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고 박종철 기념사업회 김학규 사무국장입니다. 김학규 사무국장은 1965년 충남 당진 출생으로.. 고 박종철 씨와 같은 대학 같은 학번으로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민주화운동을 벌였습니다. 이후 민주화운동 청년 연합 등에서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해왔고, 1996년 시민단체 '포럼 2001'의 대표를 역임했습니다. 97년 '6월항쟁 10주년 범국민사업 추진위원회' 사무국장을 시작으로 5년간 관련 사업을 진행했고.. 지금은 박종철 기념사업회 사무국장과 민주노동당 동작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14일이 박종철씨 20주기였는데요, 부산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추모행사가 열렸습니다. 사무국장님께선 어디 행사에 참여하셨습니까?
김학규 : 저는 두 행사 다 참여했구요, 우선 많은 분들이 관심 가져주시고 참석해 주셔서 고맙다는 말씀 드리고 싶구요. 부산에서는 13일에 종철이 모교였던 혜광고등학교에서 진행했습니다. 그때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던 분도 참석하셨고, 한 200여 명 참석해 주셨고. 서울에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진행했는데 선후배들도 많이 참석해 주셔서 한 300여 명 참여하면서 상당히 뜻깊게 진행됐습니다.
박인규 : 남영동 대공분실이 박종철씨가 목숨을 잃은 그 자리죠? 거기가 지금은 경찰인권보호센터로 바뀌었다고 해요?
김학규 : 예. 지금 조사기관이 전부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지금은 경찰인권보호센터가 들어서 있는데, 경찰은 이곳을 경찰인권센터 또는 경찰인권기념관으로 만들 계획인가 봅니다. 사실 저희들이, 정말 과거를 반성한다면 이 공간을 전부 시민들에게 내놔라, 우리 시민들이 가령 박종철 인권기념관 같은 걸 만들겠다고 제안했었는데 경찰측에서 수용하지 않았고. 지금은 종철이가 쓰러져 간 509호실을 원형보존하고 그 일부 공간이라도 좀 내놔라. 그 공간을 우리가 위탁운영하겠다. 그곳에 박종철 인권기념관을 만들겠다. 경찰과 이렇게 협의하고 있구요. 아직 완료되진 않았는데 2월 중에는 가닥이 잡힐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남영동 대공분실은 박종철씨가 목숨을 잃은 곳이기도 하고, 지금 여당 의장을 맡고 계신 김근태씨도 엄청난 고문을 당하신 곳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민주화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인권탄압의 현장 같은 곳인데 차제에 경찰이 협조를 해서 박종철 기념관이 들어설 수 있으면 좋겠네요.
김학규 : 고맙습니다.
박인규 : 김학규씨는 박종철씨하고 과는 다르시죠? 박종철씨가 어느 학과였죠?
김학규 : 종철이는 언어학과였고 저는 국사학과였습니다.
박인규 : 그 당시 86년 말은 그야말로 5공 말기고, 대단히 탄압이 심했던 때인데 혹시 박종철씨가 잡혀가고 목숨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입니까?
김학규 : 10월 말로 기억하는데요, 저와 종철이가 같이 의논해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만들어서 성남지역에 같이 배포하자. 이런 논의를 했었습니다. 당시에는 상당히 엄혹한 상황이어서 그런 일들이 사실 만만치 않았었는데, 종철이가 유인물 내용을 만들어서 그걸 청타지에 쳐서 가져오면 제가 그걸 등사기로 밀어서 유인물을 제작해서 동료들과 함께 배포하기로 했었는데요, 그때 마지막으로 종철이를 봤구요. 그때가 마지막이 될 줄은 사실 몰랐죠. 종철이가 청타지를 완성해서 제가 있던 국사학과 사무실로 가져왔었는데, 돌아가는 길에 제가 미처 말 못한 게 있어서 뒤따라가면서 불렀습니다. 그때 3층에서 2층으로 종철이가 내려가고 있었는데 계단 중간에서 나를 다시 돌아보면서 쳐다보던 그 눈빛이 지금도 선하구요. 그 순순하고 맑은 눈동자가 제게는 그 이후 제가 사회운동을 하면서 항상 제 가슴에 새겨놓고 있는 모습입니다.
박인규 : 다른 경험이긴 하지만 저도 20대에 친구를 교통사고로 잃은 적이 있는데, 지금도 기억에는 젊은 청년으로 남아 있더라구요. 10월 이후에 박종철씨가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김학규 : 제가 수배중이었기 때문에, 저는 당시에 화곡동 쪽에 자취방을 얻어놓고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학생운동을 어떻게 하면 다시 활성화시킬까를 동료들과 논의하고 있었고. 그러던 중 1월 15일로 기억되는데 그때 제가 한 석간신물을 사서 봤습니다. 거기에 사회면 단신으로 박종철이 수사받던 중 죽었다는 기사를 접했고. 처음에는 상당히 믿겨지지 않았고 너무 충격이 컸습니다. 사실 저도 수배중이었기 때문에 사실 저도 언제 어떻게 경찰에 연행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쭉 하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한 면에서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저한테 닥쳐왔고 또 한 면에서는 강한 분노가 동시에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박인규 : 그게 중앙일보였구요. 2판이라고 해서 그게 굉장히 조금 밖에 안 찍는 신문입니다. 사회면으로 2단으로 나갔는데 그 기사가 또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희대의 특종이 됐는데. 그 뒤의 전개과정....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박종철씨가 고문으로 우연히 죽은 게 아니라 조직적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는데 그걸 경찰에서 은폐했다가 드러나면서 6월항쟁이 된 거 아닙니까? 과정을 간단히 설명해 주시죠.
김학규 : 처음에는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돼 있지 않습니까? 사실 그 이전에도 그런 류의 의문사는 많이 있었고, 사실 그것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이 경우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용기있는 행동이 있었기 때문에 진실이 밝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검안했던 중앙대 오연상 교수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하고, 당시 그 현장에서 타일 바닥에 물 흔적이 흥건했다는 이야길 했었구요. 법의학자 황적준 교수의 역할도 상당히 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의 용기있는 행동이 없었다면 사실 진실이 밝혀지기 힘들었겠죠. 그래서 경찰이 물고문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됐는데, 또 경찰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지 않았던 게 나중에 밝혀지게 됩니다. 나중의 과정에서는 이부영 전 의원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감옥에 있었는데, 구속된 두 명의 수사관들이 불안하다 보니까 진실을 토로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받은 이부영 의원이 쪽지를 통해 외부로 몰래 전달했구요. 그것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으로 전달되면서 5월 18일에 김승훈 신부께서 미사과정에서 관련 경찰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또 한 번 충격으로 몰아넣었고 분노를 아주 크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또 4.13 호헌조치가 또 그 중간에 발표돼서 이것에 대한 분노까지 결합되면서 결국 6월 민주항쟁이라는 큰 물줄기로 표출됐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6월 민주화 항쟁이 됐고, 또 거기서 이한열 학생이 죽었고, 그러면서 6.29까지 갔는데... 참 많은 사람의 목숨을 바친 민주화였습니다. 문제는 말이죠, 관련 경찰이 두 명이 아니라 세 명 더 있다. 그래서 고문은폐조작 사건이 됐는데 지금 그것으로도 말하자면 책임자가 전부 가려진 건 아니다. 그 윗선이 있을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고 그래요?
김학규 :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희 박종철 기념사업회는 지난해 11월 말에 정부 산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추가적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제출한 상태입니다. 당시 은폐조작 관련해서는 경찰수준에서 이게 진행됐다. 그래서 다음해까지 해서 최종적으로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최종 책임을 지고 구속되고, 이런 과정이 있었는데, 이게 과연 경찰 수준에서만 일어났겠느냐. 이런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구요. 당시에 일반적으로 공안사건이 일어나면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열렸었고. 그리고 실제로 당시에도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열렸다는 게 사실로 확인되고 있고. 그래서 그 속에서 분명히 은폐 기도와 관련해서 서로 협의했을 것이고 거기서 지시가 이뤄지지 않았을까. 그런 부분이 있는 그대로 밝혀져야 한다. 나아가서는 청와대 개입여부도 밝혀져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관계기관대책회의를 했다는 기록 같은 게 있습니까?
김학규 : 그런 부분은 우리가 진상규명과정에서 찾아봐야 한다고 보는데요. 지금 20년이 지났기 때문에 정부자료 중에서 그런 게 있을까 이런 것도 밝혀야 할 문제긴 할 텐데, 정부자료라는 게 이런 관계기관대책회의 같은 건 세세하게 기록돼 있지 않을 것 같고, 다만 확인해 보고 그 결과라도 간단히 정리해 놓은 거라도 없을까 찾아봐야 할 게 있을 거구요.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런 기록이 잘 안 돼있다고 본다면 사실 당사자들의 진실고백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지금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나요?
김학규 : 현재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접수를 받아서 그걸 조사할지 말지를 심의하는 과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인규 : 몇 년 전인가요, 당시 사건을 조사했던 안상수 당시 서울지검 검사죠. 이분이 안검사의 일기라는 책을 통해서 당시에 지금 말씀하신 경찰선 이상의 고위층의 지시가 있었던 것 같다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그분의 책에서 밝혀진 것 이상으로 밝혀진 건 없습니까?
김학규 :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번에 추가적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낸 거구요. 현재까지는 더 이상 진척된 게 없는 거죠. 당시 자료를 보면 안상수 검사같은 경우도 2월 27일에 이미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을 접수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더 추가적인 조사를 하려고 할 때 외압에 의해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그만큼 관계기관대책회의의 위력이 컸다는 걸 역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비록 20년이 지났지만 관계기관대책회의 관계자들이 양심선언과 사죄를 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됩니다.
박인규 : 당시에는 은폐 조작이 드러났다고 했지만 사실은 반만 드러난 셈이군요. 무엇보다도, 젊디 젊은 아들을 잃으신 아버님이 어떠신가 궁금하기도 한데요. 최근 한 인터뷰를 봤더니 종철이 20주기가 되니까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만 18군데에서 왔고 실제로는 제대로 기념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불만이랄까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아버님 되시는 박정기씨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김학규 : 팔순이 되시다 보니까 더 애착이 많으신 것 같구요.
박인규 : 아들 생각이 더 나시는군요.
김학규 : 그렇죠. 특히 박종철 인권기념관 건립문제에 관심이 많으시구요. 사실 그동안 아버님 같은 경우 어떻게 보면 아들이 살아있었다면 아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오신 거죠 지금까지. 민주화운동 현장에 항상 현게셨고,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활동을 쭉 하시면서.. 당장 보면 14일 행사 끝난 바로 다음날 한미FTA 저지를 위한 민주노동당 의원단이 신라호텔 앞에서 지금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데 바로 다음날 거기에 격려방문을 해주시고, 이런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박인규 : 박종철씨의 죽음이 우리나라 민주화의 계기가 됐는데, 그 당시에는 민주화만 되면 모든 게 다 잘 될 것 같다.. 민주화에 모든 걸 걸었는데 요즘 와서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란 말도 나오고, 먹고 실기는 더 힘들어진 것 같다는 불만.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안 된 거 아니냐는 불만 불평의 말도 나오는데, 요즘의 민주화 어떻게 보십니까?
김학규 : 사실 6월 민주항쟁이 결정적 승리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민주화에 관한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졌는데, 전두환 정권이 6.29선언을 발표하면서 기만적으로 일부는 수용하고 일부는 회피한 셈이죠. 그런 점이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의 한계를 또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정치적 민주화는 상당히 진전됐다고 보구요. 그런데 특히 97년 IMF사태 이후에 빈부격차가 상당히 확대됐고 사회 양극화현상이 날로 심화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할 거냐. 그리고 이번에 부산에서 행사할 때 KTX여승무원지부에서 많이 참석하셨어요. 거기 지부장님께서 말씀하시면서 민주화가 됐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냐. 우리 비정규직 문제 너무 많이 양산되고 있고, 자신들의 문제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를 볼 때 과연 민주화가 됐다고 할 수 있느냐는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한 면은 맞는 말이고, 또 한 면에서는 우리같이 80년대 엄혹했던 상황을 경험했던 입장에서 보면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있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한데요. 지금 6월 민주화 항쟁의 정신, 그리고 박종철 열사의 죽음의 의미를 되새긴다고 한다면 실제로 정치적 민주화에 머무르지 말고 사회 경제적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야 되지 않을까.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결국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사회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돼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87년 대선 후에 한겨레신문을 창간하면서 '민주화는 한판 승부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 말도 했는데, 민주화라는 게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군요.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김학규씨나 고인이 된 박종철씨나 많은 유력정치인들, 이른바 386세대라고 해서 우리나라 민주화를 이끈 주력부대였고 현재는 집권세력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논란도 많고, 공과 과도 있고. 김학규씨는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고 계신데, 386의 일원으로서 자평한달까요? 386의 역할... 386도 워낙 다양해졌기 때문에 하나로 규정할 순 없겠지만 자평한다면 어떻습니까? 민주화 과정에서..
김학규 : 386이란 말이 고정화 돼있긴 한데, 이제는 486은 된 것 같습니다. 사회는 더 급속히 변하고 있는데 과연 386세대가 계속 자신의 역할을 잘하고 있느냐, 이런 의문은 많이 있는 것 같고. 사실 80년대 그 과정에서 386세대는 우리 사회 민주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대부분의 386세대들은 지금도 우리 사회가 왜곡되는 걸 방지하고 막는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욕을 먹고 있는 건, 사실 일부 사람들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80년대의 성과를 편협하게 그리고 왜곡되게 이용하는 거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 아니겠습니까. 대다수 386들은 지금도 우리 사회의 중추역할을 하고, 우리 사회의 오늘이 있기까지 크게 기여했듯이 앞으로도 지속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80년대 이후는 이른바 학생운동에서도 워낙 세대차이가 많이 나서 3년마다 혹은 1년마다 세대차이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90년대, 2000년대 들어서 요즘 젊은이들은 취업난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다 보니까 굉장히 보수화 되고 개인적인 일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고. 요즘 젊은이들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김학규 : 며칠 전에도 서울대 조국 교수를 만나서 그런 얘길 나눈 적이 있습니다. 80년대 대학생들은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걸 바쳐서 노력했는데, 지금 세대들은 시대적 상황이나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치열함이 부족한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좀 나눴는데, 이 사회가 너무 팍팍하기 때문에... 너무 어렵기 때문에 자신의 취업문제라든지 이런 게 너무나 절박하게 다가오고, 그러다 보니 취업준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기본적으로 좀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요, 우리 시대라는 것이 정말 어렵고 힘든데 대학생들이 우선 취업문제해결에 집중하는 건 불가피하다고 보지만, 우리 사회의 문제가 뭐냐, 근본적인 문제가 뭐냐.. 그리고 우리 사회 문제라는 게 개인적으로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지 않느냐. 이런 걸 구체적인 삶 속에서 깨달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구요.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지금 대학생들, 청소년 세대들도 새롭게 사회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역할을 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6월항쟁. 정확하게 6.10항쟁이라고도 하는데... 4.19나 5.18민주화항쟁과 좀 비견되는.. 상당히 중요한 사건인데, 국가적으로 좀 기념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몇몇 국회의원들께서 이 부분을 국가기념일로 정하자는 움직임이 있다고 해요.
김학규 : 예. 이번에 보니까 여야 국회의원 한 125명이 국가기념일 제정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발의했고 국회에서 결의문 채택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 같습니다. 보니까 국회에서 결의문을 채택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고 정부가 그걸 수용할 때 가능한 문제일 텐데요, 사실 국가기념일 제정요구는 10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6월항쟁 10주년 사업을 할 때부터 있었는데, 사실 6월 민주화 항쟁이라는 게 참석규모로 보나 전국적인 범위로 보나, 4.19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규모로 있었죠. 다만 항쟁과정에서 희생자가 적었다는 게 어떻게 보면 사람들의 관심, 의미가 약화되는 게 있다고 보는데 그건 역으로 보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면서도 그렇게 적은 희생을 통해서 그만한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하니까 더 긍정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구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사실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게 6월 민주화항쟁 아닙니까. 그래서 군사독재가 더 이상 우리 사회에 설 수 있는 근거가 없어졌고. 그런 점에서 본다면 4.19와 5.18 국가기념일 못지 않게 6월 10일도 기념일로 해서 전 국민들이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되새겨 보는 계기의 날로 만들어야 한다고 보구요. 지금은 어떻게 보면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으면 좋겠습니다.
박인규 : 20주년인 만큼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겠네요. 최근 일부에서는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를 비롯해서 많은 기념사업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물론 과거 중요했던 운동이나 사건들을 기념하는 건 중요하지만 예를 들면 사회 경제적 민주화 관련해서 실제로 민주화를 진척시키기 위해 뭔가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언제까지 기념만 하고 있을 거냐.. 이런 비판도 있는 것 같아요.
김학규 : 맞습니다. 사실 과거 우리의 성과라는 걸 기념한다는 것도.. 사실 단순히 추모하고 기념하는 문제가 아니고 그 속에서 오늘의 과제가 뭐냐. 살아있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를 되새길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보고. 그런 점에서 기념보다는 계승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상당히 일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라는 것도 20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한 번 되새겨 보고 새롭게 해석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기념만 할 게 아니라 계승까지 해야 된다. 마지막으로 박종철 기념사업회에서 꼭 해보고 싶은 계획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김학규 : 가까 말씀드린 박종철 인권기념관 건립문제가 당장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구요. 그것은 단순히 기념하려는 게 아니고,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상징적 장소에 박종철 인권기념관을 건립해서 자라나는 세대들이 유력한 견학코스로 민주주의를 생각하면서 현장학습을 하는 견학코스로 여기를 정착시켜보자.. 이런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박종철이 그동안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고 역할을 해왔는데 이제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또 다르게 기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구요. 또 다른 것은, 지금 박종철 평전이 청소년들 보기 쉽게 개정판 형식으로 나왔는데 이걸 영문판으로 만들어 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박종철의 죽음, 그리고 그에 따른 6월 민주화항쟁 과정이 단순히 우리 사회에서만 의미가 있었던 게 아니고 사실 아시아 전반의 민주화 과정에서도 상당히 의미있는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거구요. 그래서 아시아 민주화의 과정에서 또 많은 고문피해자들이 있고 지금도 사실 있는데, 박종철이라는 상징성을 살려서 아시아권의 고문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운동도 해보자.. 이런 고민도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과거의 민주화운동은 물론 제대로 기념해야겠지만 그건 단순한 훈장이 아니고 앞으로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거름이 돼야 한다. 김학규 사무국장께서도 민주화 계승을 위해 더 많은 노력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박종철씨 20주기를 맞아 박종철 기념사업회 김학규 사무국장과 말씀 나눠봤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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