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벌 싸움 때문에…교수 몰아내자는 탄원서 대신 써주는 대학원생
도 씨는 대학원에 다닐 당시 매일 새벽 7시에 나가 밤 11시에 귀가했다.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보다 더욱 빠르고 늦은 '출퇴근'이었다. 수업 때문도 아니고 프로젝트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교수가 오기 전에 출근해야 하고 교수가 가기 전에는 절대 가면 안 된다"는 "관례"를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오래 교수실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묻자 도 씨는 "혹시 교수가 갑자기 은행에 볼일이 있다거나 병원 가야 할 수 있으니까"라고 설명했다. 온종일 명령을 기다리며 대기하는 도 씨에게 교수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동료인 A교수를 콕 집어 말하며 "A교수 때문에 힘들다", "그자가 학교를 망치려고 한다"는 식의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도 씨와 마주칠 때마다 A교수가 얼마나 사리사욕에 눈먼 사람인지 늘어놓던 교수는 급기야 도 씨가 조교의 권한을 이용해 A교수의 개인정보를 열람하도록 종용했다. 이후 도 씨는 교수가 원하는 대로 A교수의 퇴출을 요구하는 탄원서 작성을 주도했고 존경하는 교수를 위해 옳은 일을 한 줄만 알았다.
나 홀로 주모자로 몰렸는데…교수 "이 바닥 생리 모르나?"
그러나 이후에 상황이 바뀌었다. A교수를 비난하던 교수에게 화살이 돌아왔다. 그러자 교수는 눈물까지 흘리며 "다 도희진이 한 짓이다. 착하고 성실한 학생이라고만 믿었는데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도 씨가 왜 탄원서 작성을 주도했는지 뻔히 알고 심지어 옆에서 격려까지 하던 다른 학생들도 도 씨를 주모자로 지목했다.
"네가 날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런 것까지 다 이 바닥 생리인 걸 몰랐느냐"고 되레 큰소리치는 교수를 보며 도 씨는 조금이나마 남았던 미련도 털어버리고 자퇴했다. 도 씨는 학생이 교수의 손발이 되다시피 하며 궂은일을 하며 교수 간 세력싸움에까지 동원되는 이유가 "'라인' 때문"이라고 말했다.
도 씨는 음악계는 "선생님이나 학교에 따라서 자기 미래가 결정되는 정도"라며 "선생님이 힘이 있으면 심사하는데 관여를 해서 악단에 들어가게 해주지 않느냐. 또 콩쿠르에 참가할 때 심사위원들이 완벽히 공정할 거라고 기대하는 참가자는 없다"라고 말했다.
▲연구실 (위 사진은 본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연합뉴스 |
좁은 판 더욱 좁게 만드는 학계 시스템…"교수 눈치 보느라 논문 못 올려"
철학과 대학원생 박지효(가명·여) 씨는 학계의 시스템 자체가 "엉망"이라 교수 파벌 문제가 심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가뜩이나 좁은 바닥이 그 안에서 손꼽히는 몇 명에 의해서 돌아가는데다, 철학과 같은 소수 과는 그런 현상이 더욱 심하다"는 것.
박 씨는 대학원생에게 가장 중요한 활동인 논문 등재 자체가 학계에서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1년간 미국 내 각 대학 홈페이지를 돌아다니고 미국 학계의 시스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온 박 씨는 "SCI와 A&HCI는 열려있고 KCI는 닫혀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예술 및 인문과학논문 인용색인'이라 불리는 A&HCI는 예술과 인문학 영역의 논문을 종합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SCI는 과학기술분야의 논문을 관리한다. 한국의 KCI 역시 한국연구재단이 운영하는 논문 관리 시스템이다. KCI에서 '등재지' 혹은 '등재후보지'로 선정된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면 자동으로 KCI에 등록된다.
박 씨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저널에 글을 내는 것 자체가 그들만의 리그"라며 "학문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글을 써도 지도교수 눈치를 보느라 감히 저널에 실어보겠다고 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박 씨는 "요새 교수 임용 공고를 보면 자격요건에 SCI논문이나 A&HCI논문이 몇 개 이상 돼야 한다고 제시하는데, 데이터베이스를 찾아 보면 지금 교수 중 거기에 논문을 하나도 싣지 못한 교수도 있다"며 "지금의 시스템을 경험하지 못한 교수들이 이 시스템을 운영하는 탓에 공정하게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교수들의 '나만 가겠다'는 태도 바꿔야"
박 씨의 말대로라면 한국의 학계는 상하 수직 관계로 인간관계가 닫혀있을 뿐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경직돼 있다. 파벌의 수장 격인 교수로서는 닫혀 있는 집단을 굳이 열린 집단으로 변화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립대 교수로 재직 중인 강재환(가명·남) 교수 역시 박 씨의 지적에 대해 "그럴 수 있다"고 밝혔다. 박 씨는 "'내가 교수인데 내 밑에서 논문 쓰는 네가 감히 저널에 글을 내느냐' 이런 분위기가 있다"며 "(교수들이 이를)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유학했던 강 교수는 "외국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교수가) 학문을 함께한 동료로서 학생을 추천해주고 후원해준다"며 "우리가 교수 혼자만 가겠다는 태도라면 외국은 손잡고 같이 가자는 태도"라고 비교했다.
"교수의 자정능력과 사회적 감시가 모두 필요"
강 교수는 "대학을 비판하는 쪽으로 나간다면 실명을 밝히기가 꺼려진다"며 익명을 요구했다. 이렇듯 학생은 물론 교수 역시 학계에 만연한 파벌문화에 대해 쓴소리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회적 감시도 있어야 하지만 교수가 자정능력을 발휘하지 않는 이상 학계의 파벌문제를 완전히 뿌리 뽑기 어렵다고 강 교수는 말했다. 그는 결국 교수가 "개인에 대한 인권이나 인격이나 가치에 대해서 존중"해주고 "열린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교수가 학생을 자신과 동등한 연구 동반자로 보고 존중해준다면 학생이 교수의 몸종 노릇을 하는 방식으로 교수의 파벌 집단에 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
강 교수는 한국 대학원이 도제식 교육를 버리고 자신이 경험한 독일처럼 교수와 학생 간에 "수평 관계와 열린 자세"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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