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6자회담 복귀에 전격 합의했다. 6자회담 재개의 발목을 잡았던 금융제재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북한과 미국의 발표 내용이 다르긴 하지만 6자회담 본 테이블이나 북미 양자접촉 계기에 어떤 식으로건 논의되지 않겠냐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그러나 6자회담에서 금융제재를 논의한다는 것은 6자회담의 과정이 지난할 것이라는 사실의 다른 표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융제재는 법집행 차원이라 핵폐기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는 미국, 금융제재는 자신들을 붕괴시키려는 적대시정책의 지표라는 북한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공방을 벌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해도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대북제재는 계속될 것이라는 미국과 일본의 입장도 회담 전망을 한층 어둡게 하고 있다.
그같은 상황이라면 핵실험 이후 불거졌던 국내에서의 논쟁-포용정책의 실효성, 대북 제재 참여 정도, 금강산·개성공단 문제 등- 역시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터널 속으로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핵실험 이후의 이같은 논쟁들은 가깝게는 내년 대통령 선거의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점쳐진다.
미국 브르킹스연구소 객원연구원인 임원혁 박사는 이 논쟁 중 특히 '포용정책의 실효성'이라는 쟁점에 대해 1994년 이후 미국 클린턴 행정부와 부시 행정부, 한국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경우를 심층 분석함으로써 포용정책의 성과와 한계를 검토한다.
임 박사는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북핵 문제에 관한 주요 사건들을 파헤침으로써 포용정책에 관해 쏟아지는 부당한 공격과 오해를 교정하고자 한다. '실사구시와 대북정책'이라는 부제대로 그는 철저히 사실에 근거한 분석만이 불필요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본 기사와 12월 6일 다시 돌아오는 '한반도브리핑' 임원혁 박사 편 등 두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지난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한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그 책임소재를 놓고 치열한 논란이 전개되어 왔다. 북한의 핵실험 직후에는 대북 포용정책을 탓하는 견해가 우세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실제로 북한의 핵실험 직후 실시된 중앙일보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17%만이 대북 포용정책을 유지하는 데 찬성했고 78%는 대북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으나, 10월 17일 발표된 내일신문-한길리서치 공동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3%가 포용정책을 일부 수정하되 기조는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개성공단이나 금강산관광과 같은 남북경협 사업에 대해서도 62%가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사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공방을 벌이는 정치인이나 일부 언론과는 달리, 대다수의 일반 국민들은 북한 핵실험과 관련하여 책임소재를 차분히 따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실사구시적인 태도는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불가결한 요소이다.
이 글에서는 사실관계 확인을 통해 향후 정책과제를 점검한다는 차원에서 우선 1994년 제네바 합의 체결 이후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이 가시화되기 전인 6년간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2001년 초 미국의 대북정책이 전환된 이후의 시기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음 편 원고(12월 6일 예정)에서 다루고자 한다.
제네바 합의의 기본구도
1994년 미국과 북한 사이에 체결된 제네바 합의의 기본틀을 보면, 북한이 흑연감속로 및 관련시설을 동결 후 폐기하고 비핵화선언을 준수하는 데 상응해, 미국은 경수로 및 대체에너지 제공을 보장하는 한편 북한에 대한 핵 위협을 하지 않고 관계 정상화를 약속하는 구도로 되어 있다.
기술적으로 북한의 의무사항은 명확하게 규정될 수 있는 반면 미국의 의무사항은 규정하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주변 정치여건에 좌우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북한의 흑연감속로 및 관련시설의 동결은 국제감시 하의 가동중단을 의미한다. 반면 경수로 제공은 그 완공목표연도를 2003년으로 명시하긴 했지만 목표연도는 어디까지나 목표연도이기 때문에 완공이 지연될 수 있고, 관계 정상화도 미국 국내 정치여건 등에 따라 늦춰질 수 있는 것이다. 또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재개한다면 이는 제네바 합의의 위반이자 국제평화를 위협하는 행동으로 비난받기 쉽지만, 미국이 이런 저런 사정으로 북한에 대한 경수로 제공이나 관계 정상화를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고 해서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즉, 어떤 행동이 제네바 합의의 위반에 해당되는지와 관련해 북미간에 근본적인 비대칭성이 있는 것이다.
제네바 합의의 또 하나의 특징은, 북핵 동결에 상응해 중유가 지원되고 경수로 핵심부품 제공 직전에 북한의 과거 핵활동에 대한 사찰이 이뤄지며 북핵 폐기에 상응하여 경수로가 완공되는 식으로 단계마다 서로 주고받는 (phased and reciprocal) 구도다. 미국이 북한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북한도 미국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단계마다 서로 주고받는 구도가 생긴 것이다.
미국내 일부 전문가들은 제네바 합의 체결 당시 8000여 개의 폐연료봉을 북한에 남겨둔 것이 결정적인 실수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단계마다 서로 주고받는 구도가 왜 생겼는지 제대로 모르고 하는 말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확인된 바와 같이,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완전히 폐기된 후에야 비로소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이뤄질 수 있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북핵문제가 풀릴 수 없다.
미국의 무관심과 북한의 불만
제네바 합의 이후 초기 3-4년간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취한 정책은 한마디로 무관심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2005년을 제외하면 북한이 벼랑끝 전술을 펴도 이를 무시하고 압박을 가해 정권교체를 꾀하는 부시 행정부의 '악의적 무시' 정책과는 달리, 선의도 악의도 아닌 '중립적 무시' 정책을 편 것이다.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는 적극 추진하지 않고 대북 중유제공 등 기본적인 '성의 표시'만 하면서 북한 핵 프로그램의 동결 상태를 유지한 것이 무관심 정책의 요체이다. 이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 제네바 합의로 북핵 위기가 일단락됨에 따라 미국이 북한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어졌다. 북한이 과거 핵 활동을 통해 1~1.5개의 핵무기 제조에 소요되는 핵물질을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못했다.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의 성능을 확인하기도 어려운 소량의 핵물질로는, 핵무기고를 확충한다거나 핵물질을 외부 이전하겠다고 위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최근 비밀해제된 문서를 통해 확인된 바와 같이 당시 미국에서는 북한체제가 경제난으로 인해 곧 붕괴될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북한 핵 프로그램의 동결 상태를 유지하다가 북한의 체제붕괴 후 국제공조를 통해 상황을 수습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는 경제난과 체제붕괴와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판단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경제난이 체제붕괴로 이어진 사례는 거의 없다. 경제난이 심화되면 일반사람들은 정치적 변환을 모색하기 보다는 각자 살아남기 위해 비상수단을 강구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된다. 실제 혁명의 역사를 보면 경제난보다는 정치적 자유화로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체제붕괴나 전환이 일어나기 쉽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980년대 말 사회주의권에서 일어난 체제전환도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로 상징되는 자유화의 결과이지, 경제난이나 식량난의 결과가 아니다. 따라서 1990년대 북한의 경제난이 가중되었다면 체제붕괴가 일어났을 것이라거나 한국과 중국, 그리고 국제사회의 대북지원 때문에 북한의 체제붕괴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등의 지적은 옳지 않다. 한국과 중국의 대북지원이 본격화된 것은 2000년 이후이고, 1990년대 후반 국제사회의 대북지원이 없었다면 북한의 체제붕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북한사람들이 굶어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판단이 옳든 그르든 북한의 붕괴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 제네바 합의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셋째, 제네바 합의에 부정적이었던 공화당이 1994년 11월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함에 따라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에 나서기 어렵게 되었다. 물론 이는 앞의 두 가지 이유에 비해 설득력이 약하다. 이후 '페리 프로세스'를 통해 확인된 바와 같이 공화당과 민주당이 공동으로 북한 문제를 풀 공간은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제네바 합의 이후 미국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북한은 상당한 불만을 피력했다. 경수로 공사 지연에 대해 미국에 계속 항의하는 한편 '북한체제가 붕괴될 것이라는 착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반발하기도 했다. 당시 북한과 대화창구를 맡았던 미 국무부 관리들은 지금도 사석에서 '북한이 아마 미국에 속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북한은 핵 폐기의 첫 단계로 국제감시 하에 핵 프로그램에 대한 동결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에 상응하는 미국의 행동은 미흡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북한의 벼랑끝 전술과 페리 프로세스
하지만 북한이 언제까지나 이런 상황을 용인한 것은 아니다. 1997-8년에 이르러서는 북한도 다시 판을 흔들기 시작했다.
첫째, 현재까지도 그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북한은 파키스탄과의 협력을 통하여 1997년 우라늄 농축에 활용될 수 있는 재료 및 장비를 주문했고 이듬해 이를 일부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즉, 동결되어 있는 플루토늄 프로그램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정보기관은 이에 관한 첩보를 확보했으나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 실질적으로 가동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수 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판단 하에 결론을 내리는 데 신중을 기했다.
둘째, 북한은 금창리에 거대한 지하시설을 구축하여 미국의 관심을 유도했다. 북한이 영변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핵 프로그램을 가동할 수도 있다는 미국의 우려를 역이용한 것이다.
셋째, 북한은 1998년 8월 다단계 추진체를 발사하여 장거리 미사일 개발능력이 있음을 과시했다. 한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까지도 위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다.
이처럼 북한이 다시 긴장을 고조시키자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 무관심 정책의 한계를 실감하고 페리 프로세스를 통해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비록 북한의 금창리 지하시설과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대한 일부 첩보가 확보되었지만,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위반했다고 선언하거나 합의의 기본틀을 깨지 않고 오히려 제네바 합의의 실효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북한에 대한 무관심 정책에서 적극적인 관여정책(engagement policy)으로 선회하여, 북한이 인지하는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줄여 주는 대가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통제하기로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플루토늄 프로그램에 대한 동결상태를 유지하면서 미사일 발사유예 합의를 끌어내고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한편, 금창리 지하시설과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등 불투명한 부분에 대해서는 북미관계를 개선하면서 의혹을 해소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구상은 2000년 10월 미국과 북한 간에 합의된 공동커뮤니케에 반영되어 있다. 실제로 북한 조명록 차수의 워싱턴 방문과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 이후에는 북미관계 정상화 가능성이 부각되면서, 북한의 단계적 핵 폐기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맞바꾼 제네바 합의가 완전히 이행될 날도 멀지 않은 듯 했다.
햇볕정책과 병행전략의 성과와 한계
미국의 관여정책이 본격화되면서 한국의 햇볕정책도 더 한층 힘을 받기 시작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햇볕정책은 남북간의 화해를 바탕으로 주로 경제·사회부문의 교류협력을 통해 '사실상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는 정책이다. 햇볕정책은 정책수단 차원에서 정경분리 원칙을 지향한다. 정경분리란 단순히 정치와 경제를 분리한다는 차원을 넘어, 정치·군사적 문제는 정치·군사적 문제와, 경제·사회적 문제는 경제·사회적 문제와 연계하는 '이슈 내 연계방식'으로, 각 분야의 병행 발전을 모색한다. 정치·군사적 문제와 경제·사회적 문제를 연계하는 이슈간 연계방식과는 대척점에 있다.
이처럼 이슈 내 연계방식에 기초한 병행전략은 현실주의적인 요소와 자유주의적인 요소를 복합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국제관계에서 자유주의 이론에 따르면 경제·사회부문의 교류 확대는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카(E. H. Carr)가 지적한 바와 같이 현실적으로 볼 때 경제·사회부문의 교류만으로 군사·안보 문제까지 해결하기는 어렵다. 미국과 중국 간의 관계를 봐도 경제·사회부문의 교류가 늘어나고 있지만 이것이 군비통제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군비통제는 '상호위협감축'이라는 대원칙하에 추진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에 대해 경제지원을 한다고 해서 북한이 사활적 이해가 걸려있는 군사·안보 부문에서 양보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순진할 발상이다.
실제로 북미협상을 보면 '상호위협감축'이라는 전제가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대량살상무기 통제에 진전을 이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경제·사회부문의 교류가 군사·안보 문제 해결에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해서 이를 배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경제·사회부문의 교류는 북한 내에 개혁과 개방이 이뤄지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와 군사 문제를 연계하여 경제지원에 대한 대가로 상대방의 일방적인 군비감축을 꾀하는 것보다는 병행전략을 통해 상호 군비통제와 북한의 개혁·개방을 동시에 모색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실제로 1999년과 2000년 경험을 돌이켜 보면 군사·안보 부문에 초점을 맞춘 미국의 대북 관여정책과 경제·사회 부문에 초점을 맞춘 한국의 햇볕정책이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통제에 진전을 이루는 한편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군비통제 부문에서 미국의 협조가 없는 한 한국의 햇볕정책과 병행전략은 근본적인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은 지역 및 국제 안보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남북협상을 통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 어렵고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을 통해 주도적으로 풀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미국이 군비통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북한은 이에 맞불작전으로 대응할 경우 남북간 교류협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법은 남북간 교류협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군비통제에 나서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물론 부시 행정부가 클린턴 행정부처럼 설득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정부는 부시 행정부 이후를 내다보면서 대북정책에 대한 소신을 가지고 한미간의 분업과 시너지 관계가 재현되도록 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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