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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이야기가 길러낸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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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이야기가 길러낸 아들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21> 상상의 새들과 회상의 둥지들

몇 년 전에 나는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기억 속으로, 생각나는 최초의 장면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 때 나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젖을 빨고 있었다. 어머니는 빨간색 나이트 가운을 입었고, 난 내 작은 손가락으로 그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어머니 젖의 맛까지 되돌리고 싶지만, 떠오르는 건 입안의 찝찌름한 느낌과 만족스러움, 포만감이 고작이었다.

첫 기억은 내게 흐릿하고도 신비스럽게 남아있으며, 이야기를 해보니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1970년에서 71년까지 요르단에서 일어난 '검은 9월 사건'1)과 연결을 짓고 나서야 나의 첫 기억은 보다 분명해졌다. 그 무렵 나는 많아봐야 두 살이었다. 어머니에게 내게 몇 살까지 젖을 먹였느냐고 물어보니, 두 살까지라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어머니 품에서 젖을 먹던 거기는 요르단이며, '9월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 개인적 기억과 아기인 내가 어머니와 나의 관계를 제대로 인식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은 그렇지 않다.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아마 자기 친구일 부상당한 전사를 위문하러 간 적이 있는데, 나는 아직도 그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전사는 벌거벗은 채 침대에 누워 있으며, 가슴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아버지는 침대 옆에 앉아 있고, 나는 잡동사니에 끌려 방안을 온통 기어 다녔다. 우리가 살던 그 요르단의 난민촌에서 온 가족이 옥상에 올라갔던 어느 날도 나는 기억한다. 나는 삼촌의 팔에 안겨 있었다. 모두들 수평선을 바라보기에 나도 바라보았는데, 내게는 먼지와 어른들의 얼굴에 어린 깊은 수심만 보였다.
▲ 1948년 재앙. 고향에서 쫓겨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키파 판니

나처럼, 아마도 나처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기들 인생의 세세한 부분들을 그들이 살았고 또 떠나야만 했던 장소들을 통해 기억한다. 그들 전체에게 일어났고 아직도 일어나고 있으며, 전 세계가 뻔히 보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비극과 연결지어서 말이다. 같은 방식으로 나는 당신들에게 내 이야기 몇 토막을 전하고 싶다.

나의 두 할머니는 내게 자기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주어서, 마침내 그 이야기들은 내 이야기가 되었다. 친할머니는 오렌지 과수원에 물 주듯 내 기억에 자양분을 댔으며, 하이파 근처 우리 마을에 여전히 머물러 말갈기를 쓰다듬기라도 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 내 상상력을 일깨웠다. 내가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 때면, 할머니는 좋았던 옛 시절의 고향과 이웃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똑같은 애틋한 느낌으로, 외할머니는 내게 '사라'라는 유대인 여자 친구와 놀았던 자기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바쓰' 2)때면 유대인 이웃들을 위해 대신 전등불을 켜주고는 했다는 이야기들. 외할머니는 말하기를, 이스라엘이 점령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쫓아내지만 않았다면 유대인과는 아직도 친구였을 거라고 했다.

나이가 들자, 나의 정치적 선택3)은 분명해졌다. 가족들은 모두 내 주위에 몰려들어서 그래도 신이 존재한다고 설득하려 했다. 이 오랜 일련의 회합이 끝난 뒤, 할머니는 나랑 둘만 있을 때 말했다. 나는 손자들 중에 너를 가장 사랑한단다, 네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야, 시리아로부터 기차에 총을 숨겨 팔레스타인 전사들에게 날라주던 내 오빠처럼 말이야. 또 언젠가는 할머니는 역시 손자들 중에 나를 가장 사랑하신다면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나도 또렷이 기억하는 이야기, 할머니의 전 남편이자 나의 할아버지와 내가 첫 대면한 순간의 일화를 되풀이했다.

쿠웨이트에서 일하던 할아버지가 요르단의 암만에 잠깐 왔으며, 온 가족이 그를 맞으러 할머니 집에 모였다. 난민촌의 UNRWA 4)선생님이었던 어머니도 나를 데리고 암만으로 갔는데, 서두르느라 내 옷차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모앙이었다. 집에 들어서서도 나는 할아버지한테 다가가지 않고 뒷전에 있었다. 할아버지가 내게 가까이 오라고, 악수를 하자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왜 그러느냐고 할아버지가 물어 나는 답했다. 당신이 우리 할머니를 구박했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나더러 가서 코나 닦고 와서 말하라고 5)비아냥거렸다. 나는 옷소매로 코를 문지르고는 도전적으로 말했다. "닦았어요, 이제 뭐요!"
▲ 이들은 아직도 옛집 열쇠를 손에 쥐고 고향에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키파 판니

역시 전 남편,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와 헤어진 우리 어머니는 하이파에 대해 내게 말해줄 만한 추억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가 4살 때 그곳을 떠나왔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나는 최근에야 하이파에 다시 가서 어머니가 살던 옛집을 둘러볼 수 있었다. 간신히 길을 찾아 현재 집주인의 허락을 받아 집안에 들어서서, 어머니는 여기저기, 구석구석 손짓하며 말했다. "여기서 밥을 먹었지." "저기가 내가 놀았던 데야." 등등. 어머니가 무슨 짓을 했다거나 어떤 일이 있었다면서 각 지점을 가리킬 때마다, 나는 집 잃은 새처럼 정처 없이 떠돌던 내 상상력이 마침내 둥지를 찾아 돌아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집을 나오기 직전에 어머니는 집 바깥벽에 다가가서 새로 바른 듯한 부분에 손을 짚고, 나를 아주 묘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속삭였다. "여기, 우리 할아버지가 총을 숨기곤 하셨단다. 우리가 떠나도 할아버지는 남았고, 싸우다 돌아가셨다."

팔레스타인의 이런 다양한 기억, '그때 그렇게 살았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기억들이 난민촌의 지루한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시간이 그 이후로는 다시는 예전과 같지 않았던 역사적 시점 이전의 기억들이 무궁무진하게 재생되고 서술되어, 실제 기억의 부족을 메워준다. 기억의 서술 덕분에, 난민촌에서 태어나 갇힌 삶6)을 살 수밖에 없는 아이들도 난민촌 이전에는 어떠했는지, 우리가 살던 곳에서 자연스럽게 살던 때 삶이란 얼마나 달랐는지 알게 된다.

이 특별한 기억 속의 시간이야말로 난민촌을 언제나 혁명 사업의 따뜻한 무릎이 되게 해주는 힘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이미 종료된 과거지사로 만들어 역사책과 박물관에 처박으려는 점령자들의 기도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자 방해물이다. 서술된 기억의 시간은 사람들을 꿈에 동여맨다. 사람들은 옛집의 열쇠를 아직도 손에 꼭 쥐고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필자주

1) 검은 9월 사건: 팔레스타인 혁명은 당시 요르단에서 진행 중이었다. 혁명은 힘과 지지를 받았으며, 정권 유지에 불안을 느낀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팔레스타인 게릴라 전사들(페다인)과 전쟁을 벌였다. 요르단 군대는 디빈 숲에서 그들을 포위한 후 학살했다. 시리아 군대가 개입해서 페다인을 구하려고 했을 때, 이스라엘 공군은 이를 격렬히 막았다. 거의 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살해당했고, 혁명은 레바논으로 옮겨갔다.

2)사바쓰: 유대교 안식일. 이때 유대교인들은 전기기구를 만질 수 없다.

3)정치적 선택: 팔레스타인 공산당.

4)United Nations for Relief and Works Agency: 국제 연합 난민 구제 사업국

5)가서 코나 닦고 와서 말하라: 모욕하고 무시할 때 하는 말.

6))난민촌의 삶: 난민촌에서는 타르가 풍선껌이고 낡은 양말을 둘둘 만 것이 공이다. 겨울(팔레스타인은 겨울이 우기)에 근처 계곡에서 수영을 배우며, 유일한 교육 시설이 UNRWA이다.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www.palbridge.org 기획.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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