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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유출 문화재 실태 파악이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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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유출 문화재 실태 파악이 중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1/08] 문화재 외길 30년 박상국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38선, 사오정, 오륙도….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언제 그만둬야 할지 모르는 게 요즘의 직장생활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는 일 말고 또 다른 어떤 일에 한 발을 담가둬야 마음이 놓일 것만 같은데요.

이런 안타까운 현실과는 달리 문화재청과 문화재연구소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지난 30년간 문화재 전문가의 외길을 걸어오다 정년을 맞은 분이 있습니다.

바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불교서지학자이자 국립문화재연구소 전 예능 민속연구실장인 박상국 선생이 그 주인공인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박상국씨를 초대해서.. 문화재와 함께 한 지난 30년간의 공직생활을 되돌아보고, 우리 문화재 관리의 현 주소와 해외유출 문화재의 반환 문제 등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문화재 전문가 박상국씨입니다.

박상국씨는 1947년 대구 출생으로 동국대 불교학과를 나와 1976년 당시 문화재 관리국 전문요원으로 공직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1980년 최연소 문화재전문위원이 돼 문화재 지정조사에 참여했고 94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장으로 활동을 해오다가 지난 연말 정년을 맞았습니다. 또, 국내에서 손꼽히는 불교서지학자 가운데 한분이며 현재 문화재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30년간 문화재 전문가의 외길을 걸어오시다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시게 돼서 만감이 교차하실 것 같은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박상국 : 사실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데서, 섭섭하시죠.. 시원섭섭하시죠.. 하는 인사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 감정은 시원섭섭하다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전혀 시원하지도 않고, 섭섭한 마음은 더욱더 들지 않았습니다. 한 달 전쯤에는 그런 감도 있었지만 막상 퇴임한다고 어느 정도 정리를 하고 난 뒤에는 그런 마음 없이 아주 담담하게 정년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박인규 : 지난 연말에 퇴임하시고 1주일이 지났는데, 매일 직장에 출근하다가 집에 있게 되면 굉장히 허전하고 답답함을 느끼신다고 하는데 어떠세요?

박상국 : 저도 그런 생각을 하긴 해봤습니다만, 저 스스로는 며칠 동안 아주 편하게 아무런 다른 감정 없이 낮잠도 자고 하루에 13시간도 자보고, 보통 하루에 네 시간 다섯 시간 정도 평균수면을 취했습니다만, 자유로움을 아주 만끽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정년퇴임 하시면서 직원들에게 굉장히 긴 글을 남기셨어요. 서문을 보면,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미당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인용하셨는데 그동안 30년간을 회고하신 건가요?

박상국 : 종무식 하기 전날, 지난 목요일입니다. 직원들과 저녁을 먹고 다시 사무실에 들어왔습니다. 이때까지 인사도 못 하다가 그날 사무실에 있는 책을 한 250박스 이사를 늦게까지 하고, 늦은 저녁을 먹고 들어와 보니까 텅 빈 서가 하며.. 혼자 사무실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퇴임의 변이랄까, 우리 직원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 남기고 떠나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그때부터 뭔가 내 자신을 정리해볼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얼핏 떠오르는 것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를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런 국화 옆에서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세 번째 연의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 이 연이 와닿는 것이, 젊은 시절에 문화재관리국에 들어와서 30년이 흐른 지금 내 모습이 바로, 국화꽃에 비유한 내 누님이라는 것과 아주 흡사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박인규 : 요즘은 직장을 자주 옮겨야 유능하다고 하지만 사실 예전에는 대학 졸업하고 이력서에 어디 입사, 그리고 어디 퇴사가 제대로 한 직장생활이란 말을 했는데 문화재 관리국이 첫 직장이셨죠? 원래 처음 사회에 나오시면서 문화재 쪽 일을 하시겠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박상국 : 저는 제가 전혀 공직생활을 할 줄 몰랐습니다. 대학에서 전공한 것이 불교학인데 그 중에서 한국불교사상사 쪽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원 논문을 쓰다가 보조국사 지눌의 선사상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요, 보조국사책을 조선조 후기의 대학자인 연담 유일이란 분이 사기를 다룬 게 있습니다. 그 사기를 꼭 인용해야 되겠는데 책을 찾을 수가 없어서 선배들 원로교수님들에게 여쭤봐도 다들 그 책은 없을 거다. 그래서 기록에 나오는데 왜 책에 없느냐. 아마 필사본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게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필사본은 봐도 읽기가 참 힘들다. 필사본이라도 구해봐야겠다고 해서 각 도서관을 다 뒤졌는데 결국 동국대학교 도서관에서 다른 책의 뒤에 끼워져 있는 걸 제가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목록을 할 때도 전체를 다 훑어보지 않고 앞의 타이틀만 갖고 목록을 한 것이 됐죠.

박인규 : 말하자면 문화재 하나는 찾아내신 거군요

박상국 : 예. 그래서 그 책을 찾아내고 나서 하도 기뻐서 선배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아주 자네가 열심히 하니까, 부처님의 가칠 입었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불교학부라는 학술지에 부록으로 싣자고 이야기하시고 해서 거기에 대해서 간단히 30매 정도 내용 개요를 쓰라고 하셔서, 그걸 썼더니 학교신문에 발표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학교신문에서 그걸 1면 톱으로 게재하게 되고 그게 동아일보에서 받아써서 기사가 났습니다. 그걸 어떤 선임이 보시고 해남 대흥사의 판목이 있다고, 그걸 찍어낸 원판이 있다. 그래서 그 당시 제 심정은 아주 큰 충격이었습니다. 불교사상사를 한다고 하면서 어떤 자료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런 기초자료조차 아직 정리 안 된 현실에서 사상누각을 지을 수 없다. 그래서 제가 기초자료를 정리해야겠다고 원력을 세웠습니다. 그런 차에 마침 문화재 관리국에서 사찰조사 하는데 필요한 요원을 뽑는다고 해서 제가 들어가게 됐죠. 그게 1976년 1월이었습니다. 논문을 끝내고 바로 입사하게 됐습니다.

박인규 : 약력을 보니 80년도에 최연소 문화재전문인이 되셨는데 이것도 새로운 뭔가를 발굴하신 게 인정돼서라던데 어떤 것이었습니까?

박상국 : 76년도에 들어가서 사찰 동산문화재 등록조사요원으로 참여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77년도에 보물582호인 월인석보판목실태조사를 하게 됐습니다. 실태조사를 하고 법당 뒤에 가니까 그것과 비슷한 판들이 여러 장 보였습니다.

박인규 : 야외에..

박상국 : 아니요. 법당 뒤쪽 편에.. 그래서 그걸 발견하고 난 뒤에 지정문화재를 조사할 때 이게 왜 누출됐을까. 왜 누락됐을까 했더니 판심재목이 있고 없고의 차이로. 판심제가 없는 것은 15장을 빼놨더라구요.

박인규 : 판심제라는 게 뭡니까?

박상국 : 판 제목입니다. 책을 낼 때 순찰을 위에서... 요즘은 페이지를 적는데 그것과 마찬가지로 제목을 붙여 놓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옛날 판본도 그런 체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장본일 경우 양쪽을 접으면 가장자리에 보입니다. 그것을 판의 가장 중심자리에 제목을 적고 그걸 반을 접습니다. 그걸 판심재라고 하는데, 그래서 일단 15장을 다시 발견하고 거기에 대해서 제가 문화재지에 논문을 하나 발표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돼서 전국 사찰에 있는 경판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게 됐고, 그걸 계기로 해서 전국 사찰의 경판조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박인규 : 약간 기초적인 질문이 될 수 있지만 문화재청, 문화재 관리연구소가 하는 일을 간단히 설명하면 어떤 일입니까?

박상국 : 문화재청에서 하는 일은, 문화재를 보존, 관리, 보급, 전승하는 역할입니다. 그 중에서 문화재를 보존, 관리, 보급, 전승하기 위해서 문화재에 대해 알아야 됩니다. 소위 말해 문화재의 성격을 제대로 규명해야 되고 가치연구가 끝난 다음이라야지, 가치연구가 문화재 보존관리의 하나의 선행조건입니다. 그래서 문화재 연구소는 문화재의 조사연구를 담당하는 연구소입니다.

박인규 : 몇 년 전 인터넷 신문에서 읽었던 기사가 생각나는데요, 우리나라 국보 1호가 남대문이고 보물1호는 동대문인데 어떤 사람들은 그건 일본사람들이 지정해 놓은 거다. 남대문 같은 경우는 임진왜란 때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나왔기 때문에 1호로 했다. 따라서 전부 번호를 다 우리 식으로 바꿔야 된다는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맞는 얘깁니까?

박상국 : 아니죠. 물론 일본사람들이 남대문이나 동대문이나 중요문화재로 일제 때 지정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해방되고 난 뒤에 1961년도에 문화재 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우리가 다시 그걸 문화재위원회에서 다시 국보와 보물로 나눠서 지정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남대문이 서울의 관문이니까.. 그래서 남대문을 국보로 하고 국보로 지정할 만한 대상을 전부 추리고 난 뒤에 나머지를 보물로 지정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편의상 1호 2호로 나누게 되고. 이런 번호는 하나의 관리번호지 전혀 지정가치에 의한 번호가 아닙니다.

박인규 : 일부에서는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도 있고 반가사유상도 있고, 오래되고 훌륭한 게 많은데 어떻게 남대문이 1호가 되느냐 하는데 그런 가치와는 무관하다...

박상국 : 전혀 무관하고 관리번호일 뿐입니다. 현재는 보물이 한 2000번 정도 나가고 있는데 계속 이어지는 거죠.

박인규 : 관리의 편의를 위한 것이지 랭킹과는 관계없다. 만 30년 동안 문화재 전문가로 활동해 오셨는데 우선 그동안 문화재연구소, 문화재청에서 일하시면서 본인이 그런 말씀 뭐하시겠지만 가장 기여한 게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박상국 : 우선 학문적으로는 전국 사찰에 소장된 경판을 전부 조사했고, 전국 사찰의 목판집을 간행했습니다. 그리고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80년도에 부임하면서부터 국가의 국보, 보물 지정조사업무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지정한 숫자가 500여 건 이상 됩니다. 주말 없는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물론 국가에서 지정신청이 오면 제 분야에 대해서는 제가 조사해서 보고서를 쓰고 그 보고서를 가지고 문화재 위원회에서 발표합니다. 그러면 문화재 위원회에서 위원들이 결정하거든요. 그런 역할을 했고. 또 그동안 고려대장경에 대해서 일본사람들이 쓴 논문을 그대로 우리가 교과서나 논문에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고려대장경에 대해서 제가 처음으로 간행기록을 전부 조사해서 연도별 분류를 해보니까, 과거 16년 동안 간행했다고 하면서 1236년에서 1251년 사이에 간행했다고 보는 게 정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조사해 보니까 1237년에서 1248년까지 12년동안 간행했습니다. 그러면 12년이란 시간은 판각하는 시간이고 전체는 16년, 준비기간부터 시작해서 16년이 걸렸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기록에도 그리 나와 있고. 그런데 여태까지처럼 36년이 아니라 훨씬 전에, 4년 전에 시작한 게 아닌가. 1232년부터 1248년에 모든 역사를 마쳤다. 왜냐, 1248년에는 겨우 두 권 세 권짜리 대장목록만 간행했습니다. 그리고 1247년까지 모든 경판을 간행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간행기록을 갖고 이때까지 일한 두 장이 나왔는가를 역추적해 보니까 간행장소도 강화 선운사가 아니고 남해였다 하는.. 장소도 바꾸게 되고 연계해서

박인규 : 고려대장경이라는 게 팔만대장경이죠? 팔만대장경의 제작경위와 정확한 연도를 규명하셨다. 잘 알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우리사회에 문화재 관련된 현안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해볼까 합니다.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 예를 들면 프랑스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라든가, 그걸 모두 우리나라로 갖고 와야 된다는 주장이 사회 일각에서 있는데요, 제가 알기로는 박상국 선생님은 문화재 실태조사를 오래 해오신 분이고, 그렇지만 반환운동이 현실적이냐는 논지를 펴신 걸로 아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박상국 : 저 역시 해외에 유출된 문화재를 반환받았으면 하는 생각은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현실적으로 해외에 유출된 문화재를 받아야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받을 문화재가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실태조사도 전혀 하지 않았고. 그래서 국민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듯한, 국민감정을 오도하는 발언들은 하지 않아야 되겠다는 차원에서 주장했구요. 그리고 해외에 유출된 문화재 반환대상.. 법적으로도 완벽한 반환대상은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만은 기록과 모든 상황이 반환받을 수 있는 대상입니다. 약탈이기 때문에. 그 외에는 뚜렷한 자료가 없습니다.

박인규 : 박선생님 말씀은 오히려 반환운동 이전에 실태조사가 중요하다.

박상국 : 네. 그래서 외규장각 도서 반환도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성과 없이 끌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국민들이 에너지를 너무 소모할 필요 없다는 주장입니다.

박인규 : 해외에 유출된 문화제 실태조사는 제대로 되고 있습니까?

박상국 : 제가 1990년부터 해외문화재, 그 중에도 전적조사를 필두로 해외조사 여비를 90년대에 처음으로 예산을 확보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국가예산이라는 게, 조사를 원활히 할 수 있는 예산이 못 됐습니다. 이삼백만원.. 한 일주일 출장경비 밖에 안 됐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20~30% 내에서 책정돼야 되고 예산확보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장관에게 말씀드려서 문예진흥기금을 2500만원씩 한 15년 정도 받았습니다.

박인규 : 별로 많은 액수는 아니네요.

박상국 : 예. 그런데 그 당시에는 한 달에 세 명 정도가 조사할 수 있는 여비였습니다. 그걸 가지고 우리 전적을 집중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곳을 위주로 조사할 수 있었습니다.

박인규 : 지금까지 한 10년 이상 조사하신 결과를 보면 대략 지금까지 드러난 것을 봐서는 해외유출문화재의 실태가 어떻습니까?

박상국 : 전적조사를 한 결과 국내에 없는 희귀자료들이 해외에 더 많습니다. 소위 말해서 조선전기 활자본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산질로, 흩어져서 전질을 갖춘 것이 참 드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일본 같은 데가 많습니다만, 온전하게 100권씩 한 질이 온전하게 돼 있는 것도 그대로... 갑진자니 갑인자로 찍은 책들이.. 우리는 그런 희귀한 활자본으로 찍은 책들은 그저 전질 중에 낱권으로 한두 개 씩인데 일본에 있는 책들은 온전하게 질을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이 참 부러웠습니다.

박인규 : 외규장각 도서는 굉장히 언론에 나오지만 그런 부분은 거의 언론에서는 못 본 것 같아요.

박상국 : 예. 그런 것을 일일이 이야기하고 보도자료를 내면 오히려 조사에 역효과가 우려되고 그래서 그냥 조사해서 목록으로 발간해서 각 도서관에 보내고. 그리고 그동안 조사했던 목록을 문화재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박인규 : 지금 민속예능연구실장에서 은퇴하셨지만 문화재 전문가로서는 계속 활동하시는 거죠?

박상국 : 제가 할 수 있는 힘이 되는 한 계속 해오던 일은 할 겁니다.

박인규 : 제가 알기로 문화재 연구소가 경복궁 안에 있다가 3년 전에 대덕연구단지로 옮겼다고 들었어요. 같은 연구소지만 그곳은 과학기술 하는 덴데 어떻게 해서 가게 됐습니까?

박상국 : 문화재청 입장에서는 문화재 연구소가 가까이 같이 돼 있는 곳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박인규 : 별로 효율적인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일단 공식적으로 공직은 은퇴하셨지만 앞으로 문화재 전문가로 활동을 하신다면 올해 계획 같은 게 있으시면 마지막으로 말씀해 주시죠.

박상국 : 제가 그동안 쭉 해왔던 불교서지분야의 책을, 금년에 '한국불교서지연구'라는 책을 한 권 간행할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저는...미국의 유명한 장군이 퇴역하면서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는 말을 했지만, 나는 아직 노병은 아닌 것 같고 사라질 준비도 전혀 안 됐고 그동안 밀려있는 숙제가 하도 많아서. 원고빚도 많고, 그래서 앞으로 본격적으로 제가 그동안 수집한 자료, 또 봐왔던 것, 모든 것을 정리해서 후배들에게 전승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30년간 쌓아오신 문화재 관련 노하우들을 많이 전수하시고 확산시켜서 문화재 관리, 해외유출문화재 실태조사 같은 것들이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지난 30년동안 문화재 전문가로 활동해 온 국립문화재연구소 전 예능 민속연구실장 박상국씨와 함께 했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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