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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