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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이니스, 디지털 성 앞에서 외치다

[김운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15>

제 7 장. 예언자 이니스, 디지털 성 앞에서 외치다

□ 나비의 꿈


서기 2084년,

작은 도시에서 건축 일을 하는 퀘이드(Douglas Quaid)는 로리(Lori)라는 미모의 아내와 행복하게 살아가지만 밤마다 이상한 꿈을 꿉니다. 당시 지구의 식민지였던 화성에서 이름도 알 수 없는 갈색머리의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꿈인데 실제로 퀘이드는 화성(Mars)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화성을 구하는 꿈을 꿉니다.

어느 날 퀘이드는 가상현실 휴가 회사인 리콜(Recall)이라는 여행사를 찾아가는데 이 여행사는 기계를 이용하여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녀온 것처럼 뇌 속에 기억을 이식시켜줌으로써 여행했던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 주는 곳입니다. 퀘이드는 저렴한 가격으로 기계에 앉아 가상 화성여행을 하기 위해 가상기억을 주입받는데 그 기억을 주입하는 과정에서 그만 과거 실제로 화성에서 있었던 자신의 일들을 기억해내고 맙니다.

퀘이드는 원래 화성 총독인 코하겐(Vilos Cohaagen)의 오른 팔인 하우저(Hause)라는 사람이었는데, 코하겐이 지구의 혼란을 이용하여 독재하려고 하자 이에 반기를 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코하겐은 하우저의 뇌에서 화성에서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지구의 어느 신도시의 퀘이드라는 인간의 기억을 이식시키고 자신이 로리라는 여인과 결혼한 기억도 함께 이식하여 지구에서 살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불안하여 자신의 부하들로 하여금 하우저를 감시하게 하는데 그 감시인들이 바로 지구의 아내인 로리, 직장의 사장 해리와 그의 부하들이었습니다. 퀘이드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놀랍게도 자신의 아내였던 로리가 그를 죽이려합니다. 퀘이드는 코하겐 부하들의 추격을 받으며 간신히 화성으로 가 꿈에서 만나던 갈색머리의 진짜 아내 멜리나(Melina)를 만납니다. 퀘이드는 멜리나와 함께 코하겐의 비행들을 밝히기 위해 적진에 침투하여 이들을 제압하고 화성은 다시 평화를 찾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끝 대목에서 퀘이드는 또한 "이것도 또한 꿈은 아닐까"라고 말합니다. 지금 그가 경험한 모든 것이 리콜사가 자기에게 주입한 가짜 여행기억이 아니었을까하는 의미겠지요.


▲ 폴 버호벤 감독(왼쪽은 아내)과 샤론스톤 ⓒ위키피디아

이 이야기는 폴 버호벤(Paul Verhoeven) 감독의 유명한 영화 <토탈 리콜(Total Recall, 1990)>입니다. 원래는 필립 딕(Philip K. Dick)의 단편소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We Can Remember It for You Wholesale, 1966)>를 원작으로 하였습니다. 원작의 내용이나 영화의 줄거리보다도 이 영화 자체는 가까운 미래에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창문이 전부 벽걸이 TV나 미디어 화면으로 되어서 다양한 영상을 볼 수 있고 가상여행에 대해서도 상당한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개인의 정체성(personal identity)과 인식(recognition), 기억(memory), 실제(reality)와 조작(manipulation) 등의 문제들은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당면할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이 실제 현실인지, 아니면 제3자에 의해 조작된 가상의 세계인지에 대해 끝없는 의문을 던집니다.

마치 장자(莊子)의 호접몽(蝴蝶夢)을 보는 듯합니다.

" 언젠가 나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꽃 사이를 훨훨 즐겁게 날아다니면서도
나비가 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문득 깨어나 보니 틀림없는 내가 아닌가.
도대체 내가 꿈에 나비가 되었을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내가 된 것일까? "

("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莊子』內篇 齊物論)

(1) 경기변동과 패러다임

자본주의가 그대로 있진 않다는 것을 자본주의 속에서 살다보면 모두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자본주의는 불변하는 요소들을 많이도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사회적인 변동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마도 경기 변동 때문일 것입니다. 경제가 불황에 접어들면 경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경기변동이란 경기가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면서 순환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경기변동은 크게 세 가지로 보기도 합니다. 첫째 기술혁신에 따라서 50년을 주기로 나타나는 콘드라티에프 파동(장기변동), 둘째 기업설비투자 변동에 따라서 나타나는 10~12년 주기로 나타나는 쥐글라르 파동(중기변동), 셋째 이자율, 원자재가격변동으로 3~4년을 주기로 나타나는 키친파동 등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국가 또는 세계의 경기가 변동하고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을 경기변동 이론이라고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같은 변화들에 의해서 패러다임은 손상되어 새로운 형태로 변모해가기도 합니다.

1862년 프랑스의 클레망 쥐글라르(Clement Juglar)는 당시의 각종 경제변수들을 분석하여 평균 6년에서 10년에 걸친 일정한 주기를 갖고 호황 ·침체 ·회복의 3단계로 구성되는 경기변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 후 1923년 조지프 키친(Joseph Kitchen)은 영국과 미국의 경제변수들을 연구, 분석하여 경기변동은 일반적으로 장단기 파동으로 구분되며, 단기파동은 평균 40개월 정도의 주기를 갖고, 장기파동은 3개 정도의 단기파동으로 형성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가운데서 40개월의 단기파동을 키친파동이라고 합니다. 1925년 니콜라이 콘드라티예프(Nikolai Kondratiev)는 18세기 말부터 1920년까지의 영국, 프랑스, 미국의 경제변수들을 분석하여 약 50년을 주기로 하는 장기파동이 같은 기간 안에 2개 반이 있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니콜라이 콘드라티예프(Nikolai Kondratiev, 1892∼1938)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는 3개의 키친파동은 하나의 쥐글라르 파동을 형성하고, 다시 6개의 쥐글라르 파동은 하나의 콘드라티예프파동을 형성한다고 하여 이전의 단기 중기 장기에 이르는 파동들의 관계를 보여주었습니다. 각 파동들의 원인으로는 키친파동은 재고의 축적에, 쥬글러 파동은 기술혁신에, 콘드라티예프파동은 철도 ·전기 등과 같은 대발명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슘페터뿐만 아니라 여러 학자들의 견해들 예를 들면, 전쟁(S.C.Wantrup)이나 금의 생산(Karl Gustav Cassel), 17~18년 주기의 건축 순환설(A.Hansen), 태양흑점설(William Stanley Jevons), 강우주기설(Henry Ludwell Moore), 과소비설(J.A. Hobson 및 P.M Sweezy), 과잉투자설 등이 있습니다.

이후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경기변동을 불완전고용, 저축과 투자 등의 요소를 통해 체계적으로 분석합니다. 사무엘슨(P.A.Samuelson), 힉스(J.R.Hicks)는 한계소비성향(限界消費性向·marginal propensity to consume)을 중심으로 칼레키(M.Kalecki), 칼도어(N.Kaldor)는 케인즈나 사무엘슨 등의 이론들을 바탕으로 소비함수와 투자함수에 시차(time-lag)를 결합합니다.

그러나 경기변동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의 접근은 분석적이지 못하고 다소 이데올로기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그런데 현대에 나타나는 경기변동은 국제금융제도의 불안정성에도 큰 원인이 있습니다. 케인즈 이론의 권고에 따라 재정을 과도하게 팽창시키면서도 고정 환율 제도를 유지한다거나 환율제도의 변동에 따른 환투기(換投機·exchange speculation)로 인하여 외환위기가 발생하여 산업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투자 수익률이 클 것을 기대하여 과잉투자를 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패러다임의 변화는 단순히 경기 변동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요. 아무래도 큰 변화가 일어나는 콘트라티에프 파동(Kondratiev wave)을 좀 봐야할 것 같군요. 어쩌면 패러다임의 변화는 장기 변동 속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즉 경기의 장기적인 변동이 바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작은 변화들이 물리적으로 축적이 되면 보다 큰 화학적 변화가 나타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슘페터는 콘드라티에프(Kondratiev)의 장기 파동의 원인을 기술혁신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첫 번째 파도(1780~1842)는 산업혁명, 두 번째 파도(1843~1897)는 철도의 등장, 세 번째 파도(1898~1930)는 전기 및 자동차의 출현 등으로 인하여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 산업 혁명의 당시 제임스 와트와 증기기관 설계도
자동차가 발명될 당시만 해도 마차산업이 몰락할 것으로 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마차는 아무 곳이나 다닐 수 있는데 반하여 자동차는 도로를 닦아야 하는데 그 비용은 당시로 보면 천문학적이지요. 철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로서는 선로를 최고의 제철 기술로 만든 비싼 철로 만든다는 것을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빈민 구제 사업이나 하기를 바랐겠지요. 일부에서는 네 번째 파도를 194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는 기간으로 보고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전자·제약·항공기·석유 등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다섯 번째의 파도로 IT BT 산업·나노(Nano) 기술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치 철도혁명, 자동차 혁명의 시대에 철로와 도로를 만들 듯이 지금 우리는 인터넷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 구축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철도나 자동차가 등장하였다고 자본주의 패러다임 그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신경제(New economy)라는 말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면 IT 시대 즉 우리가 보고 있는 '디지털 시대도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패러다임이 변화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습니다.

우리의 의문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 동안 상업자본주의 - 독점자본주의 - 수정자본주의 등의 자본주의의 발달사를 돌이켜 보면 수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만 실제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변화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과연 과거의 철도나 자동차와 같은 수준의 변화만이 예상될 뿐인가 하는 점이 주요한 연구의 대상인 것이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지금의 변화는 이전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 사회의 변동 (농경에서 산업사회까지)

그리고 단순히 마치 미국이 자국 내의 경제문제를 해외에서 전쟁을 통해서 해소한다는 식으로 어떤 기술혁명이 생명을 다하면 또 다른 기술혁명으로 자본주의는 돌파구를 마련해왔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IT나 인터넷 혁명은 어떤 의도된 변화의 과정이었다기보다는 여러 가지의 기술변화들이 집약되어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을 출현시킨 것은 여러 기술적인 천재들의 두뇌의 집합체이지 자본을 매개로 형성된 자본주의의 지속적 발전과는 무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발명들의 경제성을 꼼꼼히 체크하는 자본가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디지털 시대는 그것으로만 해석하기 힘든 요소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부분들을 하나씩 밝혀 나갈 것입니다.

(2) 예언자 이니스(Innis), 디지털 성 앞에 외치다

다니엘 벨(Daniel Bell) 이전에 이미 정보(information)와 관련한 주요 이론가로 헤롤드 이니스(Harold Adams Innis, 1894∼1952)가 있습니다. 이니스는 캐나다의 대표적인 정치경제학자로 정보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이니스는 난해하기로 이름난 글들을 발표하여 그의 이론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예리하면서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상가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저작들은 문명발전과 문화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즉 문명의 진화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지식(Knowledge) 혹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것입니다.


▲ 젊은 날의 이니스와 노년의 이니스 ⓒ위키피디아

이니스는 어떤 사회가 다른 단계로 발전하는데 중요한 키(key)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같은 생산이나 소유관계의 변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커뮤니케이션 양식의 변화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서유럽 문명의 변화를 보면, 사회는 특정 커뮤니케이션 매체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으며,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핵심은 과거처럼 특정기술이 아니라 '정보이론'이라고 이니스는 지적합니다. 이 같은 이니스의 주장은 당시로 보면 상당히 생소한 내용이었고 이해하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니스는 기술(Technology)이 사회에 또는 사회가 기술에 일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즉 사회의 시간(time)과 공간(space)을 매개로 기술과 사회가 변증법적으로 변한다고 하였습니다. 좀 더 전문적이고 어려운 말로 해설을 해드리자면, 사회와 기술은 인간을 주체로 하여 시간과 공간이 상호작용하면서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적으로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이니스는 하나의 문명이 그 문명 내에서 존재하는 정보나 지식을 유지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과 역량(capacity)을 가지고 있다면 기존의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지만, 감당할 수 없는 과중한 지식과 정보가 나타나면 문명(Civilization)은 붕괴한다는 것입니다.(1) 이 분석은 오늘날 사정과 비교해 보면,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정보통신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인터넷 혁명, 그리고 이 와중에서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위기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인데, 제가 보기에 이것은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 일어나는 변화를 단순히 '자본주의 4.0'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려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 미국과 유럽의 경제위기는 더욱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니스는 하나의 문명의 흥망은 미디어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 매체를 통해 재편된 지식의 독점(monopoly of knowledge)에 따른 결과라는 것입니다.(2) 난해한 얘기지만 무서운 얘기기도 합니다. 가령 인터넷(Internet)이나 소셜네트워크(SNS) 등의 새로운 미디어가 나타났다면 이것을 누가 장악하는가 또는 그 주체가 사회수호 세력인지 사회전복 세력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지를 알 수가 있죠. 실제로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인터넷을 장악한 세력들이 큰 힘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이니스는 커뮤니케이션 미디어(media)를 시간바인딩(time-binding)과 공간바인딩(space-binding)의 형태로 나누고 시간바인딩은 진흙이나 석판 등이며, 공간바인딩은 수명이 짧은(ephemeral)것으로 라디오(radio), 텔레비전, 신문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석판 즉 돌(stone)이 등장합니다. 이니스는 한 사회가 석판(stone tablet)과 같이 무겁고 지속성이 있는 미디어를 사용하면 먼 거리를 갈 수 없기 때문에 작고 분산된 형태를 띠게 될 것이고, 이와 반대로 가벼운 미디어를 사용하는 사회는 상당한 크기의 영역을 통제할 수가 있어 대규모의 중앙집권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3)

이니스는 고대 제국의 흥망을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를 추적함으로써 관찰하여 번성기의 미디어와 몰락을 재촉하는 미디어를 관찰하였습니다. 그는 항상 지식과 권력의 상호작용(interplay between knowledge and power)이 제국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crucial factor)라고 보았습니다.(4) 그는 그리스 문명은 말과 글의 커뮤니케이션의 균형에 의해 번영하였다고 합니다. 즉 플라톤 시대에는 구어(口語 - 시간편향 : 말은 공간적 이동이 어려움)와 문어(文語 - 공간편향 : 글은 공간적 이동이 광범위함)의 균형이 고대 그리스의 번영을 가져왔지만 구어가 문어에 밀려 결국 제국의 횃불이 로마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5) 현대의 서유럽 문명은 "문화 활동에 항구성을 지닌 요소들을 조직적이고 잔인하게 파괴하고 오로지 현재에만 신들린 듯 집착하는" 강력하고 광고적인 미디어에 의해 위기에 처해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6)


▲ 그리스의 신전(신성)과 로마의 원형경기장(실용성)

이 부분은 해설이 필요합니다. 가령 돌과 같이 지속성을 가진 미디어를 사용하는 문명은 그들의 힘을 주로 시간(time) 즉 인간의 영속성(eternity)을 추구하는 종교적 문화를 형성하는데 사용하지만, 반면 이집트의 파피루스(Papyrus)같은 싸고 가벼운 미디어를 사용하는 문명은 통치 체제나 철학 등의 광범위한 부분의 공간(space)적 관심을 확장시킬 수가 있다는 것이죠.


▲ 파피루스로 작성된 문서와 진흙에 새겨진 슈메르의 쇄기형 문자

현대의 유럽문명은 대중 신문과 같은 강력한 커뮤니케이션의 발전이 시간(time), 지식(knowledge), 지속성(continuity) 등을 넘어서 공간(space)과 권력(power)에 집착하여 이동했기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미디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나 미래에 대한 관심(concerns)들을 아예 지워버리고 현재만 집착하는 심리(present-mindedness)에 현혹되게 만들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즉 현대의 대부분의 정보 주요 주체인 미디어들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불가결한 문화 활동의 요소들을 잔인하게 파괴하면서 오직 정보 전달의 공간적 확장성에만 집착한다는 것입니다.(7)

예를 들면, 초기 정착기 미국의 경우 각종 자연재해와 인디언의 습격, 부족한 식량,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 등의 생존의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철학이나 형이상학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직 현실적인 상황만을 분석하여 정보를 생산하고 공간적으로 확대하여 전달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에도 미국이 현상 위주의 학문적 전통을 가지게 된 것이죠. 학문은 철학적 형이상학적 기반을 무시하면,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패러다임도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려는 것이 아니라 마취제를 놓듯이 임기응변식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지요. 물론 때로는 그것이 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지나친 현실 집착성은 미래의 파국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도 그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작은 모순이 쌓여서 나중에는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작은 잘못들이 쌓여서 큰 재앙이 온다(積不善之家必有餘殃)"라는 <주역(周易)>의 말과도 상통합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적 종적(역사적, 전통적) 구조와 단절된 횡적 확장은 결국 큰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 미국 초기의 정착자들 [로버트 와이어 그림(Robert W. Weir, 1844)]

실제로 현대 사회는 항상 불안합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말년에는 항상 인기가 바닥입니다. 이것은 이니스의 지적과 같이 대중들이나 각종 정보 매체들이 현재만 집착하는 심리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 이것을 언론 미디어들이 부채질합니다. 그래야만 먹고 사는 것이 언론입니다. 현대의 언론이라는 것이 철저히 기득권 유지에 봉사한 댓가를 가지거나 아니면 가장 현실적인 이슈만 골라서 대중에게 팔아야 하는 환경입니다. 결국 정보전달의 시간성, 역사성을 가지면서 진정으로 인간의 미래를 고민하는 언론이 있다한들 그것을 봐줄 독자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경제적 지원을 해줄만한 기업도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사회가 합리적으로 발전해갈 수 없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다른 각도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대 사회에서는 제대로 된 경제정책을 시행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경제정책은 그 효과가 나타나려고 하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 대부분인데, 현실 정치가들은 일단 권력을 잡아야 하니 당장에 효과가 있는 정책을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현대 사회는 각종 포퓰리스트(Populist)들의 세상이 되고 중우정치(衆愚政治, Ochlocracy)가 되는 것입니다. 이니스가 말하는 식으로 한다면, 공간적(횡적) 커뮤니케이션이 과도하게 발달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부분을 좀 어려운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봅시다. 어느 시대나 대다수 국민들은 불가피하게 현재(present) 시간선호도(time preference)가 높고 일부 부유층들은 미래(future) 시간선호도가 높습니다. 쉽게 말하면, 부자들은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자산의 보호를 위해 미래의 변화를 예상하면서 현재의 자산관리를 하는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당장 먹고 살 일이 바쁘니까 무조건 지금 당장 내게 유리한 자산 관리 또는 경제 정책을 지지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국가가 아무리 가난한 대다수 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시행한다 해도 허점이 있게 마련이고, 우수한 정보력과 각종 인적·사회적 네트워크를 가진 부유한 기득권 세력들은 이내 이 정책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형태로 바꿔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 국민들을 위한다는 정책이 시간이 조금 흐르면 오히려 부자들을 위한 정책이 되어버려 이내 정책을 바꾸는 것이 일상사(日常事)가 되어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부자들이 정보 채널(information channel)에서 훨씬 우위에 있기 때문에 어떤 정책을 사용하든지 기득권 세력들은 유리한 고지를 이내 점령하기 때문이죠.

나아가 현대 사회의 부정적 측면은 교언영색(巧言令色)과 감언요설(甘言妖說)에 능한 포퓰리스트(Populist)의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이 세계경제 체제 자체가 위기에 빠져있는데도 "우리는 허리를 졸라매고 이 난관을 극복해가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대통령 후보나 정치가가 있으면, 그는 정권을 잡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저 "저는 현재 경제 위기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저만 믿으세요."라고 해야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별달리 해결책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 경제 같은 거대한 경제도 하루아침에 주저앉을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실제로 세계경제가 위기에 빠져있으니 한국과 같이 무역(trade)을 해서 먹고 사는 나라에서 좋아질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당장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눈에 보이고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빚으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라 한국의 수출은 감소할 것이고 경제성장도 기대할 바가 없는데 정치가라는 자들은 '돈 벌 궁리'는 하지 않고, 온통 '돈 쓸 궁리'만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경제(Economy)는 간단합니다. 상품을 생산하고 그것을 팔아서 수익을 남기고 그 수익 가운데 다음해 필요한 부분을 감가상각(減價償却)을 하고 앞으로의 투자를 위한 저축과 연구개발비(R&D)는 따로 떼어서 미래를 대비하고 난 후 남은 돈을 써야하는 것이 철칙입니다. 다만 전체 세계경제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시아는 비교적 나은 편이니 상대적 이익이 나타날 수도 있고 이것을 찾아서 공략하는 전략들을 연구해야하는데, 정치가들은 나라가 돈을 제대로 잘 벌지도 못할 것이 뻔한데도 각종 복지공약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저는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저 전면적 '무상의료'와 같은 최악의 사탕발림 정책만은 실시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시 이니스로 돌아갑시다.

이니스는 '편향(bias)'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개념을 사용했는데 이 말은 미디어가 가진 매체적인 특성으로 그 사회 구성원들이 특성 시점에서 많은 네트워크(network)를 형성하게 되는 형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현재의 트위터(Twitter)나 SNS 같은 것도 편향을 가진 것이죠.

이니스는 한 사회가 지배적인 편향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 단순한 기술적인 측면보다도 그 기술과 그 사회의 '인간'이 변증법의 주체로서 하는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즉 이니스는 사회가 기술 결정론적으로 변화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인간이 그 기술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사회변화를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사회의 미디어(media)가 그 사회의 관심을 특정한 사안에 대해 몰아가는 역할을 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또 그것이 이 미디어가 가진 역량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그 정보(information)들을 지식(Knowledge)으로 신속히 전환시켜 그 사안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편향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죠. 여기에는 그 미디어를 담당하는 주체와 사회구성의 주체들이 상호 변증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죠.(8)

결국 이니스는 기술과 인간의 변증법적인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미디어가 한 사회 또는 문명의 패러다임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아는 패러다임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들 미디어가 편향적으로 확산시킨 것이라고 봐야겠죠? 그리고 그것에 의해 온 세상을 해석하려고 들지요. 이 과정에서 다른 생각이나 패러다임 또는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분쇄합니다. 또 신자유주의의 경우처럼, 근본적인 내용도 모르면서 서로 기나긴 투쟁을 하기도 합니다. 요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 이른바 '자본주의 4.0'입니다. 사람들은 덩달아 영문도 모르고 '자본주의 4.0'이라고 떠들고 다닙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떠드니 한국의 언론들도 앞을 다투어 떠들어 댑니다. 실제로 현대 문제의 본질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현대 세계의 문제가 무엇인지 진지한 성찰이나 근본적인 문제의식도 없이 단지 현실적인 경제현상에 대한 임시방편을 위해 대충 채택한 아이디어를 마치 거대한 이데올로기인 듯이 떠들어대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릅니다. 이것이 소위 현대의 경제학이요 사회과학입니다.

이런 종류의 작은 생각들이 어떻게 패러다임이 될 수 있으며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계의 많은 문제들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힘든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런 미디어의 편향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라도 그것이 특정한 지배 세력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게 하는 근본 원인도 이 때문이죠.

(3) 지식사회(Knowledge society)

지식사회(Knowledge society)라는 용어는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 1909∼2005)의 <단절의 시대(The Age of Discontinuity : 1969)>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라고 합니다. 피터 드러커는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피터 드러커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Post-Capitalist Society, 1993)>에서 앞으로의 사회는 지식사회라고 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새로운 노동과 조직의 개념, 주권국가의 변모, 그리고 지식과 교육의 중요성을 사실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사회가 지식사회로 변화하는 모습과 그 특징, 단일 민족 국가가 세계적인 조직체로 변화하는 현대정치체계, 탈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지식의 중요성을 규명하고 있습니다.

드러커는 사회와 조직, 그리고 국가까지도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있습니다. 영원히 원형을 유지하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사멸을 하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그는 현재의 강력한 조직은 국가가 아니라 기업 특히 다국적 기업이라고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기업은 경제적 이윤 추구뿐만 아니라 공익을 추구하고 지역공동체, 세계공동체를 형성하는데 기여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는 국민국가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으며 유럽경제공동체(EEC)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등과 같은 지역 공동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드러커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자본·자원·노동이 부가가치 창출의 주요 수단이었으나 이제는 생산성과 혁신이 보다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생산성 향상은 기술을 통해 가능한 것인데 이것은 지식을 응용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은 통합되기 때문에 노동자 - 자본가의 대립이나 화이트칼라 블루칼라의 대립과 같은 전통적인 모순들은 사라지게 되고 육체노동 중심의 사회에서 정신노동 중심의 사회로 이동하여 지식이 주체가 되는 사회가 된다고 합니다.

드러커는 실용지식이 시장의 지배적인 요소가 될 지식사회에서는 조직(organization)의 체계(system)도 바뀌어야 한다고 합니다. 즉 전통적으로 있어오던 조직에서의 서열과 권한보다 상호 이해와 신뢰가 바탕이 된 팀워크가 더 중요한 조직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피터드러커는 정보화시대에는 보다 창의적이고 전략적인 지식근로자들이 조직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나아가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이들의 경쟁력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보화 시대를 연 전화기(벨)와 컴퓨터의 초기 모습(에니악 컴퓨터)

드러커는 노동자를 ① 지식노동자, ② 기계노동자(육체노동이 기계와 에너지에 의해 확대되는 노동자), ③ 육체노동자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들 노동자들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분포되어있지만 미래에 필요한 인력은 지식노동자라는 것입니다. 지식적 토대를 갖지 못한 국가는 정보사회로 옮겨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드러커는 현재 패러다임의 변화의 시점을 정보통신기술의 혁명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하나의 통합적인 세계를 만들어 국가 간의 경계가 갖는 의미는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정보의 교류로 인하여 세계가 하나의 시민공동체로 통합된다고 합니다.

드러커의 생각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을 사회변동의 주요원리로 파악하는 '기술결정론'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현대 사회의 변화를 논할 때, 기술 결정론을 완전히 거부할 만한 특별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자면, 전체 학문에 걸쳐서 그만큼 패러다임에 대한 기술 압박요인이 증대했다는 말이지요. 그렇지만 드러커의 생각들은 다니엘 벨(daniel Bell)의 생각과 큰 범주에서 별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에는 드러커와 같이 경영학적인 측면에서 또는 미래학의 관점에서 패러다임을 논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분석은 하나같이 패러다임에 대한 이해가 없어 이론적 깊이가 없고 자본주의 중심부의 현상 분석에만 치중하여 역사적인 분석이나 이데올로기적인 통찰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부가 너무 부실한 상태입니다. 물론 피터 드러커는 장기간에 걸친 다양한 현장 경험과 이론적인 편력이 있었던 사람입니다만, 드러커의 이론조차도 "그저 미국이나 유럽만의 현상 분석에만 치우쳐" 있는 가장 미국적인 이론에 불과합니다(드러커는 네덜란드계 오스트리아인이지만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습니다).

어떻게 다국적 기업이 세계를 주도하고 국민국가가 의미가 없어집니까? 다국적 기업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싸질러 놓은 오물(汚物)들을 치워야하는 것은 결국은 국민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가난한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백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무는 누가 지고 있습니까? 결국은 그 나라 그 정부이지 미국이나 유럽연합(EU)이 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도대체 드러커의 이론은 누구를 위한 이론입니까? 드러커가 높이 평가한 각종 지역 공동체 때문에 세계경제의 위기가 오고 있는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그리고 인류의 비극인 세계대전도 결국은 이와 유사한 경제블록화(Economic Blocking)의 결과였습니다. 나아가 미래에 필요한 인력은 지식노동자고 지식적 토대를 갖지 못한 국가는 정보사회로 옮겨갈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전체 지구인의 70% 이상은 패러다임의 연구에서 제외시키는 것입니까? 도대체 그 미래라는 것을 전세계인들에게 왜 이렇게 강요하고 있습니까? 누구에게 좋으라고 이렇게 편향된 이론(biased theory)들을 강요합니까?

현상을 너무 대충 보려고 하니 이 같은 분석이 생기는 것이지요. 현상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이론가들이 현상 분석도 결국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패러다임이라는 이 복잡한 문제를 단지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만 보고 분석한다는 자체가 문제입니다. 패러다임에 관한한 현상(phenomenon)은 결코 실체(substance)가 아니고 '빙산의 일각(the tip of an iceberg)'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니스의 경우와 드러커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드러커의 분석을 이니스식으로 말하면, "항구성을 지닌 요소들을 조직적이고 잔인하게 파괴하고" 오로지 현재와 중심부 자본주의에만 "신들린 듯 집착하는" 이론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이니스의 지적처럼, 기술의 변화 속에서도 드러커는 끊임없이 대중들에게 어떤 패러다임을 위한 편향(bias)들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고 정신없는 사람들과 미디어들은 이에 대한 사회적 광고(social propaganda)를 끊임없이 해대는 것이겠죠. 결과적으로 득을 보는 집단이 분명히 존재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대다수 국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는 대다수 세계인들은 더구나 아니라는 것이죠.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의 해체되는 모습들 속에서 다시 정보통신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문제가 제대로 인식되고 해결되기도 전에 더 많은 혼란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죠.

이제 디지털 시대(Digital Age)가 온 것입니다. 패러다임의 혼란 속에서도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대에 돌입하자 수많은 현상적인 변화를 파악하기에도 급급하다 보니 패러다임적 시각이나 이데올로기적 역사성들을 함께 고려할 정신적 학문적 여유가 없어 현대의 학문들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상태라고나 할까요?

지금까지 우리는 머나먼 길을 달려 디지털 시대 이전에 나타났던 수많은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해체 모습들을 분석해왔습니다. 이제까지의 분석만으로도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은 너무 너덜너덜해져서 기워서 입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제 다시 세계는 인터넷 혁명(Internet Revolution)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이중의 부담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는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재구성(再構成)이라는 문제와 다른 하나는 디지털 패러다임의 구축(構築)의 숙제입니다. 이 디지털 시대도 패러다임이 제대로 형성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단지 자본주의의 일부 변형된 모습일까요? 우리는 패러다임의 노독(路毒, travel fatigue)에 지친 상태에서 다시 미래를 기약하기 힘든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필자주석

1. Harold Innis,(2007 edition) Empire and Communications. (Toronto: Dundurn Press, 2007), pp.1∼8.

2. Harold Innis, The Bias of Communication.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51) pp3∼-5.

3. Harold Innis, (2007 edition) Empire and Communications. (Toronto: Dundurn Press,2007) p.7.

4. Alexander John Watson, Marginal Man: The Dark Vision of Harold Innis.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06) p313.

5. Harold Innis, (2007 edition) Empire and Communications. (Toronto: Dundurn Press, 2007) p.104.

6. 그리스에 대한 언급은 Heyer, Paul. (2003) Harold Innis. Lanham, MD: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Inc., p. 66. 현대문명에 대한 이니스의 경고는 Harold Innis, Changing Concepts of Time.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52) p.15.

7. "The overwhelming pressure of mechanization evident in the newspaper and the magazine, has led to the creation of vast monopolies of communication. Their entrenched positions involve a continuous, systematic, ruthless destruction of elements of permanence essential to cultural activity." Harold Innis, Changing Concepts of Time.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52) p.15.

8. Crowley, D., & Heyer, P. Communication in history: Technology, culture, society, 2nd edition. (White Plains, NY: Longman,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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