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코델타아시아(BDA)를 통한 대북 금융제재가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을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가운데 터진 UNDP 자금 전용 의혹은 '제2의 BDA 사태'로 이어져 순풍을 탄 북핵 협상국면에 또 다른 암초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2005년 9.19 공동성명이 나온 직후 미국이 제기한 북한의 불법금융활동 의혹이 북핵문제 해결을 1년 이상 지체시켰던 것처럼 이번 의혹제기도 최근의 베를린 양자회담 등 북미간 모처럼만에 이루어진 해빙 무드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는 우려이다.
또 2002년 10월 켈리 특사의 '북한 우라늄농축' 의혹 제기, 2005년 9월 미 재무부의 '북한 불법금융활동' 의혹 제기, 그리고 이번의 '유엔자금 불법 전용' 의혹 제기 등 모두 북한의 대외관계가 호전되는 시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미국이 겉으로는 평화적 북핵문제 해결을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북한체제 붕괴를 계속 추구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아직까지 이 3가지 의혹에 대해 국제사회가 납득할 만한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북한의 부당한 요구를 수용했다"
UNDP 자금 전용 의혹은 마크 윌리스 유엔 주재 미국 차석대사가 지난 16일 애드 멜커트 UNDP 총재보에게 보낸 서신 내용을 19일 미국의 보수적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이 공개하면서 제기됐다.
윌리스 차석대사는 이 서신에서 "북한 정부의 시도와 UNDP의 협조로, 적어도 1998년부터 있었던 UNDP와 북한간 협력 프로그램이 북한 주민이 아닌 김정일 정권의 자금 조달 창구로 체계적으로 이용돼왔다"며 "유엔의 규정을 노골적으로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윌리스는 또 "(UNDP는) 북한 정부에 현금 및 다른 자원의 지속적인 공급처 역할을 하면서도 이 자금과 자원이 적법한 개발활동에 사용되도록 하는 아무런 보장장치도 없거나 명목상의 장치만 뒀다"며 즉각적인 외부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UNDP는 북한에서 식량 생산성 증대를 위한 농경지 복구, 둑 건설 등 농업 개발을 비롯한 에너지, 환경, 인적자원 개발, 지역간 협력, 경제개혁 지원 등 각종 사업을 해왔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설과 논평기사를 통해 UNDP가 북한에서 집행한 자금이 1998년 이후 최소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일각에서는 1억 달러가 넘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UNDP가 평양사무소의 임대와 직원 채용, 급료 및 식사비 지급, 사업비 집행과정 등에서 북한 정권의 부당한 요구를 수용했다면서 특히 상당액의 자금을 북한 정권에 현금으로 지급한 것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또 UNDP의 현지 직원 급여지급 방식은 개성공단 방식이며 특히 지원을 받는 북한이 UNDP에 사무실 임대료로 매년 200만 달러를 물리기도 했다고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로이터통신도 같은 날 기사에서 "북한 정부는 방문지 제한, 현금 지급 요구, 자신들이 지정해 채용한 직원들에 대한 현금 급료 지급 요구 등을 통해 UNDP의 규정에 도전해왔다"며 "유엔 감사관들의 모니터도 제한을 가해왔다"고 보도했다.
유엔, 조사 요청하면서도 "집행액은 적다" 해명
이같은 보도가 나오자 유엔은 19일 성명을 내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북한에서의 UNDP 사업을 포함해 유엔 자금으로 전세계에서 이뤄지는 모든 사업들에 대해 신속하고 광범위한 외부 조사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멜커트 UNDP 총재보도 반 총장을 만난 후 기자회견을 열어 오는 3월 1일부터 북한 정부와 현지 사업파트너·직원 등에 대한 현금지급과 북한 정부를 통한 현지 직원 채용을 중단할 것이며 대북 사업에 대한 외부 감사를 다음 주 집행이사회에서 제안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멜커트는 UNDP의 북한 현지 직원 채용 방식과 현금 지급 방식 등에 대한 미국의 비판에 대해 "역사적 맥락을 봐야 한다"며 "지난 20년간 각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UNDP의 활동이 이뤄져왔으며, 많은 나라들에서 그 사이에 변화가 있었으나 북한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세계식량계획(WFP) 등 다른 유엔 기구들도 북한에서는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해명했다.
그는 또 UNDP의 대북 지원금 규모는 "수억 달러가 아니라 지난 10년간 총 수천만 달러"라고 밝혔다. 이어 이 돈이 핵·미사일 등 무기개발에 전용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UNDP의 각국 활동 방식상 답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그러나) 내부 감사에서는 그 질문과 관계된 어떠한 징후도 없다"고 강조했다.
데이비드 모리슨 UNDP 대변인도 대북 지원 프로그램이 최근 수년간 축소돼 왔다며 2005~6년 예산으로 2220만 달러가 책정됐으나 실제 집행액은 539만 달러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한편 로이터통신은 오는 3월부터 북한에 대해 현금지급을 중단한다는 것은 완전 중단이 아니라 달러화 대신 북한 원화로 지급하겠다는 뜻이라며 원화 역시 달러화와의 환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니만큼 달러 유입은 여전히 계속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미 의회, 유엔 압박 예고
윌리스 유엔 주재 미국 차석대사가 UNDP로 서신을 보내고 19일 언론을 통해 공개한 것은 미국 의회의 요청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공화당 간사인 일리나 로스-레티넨 의원은 18일 청문회에서 북한이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대한 미 재무부의 조치로 타격을 받은 후 "보험청구 사기나 UNDP를 비롯한 유엔 기구들과 관계된 사기" 등을 통해 외화현금을 조달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로스-레티넨 의원은 유엔 기구들이 북한 정권을 위한 "현금 도랑"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며 "앞으로도 (미 하원) 국제관계위가 이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일 것을 기대한다"고 말하며 유엔에 대한 공개적인 압박을 천명했다.
그는 특히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의 모리스 스트롱 전 대북특사가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으로부터 100만 달러를 받고 유엔의 이라크 식량-석유 프로그램을 지원한 사실을 지적하며 반기문 총장의 대북 특사 지명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유니세프나 세계식량기구 사업에도 영향 미칠 듯"
미국이 UNDP 의혹을 제기하고 나선 것은 최근 열린 북미 베를린 회의가 북핵 폐기의 진전을 예고하고 있고 BDA에 묶인 북한 자금 중 합법적인 자금을 풀어주겠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의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미국 내 대북 강경파들이 BDA를 통한 북한 옥죄기가 한계를 드러내자 다른 자금줄을 차단함으로써 북핵 문제의 교착 혹은 북한의 굴복을 유도하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2005년 9.19공동성명이 채택되던 시점에서 미 재무부가 BDA를 '돈세탁우려대상'으로 지정해 금융제재라는 새로운 암초를 만들어냈던 것과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이 9.19공동성명 당시 이후에도 북핵 문제의 진전이 예상되는 시점에서 북한의 금융문제를 들고 나왔다는 점도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일례로 미 행정부의 불법 금융활동 단속 총괄 책임자인 스튜어트 레비 재무차관은 지난해 12월 6자회담 재개를 앞두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보다 더 강력한 금융제재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해 어렵사리 재개된 6자회담에 재를 뿌리려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었다.
당시 <파이낸셜타임스>도 12월 11일자 기사를 통해 BDA가 북한산 금괴를 매입해 유통시킨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해 BDA와 북한의 불법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었다.
이와 관련 피터 벡 국제위기감시기구 동북아사무소장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최근 베를린 북미 회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의 작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네오콘의 대부'인 존 볼턴이 최근까지 유엔 주재 미국 대표부의 책임자였다는 점, 미국 차석대사의 서한이 흘러들어간 신문은 네오콘들이 가장 선호하는 월스트리트저널이라는 점 등을 거론했다.
벡 소장은 "국제기구 활동을 하면서 북한과 사업을 하는 유엔 관리들을 수없이 만났는데 깨끗하고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한다"며 "대북 사업의 투명성 문제가 중요하긴 하지만 일부러 문제를 만든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북한에서 활동을 하려면 어차피 현금을 써야 하고 북한 사람들과 같이 일해야 한다"면서 "미국은 앞으로도 유니세프나 세계식량기구의 대북 사업에 대해 문제를 삼을 가능성이 높아 이번 일의 파장은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벡 소장의 우려대로 전문가들은 유엔의 다른 기구들의 대북 지원활동에 대한 파급력은 피할 수 없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로써 유엔 기구들을 통한 대북 현금 유입은 축소되거나 차단될 것이고, 이에 따른 북한의 반발도 예상돼 북핵 협상에까지도 파장이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과 국제기구 대북지원 현황 유엔개발계획(UNDP)은 개발도상국의 경제·사회적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유엔이 1965년 설립한 조직이다. 북한과는 1979년 정식협약을 체결해 유엔 기구 중 처음으로 1980년 평양에 사무소를 개설했다. 평양사무소에는 4명의 국제기구 직원과 20명의 현지 직원이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UNDP는 그동안 북한에서 식량 생산성 증대를 위한 농경지 복구, 둑 건설 등 농업 개발을 비롯한 에너지, 환경, 인적자원 개발, 지역간 협력, 경제개혁 지원 등 각종 분야의 사업을 해왔다. 북한의 두만강 유역을 동북아 물류·교통·관광의 중심지로 개발하기 위한 '두만강개발계획'(TRADP)도 1992년 UNDP의 후원 아래 북한, 한국, 러시아, 중국, 몽골 등 5개국이 함께 참여해 시작된 대표적인 지역협력 사업이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이 심각한 식량난에 직면해 국제사회에 구호를 요청한 이후에는 세계식량계획(WFP) 등 국제기구들도 인도적 지원에 나섰다.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은 UNDP와 WFP, 세계식량농업기구(FAO), 유엔아동기금(UNICEF) 등 대부분 유엔 기구간의 공동지원을 통해 이뤄졌다. 1995년 하반기부터 2002년까지 유엔 기구를 통해 이뤄진 대북 지원액은 12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UNDP를 통해 그동안 얼마 만큼의 자금이 북한에 지원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1999년의 경우를 보면 UNDP의 북한 예산은 29개 프로젝트에 2790만 달러로 나와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UNDP의 북한 지원 사업규모는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며, 특히 지난해 10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결의안이 나온 이후에는 활동이 더욱 위축되고 있다. 사업분야도 인도적 지원과, 공중보건, 환경·농업, 경제 분야 등으로 축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UNDP 등 유엔 기구가 북한을 지원하는 사업의 자금이나 식량을 비롯한 현물은 미국 등 세계 각국에서 거둔 것이어서 각국이 유엔 기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하는 셈이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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