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특히 이란의 팽창을 저지하고 중동 내 공산주의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이라크에 각종 군사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의 중동 전문기자 로버트 피스크는 "1991년 걸프전쟁 직전까지 미국 군수지원의 전말을 알고 있는 후세인이 영면(永眠)함으로써 이 은밀한 거래가 세간에 알려질까 초조해 했던 워싱턴 인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다"며 후세인의 집권에서부터 시작된 미국과의 은밀한 거래를 재조명했다.
피스크는 특히 미국은 후세인 정권이 테러 조직을 비호했고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사실은 80년대부터 후세인 정권의 화학-생물학 무기 보유를 지원해 온 장본인이 미국이며 이라크가 미사일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에도 미국의 원조가 상당부분 기여했다고 꼬집었다.
다음은 후세인이 교수형을 당한 이튿날인 31일자 <인디펜던트>에 실린 기사의 전문이다.
<사담 후세인, 공모자들과 함께 영면>
우리가 그의 입을 막았다. 어제(30일) 바그다드의 사형 집행관이 후세인 목에 달린 끈을 조이는 순간 워싱턴의 비밀은 안전해졌다. 이로써 10년이 넘도록 미국과 영국이 은밀하게 후세인 정권을 군사적으로 지원해 왔던 사실은 그저 '터무니없는 이야기(terrible story)'로 남게 됐다. 물론 미국의 대통령들과 영국의 총리들도 이 이야기가 잊혀지기를 원했을 터이다. 그렇게 후세인은 자신이 갖은 악독한 독재를 저지를 수 있도록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을 꾸준히 후원해 준 서방세계의 이면을 모두 비밀로 안은 채 죽고 말았다.
이라크 내 공산당을 해체할 목적으로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원했던 후세인이 죽었다. 후세인이 권력을 잡자 미국의 정보기관은 그의 부하들에게 바그다드를 비롯한 이라크 전역에 살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소를 넘겨줬다. 소련의 영향력이 이라크에 미치는 것을 방해할 요량이었다. 후세인의 무하바라트(혁명세력을 감시하는 이라크 정보국) 요원들은 주소에 적힌 집들을 일일이 찾아가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고 그의 가족들을 학살했다. 많은 일반인들이 반역을 공모했다는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 갇혀 극단의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후세인이 1980년 이란을 침공하기 전 미국 고위관료들을 접촉한 사실은 아랍세계에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다. 미국 정부와 후세인은 모두 이라크의 군대가 이란을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래서 펜타곤은 이라크에 군장비를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987년의 한 추운 겨울날 나는 쾰른에서 한 독일인 무기상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미국의 요구를 받고 워싱턴과 바그다드 간 연결선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라크와 이란 간의 전쟁이 막 시작됐던 1980년 9월, 나는 펜타곤으로부터 초대를 받았습니다. 거기서 이란 군의 최전선이 표시돼 있는 최신판 위성사진을 전달받았지요. 그 사진에선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바단(이라크 국경과 인접한 유전도시)이나 호람샤르(이란 3대 도시 중 하나) 내 포의 위치라든지, 쿠란강 동쪽 편을 따라 이어진 참호의 위치, 수 천 개 방벽까지 그 어떤 군대도 이보다 더 자세히 적의 정보를 갖고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나는 이 지도를 들고 워싱턴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건너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바그다드로 갔습니다. 지도를 받아 든 이라크 인들이 얼마나 고마워했던지…."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할 때 나는 후세인의 특공대원들과 함께 있었다. 바스라 국경을 지키고 있던 이란의 방벽은 이라크 탱크군단에 금세 뚫려 일주일 만에 쿠란 강 쪽 진로를 내주고 말았다. 당시 탱크군단의 지휘관은 어떻게 이란의 수비가 허술한 곳을 쉽게 알아냈느냐는 내 질문을 유쾌하게 무시했었다. 2년 후 우리가 암만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장군이 돼 있었다. 워싱턴이 제공한 정보로 공로를 인정받아 안락하게 승진을 한 셈이다.
이란 측의 공식기록은 사담 후세인이 1981년 1월 13일 처음으로 화학무기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AP>통신의 바그다드 특파원이었던 모하메드 살람은 바스라 지역에서 이라크 군대가 승리를 거뒀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걷고 또 걸어도 사막뿐인 땅에서 우리는 숫자를 세었다. 700까지 세면 머리가 멍해져서 처음부터 다시 세야 했다. 이라크는 그때 처음으로 신경가스와 겨자가스를 혼합해 사용했다. 신경가스는 그들(이란 군인들)의 온 몸을 마비시켰고 겨자가스는 폐에 물이 차도록 했다. 그래서 그들은 피를 토했다."
이란은 사담이 이 '가스 칵테일'을 미국으로부터 받아왔다고 주장했다. 물론 미국은 그 사실을 부인했지만 이란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
"쿠르드인 5000명 죽인 독가스, 사실은 미국의 원조"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담이 죽음으로써 이라크 독재에 공조해 온 미국과 이라크 간의 긴 밀월관계는 비밀로 남게 된 것이다.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은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이런 작업을 하는 데 대표 교섭창구로 이용했던 인사기도 하다. 그래도 1985년 작성된 '미국의 이중용도 생화학 무기의 이라크 수출과 걸프전 결과에 미친 영향'에 관한 비공개 보고서는 미국계 회사들이 정부의 승인을 받아 이라크에 탄저균과 대장균을 포함한 다량의 병원체를 선적해 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상원의 보고서도 "미국은 이라크 정부가 화학적, 생물학적 무기뿐 아니라 미사일 시스템까지 개발할 수 있을 정도의 이중용도 물품을 지원해 왔다"고 밝혔다.
펜타곤에서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의 범위를 몰랐던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1988년 사담은 미국의 국방정보국 요원인 릭 프랑코나 중령이 이란으로부터 탈환한 파오 반도를 방문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프랑코나 중령은 이란 군의 배치나 전술 전략, 피해 정도 등에 관한 정보를 빼내 이라크 군에 전달한 60여 명의 미군 관료 중 한 사람이었다. 이라크 방문 후 워싱턴으로 돌아 온 프랑코나 중령은 이라크가 승리한 데에는 화학무기의 공이 컸다고 보고했다. 그의 보고를 받은 워터 랑 대령은 "이라크가 전쟁 중에 가스를 사용한 것이 전략상 문제 될 것은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나는 그 결과물을 봤다. 전장에서부터 테헤란으로 돌아온 긴 환자수송 열차에서는 수백 명의 이란 병사들이 피를 토하고 폐에 찬 점액을 뱉어 냈다. 기차 안에는 악취가 너무 심해서 창문을 열어야만 했고 병사들의 팔과 얼굴은 종기로 뒤덮여 있었다. 나중에는 그 종기에 기포가 생기더니 불에 덴 듯한 상처가 남았다.
1988년 할라뱌에서 쿠르드인 5000명을 죽인 독가스가 바로 이 가스였다. 사담이 이란에 맞서기 위한 전쟁에서뿐 아니라 이라크 내 반대 종족을 학살하기 위해서도 이 가스를 사용한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미국이 이라크에 얼마나 많은 지원을 해 왔는가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사담이 죽었으니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지 모른다. 일단 초반에 요르단이나 쿠웨이트에서 미국의 무기를 구매한 양은 얼추 3억 달러 수준이다. 그리고 1987년까지 사담은 약 10억 불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로부터 사담이 쿠웨이트를 침공하기 전인 1990년까지 미국과 이라크 간의 교역량은 매년 35억 불까지 치솟았다. 타리크 아지즈 이라크 외무장관은 미국의 계속된 지원을 압박했고 제임스 베이커 당시 국무장관은 10억 불짜리 새 보증서를 발급하기도 했다.
1989년에는 은밀하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던 영국도 사담에게 2억5000만 파운드 가량의 보증서를 발급했다. 파자드 바조프트가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직후였는데 바조프트는 미국에서 보내 온 화학물질을 사용한 힐라 지역의 한 공장을 조사했다는 혐의로 교수형을 당했다. 바조프트가 체포된 지 한 달 만에 윌리엄 월드그레이브 당시 외무장관은 "우리가 외교적 수완만 잘 발휘한다면 영국이 이보다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 또 있었을까. 바조프트가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고 말했다.
이보다 더 경멸스러운 경우는 제프리 하우 부총리가 영국 무기의 이라크 수출에 대한 통제를 무력하게 한 일이다. 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있다. "쿠르드인들을 가혹하게 다룬 문제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자마자 무기 수출에 대해서는 좀더 유연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담은 1987년 5월 17일 돌연 이라크 제트기가 미국 항공모함을 공격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터이다. 미국은 이란 선박을 공격하려던 것이었다는 사담의 설명은 물론이고 당시 공격을 맡았던 이라크인 조종사에 대한 탐문수사에 대한 거부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진실은 사담 후세인과 함께 바그다드에 잠들었다. 워싱턴과 런던의 많은 이들은 사담이 영원토록 진실을 지키게 된 데 대해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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