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한국시간) 실시될 유엔총회의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에서 정부가 처음으로 찬성할 것이라는 전망보도가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정부의 방침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번 인권결의안이 유럽연합(EU)을 주축으로 제출됐지만 발의한 37개 나라에 포함된 미국이 실제 숨은 주역이기 때문에 핵실험 이후 미국이 걸고 있는 대북 제재 드라이브를 정당화하는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북한 문제 전문가들은 북한 인권의 심각성, 그에 대한 남한 정부의 적절한 조치 필요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유엔 무대에서 미국이 중심이 된 여론몰이식 압박은 인권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은 "정치적인 목적이 아닌 관점에서 북한 인권을 제기할 때 반대할 사람은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미국이 제기하는 북한 인권 문제는 북한의 정권 교체, '악의 축' 제거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같이 동참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백 실장은 "조지 부시 미 행정부는 '악의 축'을 제거한다며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이 실패하자 자유, 민주주의, 인권을 거론하면서 비군사적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며 "대북 인권 공세도 같은 맥락에서 취해지는 것으로 결국 정권 교체를 겨냥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한반도 이슈의 근본 문제는 북한 핵문제라고 강조하고 "자유민주주의, 인권, 도둑정치, 폭정의 전초기지, 무법 정권 같은 언사를 동원해 인권이라는 비군사적인 방법으로 제재와 압박을 가하는 것은 비핵화 달성에도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정치성 배제한다면서 가장 정치적인 선택"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찬성 시점의 문제를 제기하며 우리 정부의 판단이 지극히 정치적이라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북한 인권은 시급히 개선돼야 할 인류 보편의 문제인데 정부는 정치적인 압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가장 정치적인 시기를 택했다"고 말했다.
이는 정부 일각에서 북한이 핵실험을 한 상황이라는 것,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움직임에 어깃장을 놔서는 안 된다는 것,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입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 등을 근거로 인권결의안 찬성론이 나오고 있는 것에 대한 반박이다.
김 교수는 "국제적인 대북 공세 분위기를 타야 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시기를 고른 것"이라며 "꼭 해야 한다면 차라리 내년에 하는 게 덜 정치적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권 문제는 남북한의 화해 분위기와 신뢰 수준이 높아졌을 때 비로소 꺼내야 한다"며 "그래야 북한의 반발이라는 부작용도 적어지고 북한 인권 개선의 실효성도 더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2003년부터 2년 6개월 동안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북한인권 담당 전문위원으로 일했던 서보혁 박사는 15일 <프레시안>에 보낸 기고문에서 "유엔 인권위원회나 총회와 같은 헌장기구(charter body)는 인권전문가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각국 대표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들 헌장기구에서 인권문제를 다루는 일차적 판단기준은 자국의, 혹은 국가간 이해관계이기 때문에 보편성의 원칙이 준수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서 박사는 "미국의 광범위한 인권침해 상황에 대해서 유엔 인권위는 한번도 결의안을 상정한 바 없고, 중국 역시 인권침해가 심각함에도 불구함에도 결의안이 상정될 경우 중국과의 무역·외교관계를 의식한 대다수 투표국들은 결의안을 부결시켜 왔다"며 "유엔 총회와 인권위(올해부터 인권이사회로 격상)는 그 구조상 한계로 인해 인권의 보편성을 수호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이뤄지는 표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서 박사는 "대북정책에 있어 북한인권 개선 외에도 한반도 평화와 안전에 긴요한 더 시급하고 중요한 다른 정책 목표도 갖고 있다. 따라서 북한 인권상황 개선을 위한 우리의 노력도 대북정책의 전반적 틀 속에서 여타 주요 우선순위와 조화를 이루면서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정부의 지난해 입장이 여전히 유효하다며 기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관련기사 바로가기)
'적극적인 대안론'도 부상
반면 조성렬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연구실장은 15일 평화재단 창립 2주년 라운드테이블 발표문에서 유엔 인권이사회 창립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체제 출범 등에 따라 한국 정부의 선택을 고려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조 실장은 대신 "한국정부는 강경한 대북인권결의안을 요구하는 프랑스 등 유럽연합 주도국가와 북한이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상호협력을 전제로 하는 인권개선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정부의 대안적인 활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유엔편의주의적인 기권 자세에 제동을 걸고 본격적인 대 유엔 인권외교에 착수하기 위해 외교부 내에 '북한인권 전담대사'를 임명할 필요가 있다"며 "북한인권대사를 통해 '정치적 비난과 압박'이라는 방법보다는 유엔 등 국제사회 및 시민사회와 전문기구의 협조 속에 실질적인 개선을 위해 체계적인 절차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민순 외교부 장관 내정자 "상황 변화 감안해야"
한편 이번 인권결의안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이르면 16일 오후 공식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 후보자는 16일 "보편적 가치에 따라 대처하겠다"고 말해 표결에 참여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송 후보자는 이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인사청문회에서 열린우리당 정의용 의원의 질문에 이같이 말하고 "인권문제는 전세계 어느 나라에도 있는 일이고 보편적 기준에 의해 적용돼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송 후보자는 특히 같은 당 최성 의원이 "정부의 입장을 보면 표결 찬성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묻자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이어 "그럼 과거에는 왜 기권했느냐"는 질문엔 "상황이 변하고 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지금 이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요인의 변화가 있다"면서 "북한 핵실험 같은 것도 그렇고 미사일 문제도 그렇고 여러 요소들이 (대북인권결의안 표결참여 여부를) 판단하는데 반영돼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정부 소식통은 "기권하자는 통일부와 찬성하자는 외교부 사이에 논쟁이 있었는데 만약 찬성 쪽으로 입장을 정했다면 통일부가 논쟁에서 밀렸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오는 17~18일로 예정된 이종석 장관의 금강산 방문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연기된 것도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져야 하는 시점과 겹치기 때문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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