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주식투기꾼으로 전설적인 삶을 살다간 제시 리버모어(Jesse Livermore)의 삶과 죽음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주식 방면에 대해 공부한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를 주식투기꾼이라 말했는데 이는 경멸이 아니라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시한 것이다. 그는 실로 '투기'라는 말을 사랑했었던 승부사의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타짜'였다고나 할까.
그는 1929년 10월, 세계 공황을 촉발한 뉴욕 증시 대폭락 사태에서 주식 공매(空賣)로 단 하루 만에 1억 달러, 지금으로 치면 대략 30억 달러, 약 3조원을 벌어들이면서 전설적인 증시 투기꾼으로서 악명을 떨쳤다.
지난 1997년 IMF 사태 당시 한국 증시 폭락의 배후에 있다는 소문으로 악명을 떨친 '소로스'와 같은 경우라 하겠다.
하지만 리버모어나 소로스 모두 증시폭락의 주범일 수는 없다. 그것은 시장의 메카니즘을 모르는 사람들의 원망일 뿐.
어떤 재화의 가격이 그 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오르다보면 언젠가 큰 폭으로 하락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낌새를 알아차린 투기꾼이 매도에 가담하여 돈을 벌어들이는 행위 자체는 비난받을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정서법'이란 것이 있어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 역시 자연스런 일이라 하겠다. 여름 시즌에 휴가 끝내고 돌아오는 서울로의 상행선이 엄청 정체되는데 누군가 하행선을 신나게 달려간다면 어쨌거나 밉게 보이는 법.
그러나 그가 전해준 주식거래기법은 오늘날 모든 투자자 그리고 투기꾼들에게는 금과옥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제시 리버모어(Jesse Livermore)는 1877년 7월 26일 오후 6시, 미국 매사추세츠 주-3인조 그룹 비지스(Bee Gees)의 노래로 유명한-에서 손바닥만한 땅뙈기를 경작하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연 정축(丁丑)
월 정미(丁未)
일 계유(癸酉)
시 신유(辛酉)
그의 사주를 보면 수학(數學)적 머리가 우수함을 알 수 있다. 여름에 태어난 물이니 물의 기운을 좋아할 것이고 수학은 오행 상으로 물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사주 상 필요한 기운이 신금(辛金)이라 편인(偏印)에 해당되니 천재성을 지녔음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수학 방면의 천재인 것이다.
다소 까다로운 성격에 그다지 건장한 체격이 아니며, 약간의 우울증 기질을 지닌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팔자에 있는 정화(丁火)는 재(財)가 되니 운이 뒷받침되면 주식이나 증권 계통에서 큰 돈을 벌게 되는 행운도 따를 운명이다.
세기적 주식투기꾼의 운명은 이렇게 생겨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거금을 벌려면 서늘한 목(木) 기운을 만나야 하는 법인데, 그는 16세부터 목운(木運)을 만나고 26세부터 수운(水運)도 만났으니 타짜 등장은 필연인 셈이다.
참고로 오늘날 주식투자의 대가로 알려진 워렌 버펫 역시 태어난 날이 임수(壬水), 즉 물의 기운을 지닌 사람임을 밝혀둔다.
리버모어는 학교 다니면서 수학에 월등한 재주를 보였지만, 집안 사정도 어렵고 해서 그는 희망이 없는 시골을 떠났다. 1891년, 열넷의 나이, 우리나이로 중 2 정도의 어린 나이였다.
어머니가 마련해 준, 더 자라도 입을 수 있는 헐렁한 양복과 5달러짜리 지폐 한 장 달랑 들고 보스턴으로 도망치다시피 나왔던 것이다. 당시 돈 가치로 5 달러면 대략 15만원 정도라 보면 될 것이다. 열넷에 타향살이를 시작했으니 거의 무협소설 같은 이야기라 하겠다.
보스턴으로 간 그는 당시 성행하던 무허가 주식방에서 시세 중계판에 호가(呼價)를 분필로 받아 적는 일을 하면서 주식거래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말이 없고 냉정 단호한 아버지로부터 강인한 정신력을 배운 그는 타지에서 열심히 주식거래를 익히면서 실력을 쌓아갔다.
스무 살 나던 1897년 무렵에는 보스턴의 모든 주식방을 접수(?)했고 '몰빵소년'이란 명성까지 얻게 되었다. 이 때가 정유(丁酉)년이니 최초로 돈이 들어오는 운세이고 이것은 장차의 더 큰 활약을 위한 자극이 되어주었다.
정유(丁酉)는 그에게 있어 정화(丁火)는 돈이고 유금(酉金)은 수업이니 즉 돈을 벌기 위한 수련기간이 되는 것이다. 깊은 산 동굴 속에서 무공비급을 익히기 시작한 장래의 무림고수처럼 말이다.
보스턴의 모든 주식방 업주들로부터 기피의 대상인 된 그는 당시까지 모은 1만 달러(약 3억원 가치)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주식투기에 나서기로 마음먹고 1899년 기해(己亥)의 해에 본 무대인 뉴욕으로 진출하게 된다.
나중에 보면 알지만 이 때로부터 1929년 기사(己巳)년 뉴욕 증시 폭락으로 인한 대공황이 촉발되는 시기까지, 30 년간이 리버모어에게 있어 행운의 시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0년 호운이 들어선 것이다.
남다른 투자기법을 개발하여 순항 중이던 그는 1907년에 가서 문자 그대로 대박을 터뜨린다. 정도 한 번 재운이 들어오는 정미(丁未)의 해였던 것이다. 주식시장의 이상 과열로 폭락장을 예견할 수 있었고 매도를 통해 일거에 무려 3백만 달러(약 9백억 원 가치)를 벌어들였다.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면서 방심과 자만에 빠진 그는 1914년에 가서는 급기야 파산선고까지 하게 되었다. 너무 설친 탓이라 하겠다.
재기와 실패를 반복하던 그는 다시 1917년 정사(丁巳)년 무렵에는 시장에서 커다란 명성을 얻게 되었고 불어난 재산도 이제는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모습도 생겨나있었다.
리버모어의 삶을 복기해보면 그 역시 운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1897년 정유(丁酉)년에 시드 머니를 확보하고, 1907년 정미(丁未)년에 3백만 달러의 거금을 벌어들였으며, 1917 년 정사(丁巳)년에 시장의 큰 손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1927 년 정묘(丁卯)년에는 뉴욕의 초호화 아파트를 사들였고 사실상 가장 큰 손으로 거만금을 쥐락펴락하면서 절정의 세월을 구가했으니 이 모두 정화(丁火)가 그에게는 큰 재운(財運)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의 운세 또한 최후의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으니 바로 1929년 기사(己巳)년의 뉴욕 증시 대폭락 사태였다.
그는 시장이 미쳐있음을 알아차렸고 대규모 주식 공매를 통해 유명한 '검은 목요일' 장세에서 무려 1억 달러(약 3 조원의 돈 가치)를 벌어들였다.
당시 미국 정부와 여러 재계의 거물급 인사들로부터 부탁을 받고 대승적 차원에서 투자 포지션을 정리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 몇 배를 벌어들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시에 돈을 날린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택했고 모든 사람들이 리버모어를 원흉으로 몰아세웠다. 그 역시 괴로웠을 것이지만 실은 이 때, 그의 운도 끝나고 있었다. 그의 나이 쉰하고도 둘이었다.
정리하면 1899 년 기해(己亥)년에 뉴욕으로 진출하면서 시작된 호운(好運)이 30년이 지나 1929년 기사(己巳)년의 충운(衝運)을 맞이하면서 식어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상사 어떤 악운도 호운도 30년 이상 가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그 엄청난 사건 이후 그럭저럭 운세가 이어지는 것 같았지만 56 부터 신축(辛丑) 대운을 맞이하면서부터 무기력 증세에 빠져들었고 투기에 대한 정열도 식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와 함께 그 많던 재산도 흐지부지 없어지고 말았다.
약간 다른 이야기이지만, 명리학에 관심 있는 분들은 이 사람의 용신이 신금(辛金)이라 했는데 왜 신축(辛丑)운부터 급격한 내리막을 달렸는지 연구해보시기 바란다. 그 이치를 알면 내공이 월등히 증진하고 한 단계 올라서게 될 것이다.
우울증으로 시달리던 그는 1940년 말, 권총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비극적인 결말이었지만, 그 또한 타짜 인생을 살아온 승부사의 모습을 엿보는 것 같아 가슴을 숙연하게 한다.
공업(功業)을 이루느냐 마느냐, 그 역시 운이 7이고 기가 3이라는 세간의 말이 그저 빈 것이 아님을 새삼 느끼게 한다.
늘 증시와 함께 살아가는 필자인지라 그의 얘기를 잘 알고 있었지만, 며칠 전 책방에서 리버모어의 전기를 담은 책을 만났기에 읽다가 글로 정리하게 되었다.
"최고의 투기꾼 이야기" 란 제목으로 도서출판 새빛이란 곳에서 번역 출간했다. 또 서점에는 리버모어의 저서와 해설을 함께 담은 또 다른 책도 만날 수 있다.
(전화:02-534-7250, E-mail :1tgkim@hanmail.net)
- 김태규의 명리학 카페 : cafe.daum.net/8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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