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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淨土)를 염원하는 신앙의 두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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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淨土)를 염원하는 신앙의 두 갈래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40> 감통편 '광덕 엄장(廣德 嚴莊)'조

달아 이제
서방까지 가시겠습니까?
무량수불전에
일러다가 사뢰소서
다짐 깊으신 존(尊)을 우러러
두 손을 모두와
원왕생(願往生) 원왕생
그릴 사람 있다고 사뢰소서
아으 이 몸 남겨두고
사십팔 대원(大願) 이룰 수 있을까?

향가(鄕歌)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형시로, 현재 스물 다섯 수의 향가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스물 다섯 수 가운데 열 네 수의 향가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향가 열 네 수는 향가 자체 뿐 아니라 개별 향가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향가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준다. 뿐 아니라 『삼국유사』에는 향가 일반에 관한 기록도 더러 보인다. 예를 들어 감통편 '월명사 도솔가'조를 보면, "신라 사람들은 향가를 숭상한 지가 오래 되었다. 이 때문에 때로는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는 귀절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향가들 중에는 그 애절하고 간절한 사연이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월명사의 '죽은 누이를 그리는' 제망매가가 그렇고, '죽지랑이라는 화랑을 기리는' 모죽지랑가가 그렇고, 앞에서 인용한, '서방 극락세계로 가고자 하는' 광덕의 원왕생가가 그렇다.
▲ '광덕엄장'조의 무대였던 분황사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풍경. 당간지주 너머로 멀리 경주 남산이 보인다. ⓒ프레시안

원왕생가는 달을 향해, 서방 극락세계로 가고자 하는 마음을 간절히 펴보이고 있는데 『삼국유사』는 이 원왕생가에 얽힌 이야기가 당시 신라 사회에 퍼져 있던 불교신앙이 현실지향적인 기복신앙을 벗어나 왕생극락을 추구하는 내세지향적인 미타신앙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광덕과 엄장이라는 두 친구가 열심히 수행하여 마침내 서방극락으로 간다는 얘기이다. 『삼국유사』에는 두 사람의 성인(聖人) 이야기를 다룬 기사들이 몇 있다. 포산의 두 성인 도성과 관기를 다룬 피은편 '포산 이성'조가 그렇고, 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을 다룬 탑상편 '남백월 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조가 그렇다. 뿐만 아니라 탑상편의 '낙산 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조는 관음보살 친견을 에워싼 원효와 의상의 에피소드를 들려주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두 친구 사이의 우정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단순한 우정만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같은 길을 가는, 말하자면 도반(道伴)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면서 도(道)를 닦다가 마침내는 성불한다든가, 정토에 이른다든가 하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감통편 '광덕 엄장'조 역시 그런 기사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 1915년 경의 분황사 모전석탑의 모습. ⓒ프레시안

문무왕 때에 광덕과 엄장이라는 중 둘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사이 좋은 동무로 지냈다. 두 사람은 언제나 다짐하기를 "먼저 극락으로 가는 사람이 꼭 서로 알리도록 하자."고 했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 마을(혹은 황룡사 서거방西去方이 있다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에 은거하면서 신을 삼아 생계를 유지하며 처자를 데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큰 규모로 농사를 지었다.

이 대목에서 일부 학자들은, 엄장이 남악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큰 규모로 농사를 지었다."라는 대목을 오기(誤記)라고 지적한다. 『삼국유사』 원문에 "대종도경(大種刀耕)"이라고 한 대목을 그렇게 번역했는데, 학자들은 "대종도경(大種刀耕)"은 "화종역경(火種力耕)"이라야 맞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무를 불질러 태운 후에 힘써 농사짓는" 말하자면 화전농법으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어느날 해 그림자가 붉은빛을 띠고 소나무 그늘이 고요히 저물었는데, 엄장의 창 밖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살다가 속히 나를 따라 오라."

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가 보니 구름 위에서 하늘 풍류소리가 들리고 밝은 빛이 땅에 드리웠다. 이튿날 광덕이 사는 곳을 찾아갔더니 광덕은 과연 죽어 있었다. 이에 그 처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장례를 치르고 말했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어떻겠소."

광덕의 처도 좋다고 하고 드디어 그 집에 머물렀다. 밤에 자는데 엄장이 광덕의 처와 관계하려 들자 여자가 거절하면서 말했다.

"스님께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엄장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물었다.

"광덕도 이미 그러했거니 나하고 같이 못할 게 무어요?"

광덕의 처가 말했다.

"남편은 나와 함께 십여 년을 같이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거늘, 더구나 어찌 몸을 더럽혔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서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었습니다. 어떤 때는 십륙관(十六觀)을 실천하는데 관(觀)이 절정에 이르면 창으로 비치는 밝은 달빛에 올라 가부좌(跏趺坐)하였습니다. 정성을 기울임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가지 않으려고 한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체로 천릿길을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부터 알 수가 있는 것이니, 지금 스님의 하는 일은 동쪽으로나 가는 것이지 서방 극락은 모를 일인 줄 압니다."

엄장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물러나 그 길로 원효법사의 처소로 가서 요체(要諦)를 간곡하게 구했다. 원효는 삽관법(鍤觀法)을 만들어 그를 지도했다. 엄장은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꾸짖고, 한 마음으로 도를 닦으니 역시 서방정토로 가게 되었다.
▲ 현재의 분황사 모전석탑. ⓒ프레시안

광덕이 먼저 서승(西昇)한 후, 엄장이 광덕의 처와 동거하면서 벌였던 수작에서 수모를 당한 후, 대오각성하여 원효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엄장도 서승하게 되었다는 스토리가 우리에게는 낯이 익다. 예컨대 '남백월 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조에서 고지식한 달달박박이 관음보살의 화신을 몰라보고 내쫓았다가 노힐부득이 먼저 성불한 다음에야 노힐부득의 도움으로 뒤늦게 성불하게 된다든가, '낙산 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조에서 의상이 관음보살을 친견한 후에 낙산사를 찾은 원효가 길에서 만난 관음보살을 몰라본다든가 하는 스토리가 연상되는 것이다. 일연은 '광덕 엄장'조 말미에서 엄장을 깨우쳐 준 광덕의 처가 분황사의 계집종으로, 관음보살 십구응신(十九應身)의 하나였다고 말하고 있음에서도 우리는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친구의 어느 한쪽이 관음보살의 도움을 받는다는 설정이 모두 같은 것이다.

이 기사는 "문무왕 때에 광덕과 엄장이라는 중 둘이 있었다"로 시작한다. 허두에서 이야기의 시점(時點)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문무왕 시대라면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멸한 후, 당군을 축출하여 마침내 통일을 이룩한 시기이다. 통일을 이룩하긴 했어도 수십년에 걸친 전쟁으로 막대한 인명 및 재산 상의 피해를 보아 국력이 피폐했던 시기였다. 백성들은, 전쟁에 나가 목숨을 바치거나, 갖가지 부역에 시달렸고 농사 소출은 또 군량미로 바쳐야 하는 등 온전히 살림을 꾸려가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축성이나 궁궐 중수 같은 부역이 오죽했으면, 문무왕이 성곽을 쌓으려 했을 때 의상이 글을 올려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비록 풀 둔덕에 땅 금을 그어 성으로 삼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타고넘지 않을 것이요, 재앙을 물리치고 복이 들어오도록 할 수 있지만, 정치와 교화가 밝지 못하면 비록 만리장성이 있더라도 재해를 없앨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여 축성(築城)을 만류했을까?

광덕과 엄장의 이야기는 이런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통일이 된 이후에 사회계층의 분화가 심화되어 양인(良人) 신분이 몰락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시대에 광덕은 짚신을 삼아 생계를 꾸리고 그 처는 분황사의 노비 노릇을 하였으며, 엄장은 산속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았던 것이다. 그 시대 그런 사람들에게 신라 땅이 불국토라는 주장은 매우 비현실적인 이야기였을 것이다. 최상류 귀족층을 제외한 여타 백성들에게 신라라는 나라가 불국토는커녕, 한 목숨 부지하기도 힘든, 참담하고 어지러운 그야말로 예토(穢土)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랬기에 지상의 삶을 버리고 멀리 서방의 정토(淨土)를 꿈꾸며 간절하게 아미타불을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신라 정토신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 정토신앙 안에서도 서로 이질적인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는 학자가 있다. 예컨대 고 이기백 교수는 "신라 정토신앙의 두 유형"이라는 글에서 미타정토신앙을 '염불에 의한 현신왕생의 신앙'과 '추선에 의한 사후왕생의 신앙'으로 구별하고 있다. 이 두 유형의 차이는, '염불에 의한 현신왕생의 신앙'이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현세에서의 삶이란 초월되어야 할 것으로 보아 서방극락에 현신왕생 하기를 바라는 반면, '추선에 의한 사후왕생의 신앙'의 입장에서는 현세에서 편안한 삶을 누린 후 죽게 되면 추선(追善)으로 사자(死者)의 정토왕생을 비는 것이었다.
▲ 분황사 모전석탑 모퉁이의 사자상. ⓒ프레시안

추선으로 사자의 정토왕생을 빌었던 예로는 김인문이 당나라에 잡혀 있을 때 인용사라는 절을 지어 관음도량으로 삼다가 인문이 죽자 관음도량을 미타도량으로 고친 일을 들 수 있겠고, 소성왕비 계화왕후가 무장사 미타전을 지어 소성왕의 정토왕생을 빈 일이라든가, 중아찬 김지성이 감산사를 짓고 미륵상과 미타상을 조성하여 죽은 부모와 가족들의 정토왕생을 빌었던 예를 들 수 있다.

이처럼 왕족이나 귀족들이 '추선에 의한 사자(死者) 정토왕생'을 추구했다면, 일반 백성들은 주로 '염불에 의한 현신(現身) 왕생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 감통편 '욱면비 염불서승'조에 보이는, 주인의 미타 결사(結社)에 무임승차하여 현신왕생한 계집종 욱면이 그러하고, 피은편 '포천산 5비구'조에 그려진 다섯 비구(比丘)의 서승(西昇)이 그러하며, '광덕 엄장'조의 주인공 광덕과 엄장의 현신왕생이 또 그러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이기백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은 주로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 가령 평민이거나 노비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평민 중에서도 사회적으로 몰락해 가는 층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현세에 있어서 이렇다 할 희망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현신왕생의 신앙은 말하자면 민중의 신앙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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