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비핵화 실현을 위한 9.19공동성명 이행의 첫걸음으로 기록될 '2.13합의'는 이라크 수렁에 빠진 조지 부시 미 행정부와, 지나친 위기 조성보다 잠정적인 상황 관리를 택한 북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나온 결실로 평가된다.
그러나 북미 양국 강경파의 반발과 그에 따른 국내정치적 다이나믹스가 작동할 경우 또 한 번 난관에 처할 가능성은 여전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美, 작년 5월부터 '새로운 대북 접근법' 거론돼
이번 합의의 배경으로 전문가들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미국의 변화다. 북한과의 양자대화를 한사코 거부하며 '악행(惡行)'에 대한 보상은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던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태도를 바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악화될 대로 악화된 중동 정세, 그리고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확인된 민심의 이반 등으로, 북핵 문제라도 풀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신안보연구실장은 "부시 행정부의 중동정책이 혼미해지면서 북핵 문제에서라도 가시적인 성과를 얻으려는 의지가 강했다"며 "중간선거로 인해 나타난 정치세력의 변화도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조 실장은 특히 "지난해 5월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의 최측근 보좌관이었던 필립 젤리코 자문관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이미 북한 핵 문제와 평화협정 체결을 동시에 논의하는 것이 포함됐었다"라며 "당시 나온 용어가 '광범위하고 새로운 대북 접근법'이었는데 북한 핵실험 전부터 미국의 태도 변화 조짐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미국이 북한에 대해 일종의 '도덕적인 접근'을 취해 온 게 대북 정책 난맥상의 근본적인 원인이었지만, 중간선거 이후 현실주의적인 접근으로 명백히 선회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지난달 베를린 북미 접촉이나 이번 합의에 나타난 단계적 해결법 등을 들며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보상은 하겠다는 쪽으로 선회했다"고 말했다.
北, 핵보유국 '여유'와 제재 강화 '부담' 동시 작용
'선결조건'으로 내걸었던 금융제재 문제를 핵폐기 논의와 분리하는 것을 수용하고 핵 '폐쇄'에 중유 5만톤 지원이란 '양보'를 받아들이는 등 북한의 변화도 합의의 주된 원인이었다.
북한의 변화 요인에 대해 조성렬 실장은 "핵실험으로 인한 제재와 내부의 어려움이 가중됐을 것"이라며 "최근 확연한 미국의 태도 변화를 활용하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 대북제재가 부활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도 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유엔 대북 제재결의가 통과됐고 중국, 러시아, 한국이 모두 동참하기로 한 것도 심리적 압박이 됐을 것"이라며 "핵실험을 했으니 협상 테이블에서도 손해볼 게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베를린 회담처럼 미국이 양자대화를 수용하고 나오면 북한 입장에서 합의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며 미국 변화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변화도 한 요인으로 꼽았다.
김연철 교수는 "북한도 핵실험을 한 상황에서 여유가 생겼다고 판단해 초기단계이행조치에서 과감한 양보를 한 것 같다"며 "그렇지만 북한은 최종 핵폐기를 하는 데 있어서는 북미 관계정상화, 경수로 문제, 평화체제 문제의 진척 정도를 예민하게 보고 움직일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전문가는 "이미 핵무기를 갖게 됐으니 수명이 다 된 핵시설이야 돈만 주면 포기하겠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네오콘 불씨 다시 살아난다면
그러나 2005년 9.19공동성명 발표와 동시에 미국이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를 시작했듯 네오콘(신보수주의자)으로 대표되는 미국 내 강경파들이 이번 합의에 반발하고 나설 경우 또다시 교착에 빠질 우려도 있다.
중간선거 이후 부시 행정부 내 네오콘의 퇴조 현상이 뚜렷하지만 최근 이란 공격을 정당화하는 그들의 움직임으로 미루어 볼 때 강경몰이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네오콘의 대부인 존 볼턴 전 유엔 주재 미국대사가 12일 부시 대통령에게 6자회담 합의를 거부해야 한다고 공개 촉구한 것은 그런 시각을 뒷받침한다.
김근식 교수는 "부시 행정부가 적극적으로 모두 변한 게 아니라 중동 문제 때문에 네오콘들이 정신없는 상황에서 라이스 장관과 힐 차관보에게 맡기고 방관한 측면이 크다"며 돌발적으로 변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조성렬 실장은 "핵폐기 목표를 분리했고, 초기단계에서 핵시설 폐쇄까지 합의했으니 그런 성과를 가지고 강경파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반론을 폈다.
다른 전문가도 "강경파가 퇴조하고 라이스 장관이나 힐 차관보 같은 현실주의자가 부시 대통령에게 직보를 하는 등 인적인 변화로 뒷받침되고 있어 강경파들이 또 들고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김연철 교수는 네오콘의 반발 외에 다른 부분에서 난관이 조성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미국 내부의 복잡한 법과 절차, 부처간의 입장차, 부시 행정부의 의회에 대한 리더십 약화 등이 합의 이행을 더디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제네바합의가 파행을 겪었던 것은 보상조치에 대한 미국 내부의 공감대 형성이 어려웠고, 법제도적 절차도 보완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법률과 예산에서 대통령이 얼마나 리더십을 발휘할지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변수도 걸림돌 될 수
미국 못잖게 북한의 태도 역시 합의 진전을 가로막을 수 있다. 김근식 교수는 "북한의 요구조건이 과거보다 높이질 수 있다는 것도 문제"라며 "지금도 중유 50만톤 이상을 달라고 했는데 앞으로도 과거보다 더 많은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미가 베를린에서 대부분의 쟁점에 합의했는데도 불구하고 6자회담장에 와서는 문서 합의에 진통을 겪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여전히 남은 북미 상호 불신도 문제다.
또 13일의 합의로 5차 회의가 일단락되고 3월 19일 6차회의가 시작됐을 때 고농축 우라늄(HEU) 문제와 경수로 제공 논의 등이 곧바로 핵심 쟁점이 된다면 북미간의 본격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북미 관계는 아니지만 일본도 무시 못 할 변수가 될 수 있다. 대북 강경 드라이브에 비례해 정치적 지지도를 얻어 온 아베 신조 정부가 최근 추락한 지지율을 만회하고자 북일 관계정상화 워킹그룹에 응하지 않거나, 테이블에 마주앉아서도 심각한 갈등만 노정시킨다면 2.13합의 구도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