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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앞둔 한국…'적극적 평화' 담론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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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앞둔 한국…'적극적 평화' 담론이 필요

한반도 브리핑 <36> 공포와 스트레스로서의 통일과 한미동맹

우리는 자고로 너무나 당연시 되어 온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과연 그렇게 당연한 것인지 의문을 던지는 훈련이 잘 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오래된 주입식 교육과 창의성을 억누르는 권위주의 문화가 작동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한 것에 의문을 던지는 이유는 당연하다는 상식이 특정 세력만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형성된 상식일지 모른다는 우려감과, 당연함 속에 매몰되어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미래의 충격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당연하지 않을 것 같은데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많은 것 중에 한반도의 미래와 관련한 두 가지가 바로 "통일"과 "한미동맹"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있듯이, 또 지난 수십 년 간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과 정권이 통일을 꿈꾸어 왔듯이, 통일은 좌우를 넘어서서 우리가 너무나도 절실히 바라고 성취하고 싶었던 꿈이요 희망이었다.

한미동맹 역시 지난 수십 년 간 대한민국을 전쟁과 가난의 불안에서 지켜 준 희망이었고,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는 매우 당연한 존재다. (물론 통일이라는 상식에 비해 한미동맹이라는 상식은 이념을 초월하여 전 국민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그런데 최근 이렇게 당연한 두 가지의 "희망"이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일종의 "공포"와 "짜증스러움"으로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통일은 소원도 꿈도 아닌 매우 불확실한 불안과 공포로 변환하고 있다. 한미동맹 역시 우리의 안전판과 희망에서 계속 이러저러한 것들을 요구하고, 조정하고, 야단맞고, "협박"에 시달리는 스트레스로서 변화하고 있다.

당장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너무나 좋고, 또 북한이라는 인구와 자원을 획득하게 되어 한국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많이 있다. 반면 당장 통일이 됐을 때 생겨날 다양한 경제적·사회적·정치적·문화적 혼란과 부담을 생각하면서 통일을 가능하면 뒤로 미뤄 보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다만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아직은 꺼려하고 있지만.
▲ 탈북자들의 입국 장면 ⓒ연합뉴스

막대한 통일비용과 통일 후 한반도 유지비용 때문에 생겨나는 엄청난 세금의 부담과 복지의 축소, 대규모의 북한 이탈주민 처리 문제, 고용불안에 더하여 장기적 경제침체의 가능성, 새로운 지역감정과 정치적 갈등구조의 탄생, 그리고 다양한 차별구조 등 무수한 문제들이 한반도를 억누를 개연성과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부담이 숫자로서 주어지지 않아도 생각만 하면 일단 몸과 마음이 매우 피곤하고 힘들어질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한미동맹 역시 미국이 과거 한국을 지켜주고 개발원조를 공여하던 자비로운 (혹은 그렇게 여겨졌던) 후원자에서 이제는 한국에게 이러저러한 요구를 하고, 미국의 정책에 따라오지 않으면 언제든지 동맹을 깰 수 있다는 으름장을 놓고, 한국이 아닌 미국의 안전과 번영만을 우선시 할 것 같은 매우 권위주의적 세력으로 변화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한국을 선의와 우호에 기초한 민주주의의 파트너로 여기기보다는 강압적으로 미국에 공조하게 만드는 일종의 "협박성 발언"을 하는 국가로 미국은 바뀌고 있다. 한국은 한미동맹과 관련해 언젠가 "버림받을 것"에 대한 공포, 권위주의적 명령과 태도에 대한 스트레스, 그리고 미국 때문에 불필요한 분쟁에 휘말릴 것에 대한 우려에 시달리고 있다.

과거에도 주한미군의 부분적 철수, 베트남 파병, 인권개선의 압박 등 비슷한 형태의 불안과 스트레스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러나 이제는 과거와 달리 두 개의 민주주의 국가 간에 '험악한'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의 불안은 그 성격을 달리한다.

민주주의 국가 간에는 타협과 설득의 문화를 통해 정책의 차이와 이해관계를 조정한다는 것이 미국 학계와 정부가 자랑스럽게 설파하는 "민주평화론"의 핵심 중의 하나인데, 한미 간에는 "싫으면 관두라"는 식의 험악한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 이른바 "깨는" 현실이 아닌가 싶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인 한미 간에는 일체화보다는 다양함이 일상이 될 터인데, 그래서 더욱 한미관계의 미래가 스트레스로 다가오고 있다.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란 무엇인가

그런데 통일문제와 한미관계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할, 그리고 앞으로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매우 중요한 사안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 두 사안이 공포이고 스트레스라 할지라도 이를 적절히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적확한 시각과 접근방안을 미래의 지도자들이 잘 확립해야 만 한다. 그리고 이제는 공포로서의 통일, 그리고 스트레스로서의 한미관계를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논의할 시점이 됐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통일과 한미동맹을 원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한반도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물론 민족주의적인 소망과 여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통일과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남북 대치상태와 전쟁의 위협과 불안에서 자유롭기 위해서가 최우선일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따져 보아야 할 것이 과연 통일과 한미동맹이 과연 지금도 우리가 원하는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하는 것인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원하는 평화"란 무엇인지이다. 지금까지 평화라 하면 전쟁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것만을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근대화·민주화가 상당히 달성된 상황에서 평화의 의미는 매우 다차원적이고 포괄적으로 재정의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근대화와 민주화를 국가의 주요의제로 생각해 지난 약 30~40년간을 투쟁해 올 때 우리가 바라던 가치는 "잘사는 것"과 "자유"였다. 그런데 성공적인 근대화와 민주화로 인해 이제 배고픔과 억압의 고통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자 최근에는 근대화와 민주화 이후에 "선진화"를 달성하자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선진화가 매우 매력적인 구호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근대화와 민주화라는 구호와 다른 것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잡히는 것이 없다는 게 문제다. 선진화가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신진화 담론은 잘사는 것과 자유와 같은 목표와 가치를 뚜렷이 가지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아직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화와 민주화 이후의 과제를 찾아야 한다면 (그것이 선진화라고 한다면)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달성한 번영과 자유가 누구에게서나 임의로 박탈당하지 않을 것, 그리고 그것을 국가가 지켜줄 것이라는 분명한 안심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것, 동시에 그러한 환경과 시스템을 국가와 사회가 같이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와 목표를 개념화한다면 과거의 소극적 의미의 평화가 아닌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가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최근 인구에 회자되는 "평화개혁세력"의 평화, 그리고 "평화체제"의 평화 등과는 그 의미가 매우 다르다. 왜냐하면 이들이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재발의 방지"라는 매우 군사적인, 그리고 국가가 민주화·근대화 이후 지향해야 할 목표와 가치라는 철학적 고민이 없이 논의되는 소극적 평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평화의 개념과 달리 국민 개개인이 번영과 자유 박탈의 공포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평화를 지칭하는 개념은 이미 유럽에서 논의된 '적극적 평화' 개념이다.

'적극적 평화' 개념이 나온 배경은 전쟁재발의 방지라는 기왕의 상식적 평화를 달성했다 하더라도 국민들이 가난, 차별, 소외, 억압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에 시달리게 된다면 이는 진정한 평화를 달성한 것이 아니며 이러한 폭력, 즉 구조적 폭력의 문제까지 해결해야만 선진적인 적극적 평화를 달성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방지와 정권유지를 위해 국가가 내부적으로 국민들을 억압한다면 이는 대단한 구조적 폭력이 아닐 수 없다. 유엔에서는 국가의 억압, 가난, 차별, 소외 등 다양한 구조적 폭력으로부터 개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안보(human security)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이러한 인간안보가 실현되면 적극적 평화가 달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방지'만으로는 '폭력의 구조화' 막기에 역부족

그렇다면 우리가 여태껏 원해 왔던 통일과 한미동맹이 소극적 의미의 평화 및 적극적 의미의 평화와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를 따져야 할 필요가 있다. 또 평화체제의 평화, 그리고 평화개혁세력의 평화가 의미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평화를 이야기 한다면 일반적으로 전쟁과 관련해서만 생각해 왔다. 물론 전쟁재발의 방지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목표다. 그러나 평화의 문제는 단순히 군사적인 전쟁을 막는 문제뿐만이 아니라 그 과정과 그 목표가 달성된 이후에 생겨나는 제반 폭력과 불안요인을 다루는 것까지 넓혀져야 진정한 선진적 의미의 평화가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또 전쟁재발의 방지는 군사적인 수단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요인까지 고려해 구조를 바꿀 수 있을 때 보다 확고해 질 수 있다. 이는 군사작전에만 치중했던 미국의 대테러전 실패 사례가 잘 보여준다.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평화의 문제도 군사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제반 요인을 고려해 접근해야만 진정한 의미의, 국민 개개인에게 직접 혜택이 가는 평화가 달성될 수 있다.

통일과 한미동맹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통일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원하는 때에 꼭 온다는 보장이 없다. 그렇지 않은 상황이 도래할 때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고려할 가치가 바로 단순히 전쟁 방지만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남북한 주민 모두에게 구조화되는 것이 원천봉쇄될 수 있는 적극적 평화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폭력과 공포는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통일 이후 북한 주민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 대규모 남한 이주를 막기 위한 폭력, 북한 경제 구조의 왜곡 및 계층화, 대규모 빈곤 및 소외계층의 발생, 환경파괴 등이 북한인들에게 생겨날 수 있는 구조적 폭력과 공포다.

동시에 남쪽에서는 경제적·복지적 부담의 장기화, 그에 따른 양극화의 구조화 및 실업문제의 장기화, 사회적 갈등, 심리적 공포와 문화적 불편함, 정치적 갈등과 폭력, 그리고 북한인들과의 빈번한 충돌 등이 예상된다.

이러한 일상적인 공포와 폭력은 얼핏 생각할 때 통일이라는 목표에 비해 사소한 문제로 보일지 모르지만 통일 이후 한반도에 구조화된다면 일상을 살아가는 개개인들에게 있어 대단한 고통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고통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고통을 강요하는 형태의 통일을 무리하게 추진한다면 "적극적 평화"라는 보다 상위의 선진적 가치를 저버리게 된다는 데 있다. 따라서 평화를 진정으로 고민하고 추구하는 지도자라면 전쟁재발의 방지와 국민 개개인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고통을 덜어주는 형태의 적극적 평화의 통일방안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통일의 방안은 통일로 이르는 로드맵과 시간표를 어떻게 짜고, 이를 위해 국내정치와 외교관계를 어떻게 조정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상당수 남한 국민들은 골칫거리인 북한을 통제하고 개혁해 점진적으로 통합하는 것을 원하지, 무리하게 갑자기 합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며, 더욱 확실한 것은 무리한 통일보다는 '조절된 통일'이 남북한 국민 모두에게 공히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일과 평화의 상관관계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논의하고 또 분석하기가 매우 불편한 주제이지만 우리에게는 당장 닥쳐올지 모르는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에 시급히 주류 담론세계로 올라와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소극적 평화' 개념에 의한 북핵 해결의 함정

한미동맹의 문제도 동맹이라는 개념자 체가 내포하고 있듯이 당연히 평화의 사안이다. 그런데 한미동맹 역시 군사적 개념의 평화라는 시각에서만 접근해 온 데에 문제가 있다.

현재 한미 간에 동맹과 관련한 불협화음이 노출되는 것도 군사적 개념의 평화를 강조하는 미국과, 보다 포괄적 의미의 평화를 강조하는 한국 간의 시각차가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미국은 탈냉전기의 동맹을 과거의 공산세력에 대한 방어와 억지의 역할에서 벗어나 '위험 지역'을 미국의 입맛에 맞는 시스템으로 변환(transformation)하는 도구로서 사용하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따라서 방어적이고 반응적 형태의 과거 동맹이 상당히 공격적이고 적극적 개입형태의 동맹으로 변화하고 있다.

동맹의 성격과 기능이 공격적이고 적극적 개입의 형태로 변화하게 되면 타깃이 되는 대상국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갈등의 이면에는 이러한 한미동맹의 성격변화를 요구하는 미국의 비전을 한국이 따라가지 않거나 못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그런데 보다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변환을 추구하는 동맹, 특히 군사적인 수단에 집중해 이러한 변환을 추구하는 동맹은 다양한 형태의 적극적 평화의 문제를 야기한다. 일단 파국을 변환한다는 목표는 전쟁재발의 위협을 영구히 제거하고자 새로운 시스템을 수립한다는 면에서 평화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그 수단과 과정이 오히려 전쟁방지라는 소극적 의미의 평화까지도 저해할 수 있다.(선제공격과 군사적 점령, 체제의 붕괴 등) 나아가 경제·사회적인 면에서는 변환의 대상국가의 국민과 그 주변 국가 국민의 적극적 의미의 평화마저도 저해할 수 있다.
▲ 지난해 12월 28일 경기도 동두천시 주한미군 캠프 케이시에서 열린 '2006 한미 친선 송년음악회' 장면 ⓒ연합뉴스

북핵문제를 처리하는 전략을 예로 보자. 강한 군사적·경제적 압박을 통한 북핵 제거와 북한체제의 변환을 추구하는 미국의 전략은 한국도 동맹으로서 동일한 형태의 전략을 추구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는 김정일 정권의 보다 강경한 군사적 대응뿐만 아니라 강한 주민통제, 경제 자원의 군사자원으로의 전환을 통한 주민의 고통 가중, 지속되는 경제난, 인권침해, 사회적 불안 등을 낳게 되며, 북한이 붕괴로 이른다면 대단한 혼란과 불확실성을 야기하게 된다.

남한에서도 전쟁의 불안, 경제적 공포, 정치·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게 된다. 미국의 동맹전략은 불행하게도 평화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오히려 소극적 평화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포괄적 평화마저도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국민의 상당수가 한때 북한보다 미국을 더욱 위협적으로 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공산권이라는 대규모의 위협이 사라진 탈냉전기의 동맹은 당연히 과거의 방어적 형태의 동맹과는 성격을 달리할 것이다. 동맹의 존재 이유를 다른 데서 찾아야 하며 그 기능도 바뀌어야 한다. 한국은 아직도 남북간의 대치상태 때문에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해 새로운 동맹변환의 비전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빨리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것을 한국에게 요구하고 있고, 한국은 새로운 비전 없이 우왕좌왕하니 서로 불협화음이 자꾸 생겨난다.

미래에도 한미동맹을 유지하려면 동맹의 성격이 단순히 방어적이고 반응적인 성격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보다 적극적이고 개입적인 형태의 동맹비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때 한국은 세계의 보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 그리고 한국 국민의 적극적 평화를 위해 한미동맹의 목표와 한국의 역할을 적극적 평화에 두어야 하며 미국에도 그러한 비전을 분명히 인지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이제 세계 11~12위권의 강국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책무가 무거워 지고 있다. 따라서 언제까지나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세계화를 지향하는 국가이므로 세계화에 걸 맞는 정신구조와 가치를 추구하기도 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진정한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길이 무엇이며, 한미동맹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어떠한 비전을 구축해야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한국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알려드립니다

프레시안 한반도브리핑을 사랑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프레시안은 2007년에도 보다 알찬 한반도브리핑을 만들기 위해 필진을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새로 참여하는 전문가들은 서재정 미국 코넬대 정치학과 교수,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정창현 현대사연구소장,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입니다. 이를 통해 한반도브리핑은 동북아 정세 일반과 군사·안보 문제, 북중관계, 북한정치 등에서 보다 다양한 각도의 분석과 해법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기존의 필자 중에서는 서동만 상지대 교수, 김근식 경남대 교수,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임원혁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객원연구원이 앞으로도 계속 활약할 것입니다. 박순성 동국대 교수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한반도브리핑 집필진에서 당분간 빠지기로 했음을 아울러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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