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이 조사결과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설문조사에 응한 1352명 가운데 27.8%가 노동에 상응하는 적절한 보수를 받지 못했다고 답한 대목이다. 심지어 응답자의 10.5%는 교수 개인을 위한 연구비 유용을 지시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과도한 '업무'량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답한 학생도 32.5%에 달했다.
이런 응답 결과는 얼핏 보면 찌든 직장인의 삶을 연상시킨다. 과도한 업무량 때문에 삶이 피폐해지는, 그럼에도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하는 직장인. 실제로 상당수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자신을 '반(半)직장인, 반(半)학생'이라고 부른다. 자신이 속한 연구실의 지도교수가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수주해 온 연구과제(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 이들의 주요 일과이기 때문.
모 국립대 공과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 A씨는 "프로젝트 때문에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연구실에 마련된 간이침대에서 잠을 잔다"고 말했다. 그는 "새벽까지 컴퓨터에 데이터를 돌리고, 그 결과를 받아 적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라며 "짧은 수면을 취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다시 프로젝트를 하고, 틈나는 대로 내 논문을 쓴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그가 한 달에 받는 연구 인건비는 월 80만 원 정도. "뗄 거 떼면 한 65만 원 들어와요"라고 A씨는 덧붙였다.
'눈먼 돈' 연구비…교수가 학생인건비 중간에서 가로채기도
A씨가 말한 "뗄 거 떼고"가 의미하는 것은 뭘까. 이는 '연구실 공금 조성'이란 명분으로 교수가 떼어가는 자신의 인건비 일부를 말한다.
대학가에서 대학원생의 인건비 통장과 도장을 교수 또는 교수가 지정한 연구원 한 명이 통합 관리하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다. 어떤 경우는 아예 지급된 인건비 일부를 떼어 다른 통장에 이체토록 하는 경우도 있다. A씨는 "어느 연구실에서나 이렇게 (공동으로 인건비를 관리) 한다"며 "좀 억울하기도 하지만 그냥 관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규정 '위반'이다. 지난 7월 한국연구재단이 배포한 '국가연구개발사업 연구비 집행 및 정산' 교육 자료를 보면, 학생연구원의 개인통장 회수, 인건비 재분배 등 연구책임자 및 연구실 단위의 학생인건비 공동 관리는 규정 위반이라고 명시돼 있다. 이런 상황이 적발되면 연구비를 환수하거나 연구 참여를 제한하게 된다.
이에 대해 서울 소재 한 사립대 경제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 B씨는 "규정 위반일 줄은 전혀 몰랐다"며 "하지만 기자재나 비품을 연구실에서 공동으로 구입해야 하는 일이 많아 (공동 관리)는 어쩔 수 없는 일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관례로 치부하기에는 문제가 심각하다. 인건비 통장을 통합 관리함으로써 교수가 중간에서 인건비 일부를 가로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지난해 10월, 한 국립대 교수 C씨는 자신이 지도하고 있던 학생 7명의 인건비를 통합 관리토록 한 후, 2년에 걸쳐 그 중 일부를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 이렇게 그가 유용한 학생 인건비는 총 2065만 원. 7명의 학생이 각자 한 학기치 대학원 등록금을 통째로 자신의 지도교수에게 빼앗긴 셈이다.
대학원생들 "억울해도 참는 게 낫다"
그러나 학생들은 나서기를 꺼린다. 지도교수가 다음 학기 등록금을 갈취해가는 기막힌 상황을 그저 '눈뜬장님'처럼 지켜볼 따름이다.
우선 도제식으로 맺어진 교수-학생 관계가 학생들의 입을 막는다. 서울 소재 한 사립대에서 몇 년 전 박사과정을 마친 D씨는 "한번 교수의 눈 밖에 나면 논문통과, 유학, 졸업, 취업 모두가 줄줄이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며 "억울하더라도 참는 게 더 낫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성추행으로 고발됐던 교수도 피해자와 합의한 후 벌금 내고 멀쩡히 (대학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봤다"며 "피해 학생은 학교를 떠나야 했지만, 교수는 태연하게 다시 강단에 섰다"고 말했다. 용기를 내어 교수의 부당한 행위를 바깥에 알려봐야 손해 보는 사람은 결국 학생이란 얘기다.
대학원생 A씨는 "교수가 쫓겨나도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만약 내 지도교수가 부정행위를 저질러 해임된다면 연구실이 통째로 폐쇄될 수 있다"며 "내가 속한 연구실이 하는 연구는 국내 대학에서 잘 다루지 않는 주제인데 이곳이 폐쇄되면 갈 곳이 없다"고 말했다. 반 직장인 반 학생인 대학원생. 교수 해임은 A씨에게 곧 실업자 신세를 의미한다.
학문 발전 위해 모아준 세금, 교수 개인 주머니로…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구비 부당집행이 적발돼 연구비가 환수되는 사례는 증가 추세에 있다. 지난해 9월 한국연구재단이 국회에 제출한 '2006~2010년 한국연구재단 협약과제 연구비 환수현황'을 보면, 연구비 환수조치는 5년 사이 5배가 증가했다.
연도별 연구비 환수조치는 2006년 20건, 2008년 25건, 2010년 116건으로 증가했다. 더불어 연구비 환수 규모도 2006년 1억8000여만 원에서 2010년 4억1000여만 원으로 커졌다. 기관별로 보면, 서울대의 환수액이 5년간 33억3000여만 원으로 가장 많았고, 조치건수도 22건으로 최다였다. 한양대(2억2000만·7건), 성균관대(1억8000만·5건), 전북대(1억3000만·7건), 충남대(1억·5건)가 그 뒤를 이었다.
이 자료만 놓고 봐도 과학기술과 지식산업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대학가에 투여한 세금 약 40억 원이 엉뚱한 곳에 쓰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적발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실제 연구비 부당 집행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다.
▲ 2006~2010한국연구재단 협약과제 연구비 환수현황 |
최소 인건비 보장하겠다는 정부 대책에 학생들, "현실 모르고 하는 소리"
물론 정부에서도 상황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해 국내 주요 연구중심 6개 대학에서 정부연구과제에 참여한 이공계 대학원생 1만5000명을 상대로 인건비 지급 현황을 조사했다. 그 결과 석사 과정생은 월평균 68만 원, 박사 과정생은 월 평균 103만 원을 지급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정부가 고시한 학생인건비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지난 2008년 7월 대통령 소속 상설 행정위원회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고시한 학생인건비 계상기준에 따르면, 연구 참여율 100%를 기준으로 석사 월 180만 원, 박사 월 250만 원이 인건비 지급 기준선이다.
이에 따라 지난 19일 교과부는 내년부터 연구비 규모 1억 원 이상 과제에 참여하는 대학원생의 인건비 실지급액을 정부 고시 수준으로 보장하기 위한 제도 개선안을 내놓았다.
우선 과제별 연구협약을 체결할 때 연구 참여 학생에게 인건비 지급 기준을 안내하고, 기준치에 미달하여 인건비를 지급받을 경우 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신고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교과부의 계획이다. 위반 여부가 확인되면 교과부는 시정조치를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 한 대학 실험실 풍경. ⓒ연합뉴스 |
대학원생 A씨도 "월 80만원 보장이 물론 과거보다는 개선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80만 원을 6개월 꼬박 모아야 등록금이 마련되는 것"이라며 "반 직장인 반 학생으로 살며 인건비를 전부 등록금에 쏟아 붓는 상황이 계속되면 어떻게 버텨야 하냐"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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